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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LP여행] 김수철(下)

녹슬지 않은 천재성 끊이지 않는 실험정신

대학가의 재주꾼 김수철은 1979년 이광조에게 ‘행복’을, 80년엔 김태화에게 ‘변덕스런 그대’를 81년엔 송골매에게 ‘모두 다 사랑하리’를 작곡해 주며 3년 연속 MBC 국제가요제에서 입선하는 작곡의 재능을 보였다.

특히 송골매의 ‘모두 다 사랑하리’는 10분만에 곡을 만들어준 일화로 유명했다. 하지만 ‘작은 거인’의 멤버들은 부모의 음악활동 반대로 균열이 생기시 시작했다. 김수철은 이 당시 국악과 영화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는 송승환, 진유영 등과 함께 소형 영화 클럽 ‘뉴 버드’를 결정해 16mm 단편영화 ‘탈’로 80년도 프랑스 청소년영화제 본선에 진출하기도 했다.

1981년 4월 타의에 의해 멤버들의 팀 이탈이 시작되면서 드럼 최수일과 2인조 ‘작은 거인’으로 문제의 2집을 발표했다. 구성진 가락에 허무한 분위기를 살린 김수철 국악가요 1호 곡 ‘별리’가 수록된 이 음반은 혁명적인 레코딩을 위해 지다가와 마사토라는 일본인 녹음엔지니어를 불러왔을 만큼 80년대 최고의 헤비메탈 명반으로 꼽힌다. 드럼 최수일도 군 입대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작은 거인’은 역사 속으로 저물어 갔다.

김수철은 작은 거인 2집 수록곡들을 다른 버전으로 시도한 독집음반을 발표하며 솔로로 나섰다. 그러나 군 제대 후 1983년 초, 부친의 강력한 권유로 음악을 잠시 접고 행정대학원에 진학해 노동법을 공부했다.

하지만 작곡해 둔 100여 곡이 아까워 “기념음반을 한 장내고 그만두자”는 생각에 1983년 여름 ‘못다 핀 꽃 한 송이’ 등을 발표했다. 처음엔 별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영화 ‘고래사냥’의 병태 역을 할 배우를 찾던 배창호 감독과 작가 최인호에게 우연히 픽업되어 안성기와 함께 영화출연을 하게 되었다.

영화음악까지 맡은 김수철은 “음악을 안 해야 하는데…”라며 망설였지만 오히려 본격적인 솔로 가수 활동을 하게 되었다. 또한 바보 같은 병태 역할이 영화의 재미를 더해주며 대히트를 하자 뒤늦게 모든 매스컴에서 김수철을 대서특필하는 신드롬이 일어났다. 이미 발매한 기념음반도 뒤늦게 동반 대히트했다.

그해 1984년 내ㆍ외신기자상, MBC 10대 가수상등 가요관련 상을 휩쓸던 그는 KBS 가수왕까지 거머쥐며 정상에 우뚝 서버렸다.

하지만 그 해 12월 가수활동을 끝까지 반대했던 부친의 유고는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안겼다. 이후 그는 더욱 분발하여 각설이 타령을 록으로 실험하는 한편 영화음악에 뛰어들었다. 1984년 2집 수록곡 ‘젊은 그대’가 히트하며 김수철은 인기가수로 자리를 잡았다.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꿈꾸던 그는 하루 평균 6~7개의 방송을 강행하면서도 잠을 자지 않고 국악공부에 몰두했다.

1987년 처음으로 국악과 양악을 접목하는 그의 국악 3부작의 시발인 ‘김수철’을 발표했다. 소량을 발매해 방송 PR용으로 돌린 국악음반이었지만 일주일 후 “판이 팔리지 않으니 폐품 처리하겠다”는 음반사의 연락이 왔다. 피리, 아쟁, 대금 등 국악기를 팝의 선율로 시도한 자신의 음악 공력이 부족해서 그러려니 했다.

이후 드라마 ‘노다지’에서 배경음악으로 나온 아쟁을 사용한 솔로 곡이 ‘뉴에이지 음악 탄생’으로 평가를 받자 86아시안게임 주제곡과 88서울올림픽 전야제음악을 맡게 되었다. 이때 잠시 김수철 그룹을 만들어 활동했지만 돈보다는 음악적 갈망에 불탔던 그는 어느덧 산더미 같은 빚에 눌리기 시작했다. 주위의 사람들은 “왜 이상한 걸 해서 빚을 지냐”고 걱정을 했다.

1989년 김수철은 대중적인 노래를 할 것인가 내 음악 길을 갈 것인지에 대해 갈등했다. 그 와중에 발표한 음반이 작사 작곡 편곡 노래 연주를 혼자서 해낸 ‘원 맨 밴드’. 타이틀곡 ‘정신차려’는 왔다 갔다 코믹한 율동으로 노래하는 모습이 재미있다는 반응을 얻으며 빅히트를 했다. 그는 “걷는 만큼 빚을 다 갚았지만 빚을 갚고 나서 걷는 안무를 그만 두었다”고 회고했다.

다시 자기음악으로 돌아간 김수철은 퓨전 국악의 장을 연 ‘황천길’과 국악 3부작의 완결 편 ‘불림소리’를 1992년에 발표하고 또다시 빚더미에 앉았다. 하지만 이 음반들은 1993년 당시 방화사상 최다 관객으로 빛나는 영화 ‘서편제’의 주제음악을 맡는 계기가 되었다.

‘서편제’음반은 데뷔 이후 최고인 70만장이 팔려 나갔다. 하지만 “13년만에 국악으로 성공을 거두었다”는 음악적 만족감에 그는 더욱 전율을 느꼈다. 하지만 이후 ‘태백산맥’ 등 일련의 국악 음반은 음악적 완성도에 비해 모두 상업적 실패로 얼룩졌다. 최근 김수철은 이혼의 아픔까지 겪었다.

하지만 2,300여명의 군무가 펼쳐진 한ㆍ일 월드컵 개막식 둘째 마당 곡을 작곡해 김수철 음악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19년만인 금년 여름, 예전 곡들을 록으로 재해석한 음반을 발표했다. 그는 “국악과 양악을 버무린 아티스트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의욕을 밝혔다. 부와 명예에 편안하게 안주하길 거부하고 혼을 바쳐 파고든 김수철의 국악 작업은 한국대중음악의 소중한 자산이다.

그는 올해 10월 뉴욕에서 열린 57주년 UN의 날 기념무대에 한국 대중음악가로는 처음으로 국악관현악단과 함께 올랐다. 우리가락의 뛰어난 예술성을 일렉트릭 기타산조로 세계에 뽐낸 그는 국가대표 급 아티스트로 전력질주중이다.

입력시간 2002/12/24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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