"대통령 하나 수입해오면 좋겠네"

배신때리고, 배 맞추고… 불륜의 정치에 신물

다시 ‘헤쳐, 모여~’다!

다시는 안 볼 거 같이 냉랭하게 ‘우린 너무 안 맞아!’ 하고 절교선언 했던 박OO후보는 보란 듯 다시 재결합을 선언하고, 여하한 일이 있어도 안 사귀겠다던 노OO후보도 마음이 바뀌어 한번 사귀어보는 것도 괜찮겠단다.

또 처음부터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문어발작전을 펴던 정OO후보는 드디어 한 쪽으로 맘을 굳히는가 싶더니 마무리로 한번 튕겨보는 건지 ‘이거 뭐야?’하고 틀기 시작해 현재까지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는 상태다. 어디 그뿐인가. ‘헤처, 모여’라면 경험 면에서 한 끗 위라고 할 수 있는 이OO후보는 ‘너네 어떻게 그럴 수 있니?’하며 타는 질투심을 주체 못하고 있다.

말하다 보니 어디서 많이 듣던 대사다. 한동안 TV드라마에서 빠지지 않던 주제,(아, 아직도 진행 중인가?) 불륜이다. 처음에 재미있다고 열심히 보던 아줌마들도 이젠 지겨워 하는 레퍼토리인데 정치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이걸 무슨 대단한 ‘묘수’로 아는 모양이다.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선거를 한 달 남짓 앞두고(대체로 이쯤이면 당락이 판가름 나야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신물 나는 드라마를 연출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젠 진짜 쓴 맛, 단 맛 다 빠졌다. 정말 맛없다. 그만 보고 싶다. 그렇다고 채널을 딴 데로 돌릴 수도 없다. TV를 꺼버림으로써 상황이 종료된다면, ‘TV를 끄세요, 새로운 세상이 열려요~’하고 월드컵스타 미나의 복장을 갖추고 각 당사 앞에 가서 1인 시위를 한번씩 하고 나서 그걸 실감나게 찍어 인터넷에 쫘~악 뿌려라도 볼 건데.

물론 줌마는 미나가 아니라서 역반응은커녕 아무 반응도 없이 끝나버릴 게 뻔하지만 말이다.( 민망해서 얼굴에 땀이 흐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모티콘)


한국 정치는 세계적 특허

혹 다른 나라에도 이런 사례들이 더러 있을까. 마우스 품도 팔고, 손가락 품이랑 수다 품까지 팔며 며칠 동안 돌아다녀봤지만 현재까지 이렇게 성향이 완전히 다른 당끼리 서로 합방한 경우는 찾을 수가 없었다.

남의 나라에도 이런 일이 있다는 걸 확인한다고 해서 있는 불륜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불륜이 천륜이 되는 건 더더욱 아니지만, 적어도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혹시 내가 너무 못나서 우리만 이런 거 아닐까?’(이거 우리 일종의 병이다! 나만 그런가?)하는 자괴감에서 좀 벗어날 수는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요컨대 대통령을 뽑는데 어떤 나라 누가 더 골 때리는 짓 했더라 하는 걸 기준으로 삼을 건 아니니 사실 쓸데 없는 일을 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다만 이런 사태 앞에서 최소한의 균형 감각이라도 가져보자는 갸륵한 뜻이었을 뿐.

‘아니란 건 알지만 현실이 어쩔 수 없잖아.’

우리는 주변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헤쳐, 모여!’에 대해 이런 관전평을 내놓는 사람을 숱하게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현실이란 뭘까. 현 정권의 실책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과 대책을 강구한 정책은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고, 노풍, 정풍, 병풍 같은 바람잡이들이 판을 독식하고 있어 명쾌한 상황판단이 어려운 이 현실을 말하는 걸까. 아니면 흔쾌히 누군가를 콕 찍지 못하고 언제나 내키지 않는 차선을 택할 수밖에 없는 걸 말하는 걸까.

또 있다. 상황 봐가며 이리저리 옮아가는 철새들과 떡 버티고 있는 보수우익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약자끼리 혹은 하나도 비슷한 거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 뭉칠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현실을 말하는 걸까.

