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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巨匠] 피아니스트 정진우

아름다움으로 기억될 거인의 건반인생

“두 세달 동안 연습만 했어요.”

최근 있었던 가장 즐거운 일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치고는 아귀가 맞지 않다. 11월 1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렸던 ‘거인의 발자국’을 막 끝낸 노장은 대신 딴 말을 한다. “나이 들면 아침 잠이 적어지는 덕분에 새벽 다섯시 정도면 일어나 연습했죠.”

이웃에 방해될까, 그는 전자 피아노의 볼륨을 죽이고 헤드폰을 낀 채 수백 번 연주한 곡들을 또 연습했다. 새벽 한시면 잠 자리에 드는 습관이니 이번 콘서트를 위해 하루 네 시간만 잔 셈이다. 연습에 취한 그를 다시 세상으로 불러내는 것은 아침 7시 라디오 뉴스다. 이어 신문의 문화면과 사회면을 일독하는 것으로 세상과 접속할 준비를 완료한다.


동양의 노익장 피아니스트 표상

정진우(75ㆍ서울대 음대 명예 교수)는 7순의 나이에도 지치지 않고 라이브 연주를 들려주는 현장의 피아니스트이다. 루빈스타인은 8순의 나이에도 콘서트를 개최해 노익장 피아니스트의 표상으로 남아 있지만, 동양의 경우 70줄 나이에 청중과 직접 교감하는 예는 그가 유일한 것으로 음악계는 본다. “가만히 있으면 빨리 늙는다”고 이 동양 최고령 연주자는 왕성한 활동에 대해 나름의 변을 단다.

‘거인의 발자국’은 국내 최초의 음악 전문지인 월간 ‘피아노 음악’의 창간 기념 콘서트이기도 했다. 그가 20년째 대표로 있는 잡지다. 일본의 음악전문지인 ‘음악의 벗’ 편집장이 그와 작곡가 금수현에게 적극 권유해 1982년 4월에 창간된 국내 첫 음악 전문지이다. 현재 음악 잡지 발행 부수로는 최대인 매월 1만부를 기록하고 있다.

또 2001년에는 수익성이 심히 의심되는 가운데 현악 전문지 ‘스트링 & 보우’도 창간, 한국 클래식 음악의 산 증인으로서 의무를 기꺼이 떠맡았다. 그를 두고 거인이라 하는 것은 클래식 음악과 사회 사이의 접촉 면적을 늘리고 사회적 위상을 높였다는 데에만 있지는 않다. 국내의 대표적 피아니스트 대부분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점에서, 그는 거인이란 이름에 값한다.

1960~1993년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는 국내 일급 피아니스트의 7~8할을 키워냈다. 그가 국내 피아노 음악계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것은 후배 양성에 남다른 열정을 쏟았기 때문이다. 신수정, 백혜선, 정명훈, 강충모, 김용배, 이방숙 등 한국 피아노계의 스타들이 얼른 손꼽힌다.

언외별전(言外別傳)인가, 그는 음악 교사들이 흔히들 그렇듯 말로 일일이 지시하는 것보다는 엉뚱하게도 노래를 곧잘 부른다. 그러나 그 흥얼댐은 오선지 상의 악보와 교묘하게 얽혀 들어가면서 말로는 못 다 할 지문(指文)이 되는 것이다.

음악가들이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혹독한 레슨을 받고 크는 지를 그린 로망 롤랑의 소설 ‘장 크리스토프’의 이미지가 음악 선생에 대한 통념이었다면 그는 분명 통념을 뒤집었고 찬란한 성과를 거뒀다.

