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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시대] 원칙, 신뢰, 그리고 노무현

[노무현 시대] 원칙, 신뢰, 그리고 노무현

오기와 뚝심의 정치 펼친 '지역주의의 반항아'

13대 총선과 15대 보선 당선, 14ㆍ15ㆍ16대 총선과 제1회 지방선거 부산시장 낙선, 그리고 16대 대통령선거 당선.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그간 7차례의 선거 결과에서 보듯이 넘어지면 일어서고 다시 넘어지면 또 일어서는 ‘오뚝이’ 정치역정을 걸어왔다. 13대 총선에서 통일민주당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이번 대통령선거 이전까지 각종 선거에서 2승4패의 저조한 당선률을 보여 왔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고향인 부산에서만 4차례 연속 낙선의 설움 속에서도 그는 끝까지 소신과 정치적 정절을 지키며 대권이란 큰 꿈을 이뤄냈다.

민자당의 3당 합당을 거부하며 꼬마 민주당의 외로운 야당시절이 있었고, 국민회의와의 합당도 반대하며 국민통합추진위원회를 이끌기도 했다. ‘바보 노무현’이란 별칭이 붙을 정도로 그는 지역주의의 대세를 홀홀 단신으로 맞서며 원칙과 상식에 입각한 정도(正道)를 걸었다.

민주당 후보 선출 이후에도 사퇴 압력과 후보 단일화 결선 등의 위기에서 그는 꿋꿋이 정면돌파를 하면서 풍랑을 헤쳐왔고, 북한 핵문제와 행정수도 이전 공방의 파고를 넘어서며 7전8기식의 정치적 성공을 이뤄냈다.

대선 후보로 선출되기 이전에는 그는 PK지역 몫으로 당선된 원외 최고위원 중 한명에 불과했다. 2002년 2월 시작된 민주당 첫 경선지인 제주에서 한화갑-이인제 의원에 이어 3위에 올랐을 때만 해도 여론은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이인제 의원의 대세론과 호남 지지를 한 몸에 받는 한화갑 의원의 경쟁에서 캐스팅보트 역할 정도에 그치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고향인 부산지역에서 1위에 오른데 이어 광주에서도 예상을 깬 1위를 차지하는 순간 ‘노무현 대통령 시대’의 화려한 서막은 올라가고 있었다.


어려운 가정환경 속에 자존심 강한 청년기

1946년 8월6일(음력)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에서 노판석(작고)-이순례(작고)씨의 3남2녀중 막내로 태어난 노 당선자는 전형적인 빈농의 자식으로 유년기를 보냈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천자문을 외울 정도로 머리가 좋았지만 가난에 대한 열등감이 컸고 그만큼 자존심도 강했다.

중학교 1학년 때인 1960년 3ㆍ15 부정선거 직전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란 제목의 작문 숙제를 내주자 그는 선거운동의 일환이라며 백지 동맹을 선동했다. 결국 대통령을 쓰기 싫어서 ‘우리 이승만 택통령’이란 제목만 써냈다.

가세가 더욱 기울자 인문계를 포기하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부산상고에 진학, 열등감에 사로잡힌 우울한 사춘기를 보내야 했다. 졸업 후 농협 입사에 실패하고 어망을 만드는 한 중소기업에 취직했으나 월급이 너무 적어 한달 반만에 그만 두고 울산지역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부산대 법대 출신인 큰 형 영현씨(작고)의 영향으로 고향에 내려와 토담집을 짓고 고시공부에 들어갔다.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에만 합격한 상태에서 입대 영장이 나와 1968년부터 3년간 강원 인제 12사단에서 소총수로 복무했다. 제대후 고시공부를 재개하다 같은 마을에 살던 권양숙여사와 결혼했으며 1년 뒤 꿈에 그리던 사법시험에 합격,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돈 잘버는 변호사에서 인권변호사로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지만 8개월 만에 법복을 벗고 이듬해 부산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처음에는 조세소송을 많이 맡아 ‘잘 나가는 변호사’로 주가를 올렸지만 81년 부산지역 재야 운동권 20여명이 사회과학서적을 읽고 토론하다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된 시국사건인 이른바 ‘부림사건’의 변호를 맡으며 삶의 전환기를 맞는다.