흔히 우리가 말하는 현실이란 게 결국 이런저런 바람에 실려 실체와는 무관하게 눈 덩이처럼 부푼 사람의 손 들어주거나 그 밑으로 들어가는 게 상책이고, 그게 싫으면 ‘모이!’ 해서 동병상련의 정으로 꽁꽁 뭉쳐야 살아날 수 있다는 생존법칙 같은 거 아닐까. 나중에 또 어떻게 이합집산이 되든지 그건 그때 일이 되는 거고. 그리하여 우리는 선거 때마다 이 지겨운 상황을 또 만나야 하는 거고.


누구를 찍으란 말인가

사실 우리의 진짜 현실은 이런 게 아닐까.

우리에게는 5%이하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대권에 도전하며 미래지향적으로 자신의 뜻을 피력하는 후보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게 현실이다. 어딜 봐도 한 큐에 끝내보려는 욕심들만 들끓고 있는 게 또 현실이다. 언제나 국민들을 향해 정절을 맹세하지만 종국에는 흔들리는 표심에 대한 짧고 달콤한 러브 콜이었음을 드러내는 후보들을 가진 게 바로 우리 현실이다.

국민들은 또 어떤가. 아무리 도덕성에 흠집이 있어도, 제대로 된 정치철학 하나 없고, 제대로 된 정책 자료집 한번 보지 않고도 표를 던지고 있는 자화상을 그려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후보들에게 있어 대선은 자신들 생애에 있어 절체 절명의 한 사건이고, 어쩌면 다시 오지 못할 기회라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하나의 표’ 이상의 것을 행사할 수 없는 국민의 편에서 보면 정치의 역사는 길다.

우리는 80년대, 90년대 그 이전에도 정치역사 속에 살아왔고, 이제 21세기를 열어가고 있다. 그 긴 정치적 여정 속에 우리 꿈을 실현해보고 싶은 욕망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때가 바로 대선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늘도 정확히 누군가를 지명하기 어려운 찜찜한 상태에 놓여있다.

온 국민 모두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선거에 참여하고, 자신의 표심에 가장 근접하는 사람에게 한 표를 던진다면 긴 여정 어느 지점에선가 우리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우리의 이런 선택이 5% 이하의 지지율로도 줄기차게 자신의 정치철학을 실현해보려는 멋진 후보를 키워낼 수 있다. 너무 꿈같은 이야기라고? 하지만 지금껏 바람에 흔들려보니, IMF 겪고, 온갖 부정부패에 녹아난 거 말고 뭐 별 거 없지 않았나!

“ ~~~ ~~ ~~”

“에잇, 안 되겠다, 합체!!”

아이들 만화영화의 한 장면이다. 분리와 합체가 가능한 로봇이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처음에 우리 편(착한 우리 편!)은 늘 각자 싸운다. 그러다 끝에 목숨이 위태로워질 즈음에 비로소 ‘합체~~!’를 외치며 합체하여 극악무도한 악당을 물리치고 이기는 불패의 신화다. 이 만화영화의 플롯대로 가려면 반드시 처치해야 할 나쁜 놈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합체(물론, 여기서는 모든 선의 합체다)의 당위성에 힘이 실린다.


철학도 원칙도 없는 ‘헤쳐모여’

확실히 정치가 종합예술임에는 틀림이 없나 보다. 우리의 대선정국이 불륜에 이어 이번엔 만화영화의 뻔한 플롯대로 마지막 ‘합체~!’를 시도하고 있는데 한 가지 플롯에 어긋나는 게 있다. 두 진영의 선악이 분명치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양쪽이 모두 ‘합체’를 시도하고 있어 국민들에게 아무런 설득력을 주지 못하고 있다. 시쳇말로 그 합체들에는 아무런 대의명분이 없다는 말이다. 우리 정치가 종합예술 하기엔 내공이 딸리나 보다.

“아이고, 어디서 대통령 하나 수입해오면 좋겠어요.”

라디오에서 나오는 ‘헤쳐, 모여!’ 뉴스를 듣고 내뱉은 택시기사의 말이 귀에 쟁쟁하다.

양은주 정치평론가

입력시간 2002/11/2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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