자신의 노래를 따라 오지 못 하는 학생은 “다음 시간까지 연습해 오겠다”며 스스로 연주를 멈춘다. 물론 다음 올 때는 그 흥얼댐이 상상력의 날개를 타고 건반 위에서 재현되고 만다. 1994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의 여왕 백혜선은 “세부적인 데 연연하지 않는 레슨 스타일 덕분에 학생들은 작품을 노래로 인식, 작곡가의 의도를 건반으로 표출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정년이란 그에게 또 다른 시작의 다른 이름이다. 서울대 음대 측의 부탁으로 명예 교수직을 수락해 1주일에 하루 세 시간 ‘피아노 실기’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기술자가 되지 말아라. 테크닉은 수단에 불과하다. 자매 예술은 물론, 여러 분야의 교양을 쌓아야 한다.” 쉬운 말 같지만, 그의 신산스런 인생 역정 끝에 나온 말이라는 사실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커다란 족적을 남긴 그 자신의 발, 육체적 발은 온전치 못하다. 한국전쟁이 남긴 흔적이다. 당시 최전방 부대인 8사단에 군의관으로 참전해 두만강까지 진격했던 그는 물밀 듯 내려오는 중공군에 쫓겨 군화가 벗겨진 사실도 모르고 행군을 했던 것이다.

우여곡절끝에 밀양 육군 병원까지 온 그는 동상을 입어 시퍼렇게 썩은 두 발의 앞부분을 잘라내야 했다. “부산으로 후송된 뒤에는 몇 번씩이나 죽으려 했죠.” 당시 절망에 빠졌던 그를 구한 것은 그의 사람됨과 음악적 재능을 아끼던 선배들의 극진한 격려였다. 이후 바리톤 오현명과 벌인 시리즈 콘서트는 그가 지상에서 영원의 세계로 쏘아 올린 한줄기 동아줄이다.


의대 졸업뒤 오스트리아로 음악 유학

그에게 음악과 의술은 동의어이다. 평양에서 태어나 서울 경기고와 맞먹던 평양 보통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의사가 되라는 부친의 염원을 저버리지 않았다. 월남한 뒤 서울대 의대에서 1959년까지 공부를 한 그는 이듬해 서울대 음대의 교편을 잡았지만 그 약속을 잊지 않았다.

그 결실이 의대 동창생인 가톨릭의대 정신과 김정훈 교수의 부탁으로 1960년 연구에 착수한 음악요법(musical therapy)이었다. 1973년 가톨릭의대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은 논문 ‘음악이 정신 병자에게 미치는 정서적 반응’은 음악과 의학을 하나로 묶은 국내의 선구적 업적으로 남아 있다. 이 역작을 두고 그는 “부친 소원의 반은 들어준 셈”이라고 말했다.

개성이 강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음악 학도들이 서슴지 않고 그를 사부로 모시는 데에는 인간의 내면과 관계를 중시하는 특유의 휴머니즘 덕이 크다.

서울대 재직 시절 제자들이 만들어 40년째 이어오고 있는 ‘정진우 동문회’는 국내 음악계의 미담으로 남아 있다. 매년 1월 8일 그의 자택에서 벌어지는 작지만 풍성한 잔치다.

그 중 특히 원로 바리톤 오현명과의 친교는 주변의 귀감. 서울대 음대 동문인 두 사람의 돈독한 관계는 부산 피난 시절 당시 ‘제 1회 독창회’에서 그가 반주를 맡아 널리 알려지게 됐다. 같은 38따라지로 술을 무척 즐겼던 오현명의 슈베르트 가곡에 맞춰 몇 시간이고 피아노를 쳤던 시절이었다.

이후 30여 차례에 걸쳐 펼쳐진 두 사람의 ‘연구 발표회’는 한국 가곡사에 빛난다. 볼프나 슈만 등 무게 있는 독일의 후기 낭만파 가곡과 더불어, 국내 시인들의 시를 주요 텍스트로 한 신작 가곡 16곡씩을 연주회마다 선보여 왔다. 4명의 작곡가가 두 사람을 위해 4곡씩을 만들어 헌정한 것이다.

더욱이 11월 3일 펼쳐졌던 올해의 경우는 오현명이 간암 초기에도 불구, 반 백년지기의 반주로 예술 가곡의 정수를 입증해 보인 감동의 무대였다. “투병과 노래를 겸하다니 정말 대단한 친굽니다.”


“독주회는 계속될 것”

아니, 대단한 건 그다. 그는 여전히 다음 독주회 무대를 꿈꾼다. “건강이 유지되는 한 독주회는 계속할 것”이라며 “자기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역시 독주회 뿐”이라고 이유를 말한다. 그는 “이르면 2003년에는 할 수 있을 것”이라며 환히 웃었다.

제법 구체적인 계획도 서 있다. “테크닉을 과시하는 것보다는 인생을 회고하는 레퍼터리가 될 것 같아요. 3B(바흐, 브람스, 베토벤)는 물론 쇼팽까지 해 볼 생각입니다.”

기록은 갱신될 것이다. 까다로운 대위법 등으로 젊어서는 골치 아팠던 바흐의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를 앞에 내세울 계획이다. 또 베토벤의 작품으로는 심오하기로 이름 높은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인 ‘111번’을, 브람스는 소나타 아니면 마지막 소품집 중에서 고를 예정이다.

“슈만의 부인(클라라 슈만)만 보고 늙어 죽은 이 총각의 인생 회고담을 다시 들려주고 싶군요.” 쇼팽과의 인연은 어쩌면 더욱 각별하다. 국내 쇼팽협회장을 10년 동안, 국제 쇼팽협회 이사를 5년 동안,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쇼팽 콩쿠르 심사 위원만 5차례 역임했다.

풍부한 레퍼터리에도 불구, 그는 음반 취입을 매우 낯설어 한다. 그는 “자기를 남기는 데에는 음반이 좋긴 하다”며 전제한 뒤 “여지껏 내가 녹음한 것을 들어보면 화만 치밀었다”고 말했다. “내가 작곡가라면 내 작품을 다 찢어 버렸을 것”이라는 말까지 한다.

인심 좋은 그가 후덕한 인상과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는 것은 과거 방송 출연 당시, 열악한 녹음 시설의 실정을 톡톡히 경험했던 때문이다. 녹음 기술이 현저하게 개선된 지금도 그는 여전히 콘서트 연습을 하는 현장주의자다.

제일선에서 지켜 봐 온 한국의 클래식 상황은 뭔가 단단히 뒤틀려 있다. “지금은 내가 음악을 시작할 때보다 클래식 문화 규모가 질적ㆍ양적으로 10배는 성장했죠.” 그런데 실제 청중은 3배 정도 밖에 늘지 않았다.

그 파행적 구조의 이유에 대해 그는 연주자의 공급 과잉, 초대권 남발 등의 관행을 들었다. 여기에 “비싼 돈을 들여 음악 공부를 마쳐도 시간 강사 자리조차 구하기 힘들다”며 “현행 연주료로는 밥도 못 먹는다”고 덧붙인다. 외국서 제대로 교육 받은 전문 연주자들은 귀국하면 발표회를 거쳐 대학이나 예고에서 강사 생활로 주저 앉기 마련이다.


“음악학원 자율화돼야”

그 고급 인력들에 합당한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전문의 자격증을 딴 의사가 동네에서 개업을 하듯, 음악도 교육 과정을 다 마치면 동네 학원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경우 현재 클래식 음악계에 당연시 돼 있는 고액 레슨의 병폐도 자연 사라질 것이라고 그는 내다봤다.

“아이들이 대학 교수한테 개인 교습을 받으러 가는 곳은 세계서 한국뿐이에요.” 그것은 교육부가 위화감 조성, 기회 균등 등의 이유로 개인의 클래식 학원 설립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이 다 갖춰진 상태에서 자기 스타일, 즉 류(流)를 찾아 가기 위한 길로서 개인 교습을 인식하는 외국의 경우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한국서는 개인 교습이란 사실 교본의 진도 체크 정도죠.” 고급 인력의 엄청난 낭비라는 것이다. 그는 음악 학원의 시장 논리화, 즉 정부 규제를 배제한 완전 자율화를 해법으로 제시했다. “학원들끼리 경쟁시키자는 거죠.” 공급 과잉, 제한된 시장, 정부의 엇나간 통제 등 3박자가 한국 특유의 클래식 상황을 배태했다는 지적이다.

한바탕 질주를 막 끝낸 지금 그는 “식구들과 가까운 데 가서 바람 쐬고 올 것”이라며 다음 길을 재촉했다.

장병욱 차장 aje@hk.co.kr

입력시간 2002/12/08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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