“부림사건 변론이 내 삶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됐다”고 말할 정도로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기 시작했다.

인권변호사로 방향을 틀어버린 그는 내친 김에 공해문제연구소를 열고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결성하는 등 본격적인 사회운동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또 노동ㆍ법률상담소를 차리며 당국의 요주의 인물로 떠오르기도 했다.

87년 6월 항쟁에는 부산의 야전사령관격으로 각종 시위에 앞장서다 구속영장만 세 차례 청구됐다 기각되는 위기의 순간을 맞기도 했다. 그 해 9월 옥포의 대우조선 이석규씨 사망 때 노동쟁의조정법 위반 등의 혐의로 첫 구속됐으나 21일만에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났다. ‘노무현’이란 이름이 언론을 통해 전국에 처음으로 알려지게 된 때가 바로 이 무렵이다.


5공 청문회 스타로 발돋움한 초선의원

노 당선자는 1988년 4월 13대 총선에서 김광일 변호사를 통해 김영삼 총재의 통일민주당에 합류한다. 부산 동구에서 허삼수 후보를 제치고 정계에 들어와 그 해 11월 5공 청문회에서 일약 전국구 스타로 떠올랐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회장과 장세동 전 안기부장을 당당하면서 매섭게 몰아붙여 국민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당시 노 당선자는 고 정 회장에게 “답변자인 증인의 사회적 영향력에 비해 질문자인 본 의원의 영향력은 100분의 1도 안 된다. 이런 엄청난 비애를 느끼면서 질문에 들어가겠다”고 밝히며 시작한 송곳 질의는 국민들 뇌리에 오래도록 남게 됐다.

89년 3월 제도권 정치에 한계를 느낀 그는 의원 사직서를 제출하는 해프닝을 벌였고, 90년 7월 민자당의 날치기 처리에 반발하며 또 한번 사직서를 내기도 했다. 90년 민자당 합당이 이뤄졌을 때 그는 YS를 “역사의식이 없는 변절자”로 비난하며 따라가지 않았다.

노 당선자는 “그 때 따라갔으면 국회의원이야 3,4회 더 했을 것이고 장관도 일찍 하고, 도지사나 시장도 했을 지 모르지만 잘못된 정치풍토에 타협하지 않는 것이 더 큰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고 술회했다.

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당으로 나섰지만 지역바람에 밀려 정치인생의 첫 좌초를 겪으며 이때부터 정치적 유랑기를 거듭한다.


DJ 도와 정권교체 선봉에 서다

93년 변호사로 돌아온 그는 개인연구소인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설립해 다가올 지방선거를 준비했지만 지역의 벽을 넘지 못해 95년 부산시장에서 또다시 좌절해야 했다. 이때 DJ는 당시의 민주당을 깨고 대선출마를 위한 국민회의를 창당해 정치 일선에 복귀한다.

노 당선자는 “신당창당은 보스 중심의 줄서기를 답습하는 전근대적 정치행태”라며 DJ를 비판한 뒤 DJ의 손을 뿌리쳤다.

96년 15대 총선에서 민주당에 남아 서울 종로에서 출마했지만 또 한번 고배를 마시며 “노무현 시대는 갔다”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 치러진 15대 대선은 노 당선자가 정치적 재기의 발판을 마련한 해이다.

조 순 총재의 민주당이 한나라당과 합당하자 국민통합추진위원회를 이끌고 국민회의에 입성해 DJ 당선을 도왔다. 그 공로로 98년 서울 종로 보궐선거에 나서 두번째 ‘배지’를 달게 된다. 그는 2000년 16대 총선에서는 다시 부산에서 출마해 또다시 쓴 맛을 보고 말았지만 곧바로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 정치적 운(運)을 이어갈 수 있었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원외 최고위원으로 조용히 남아있다가 3등으로 예상되던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서면서 노무현의 주가는 다시 상한가를 치닫게 돼 대권이란 마지막 정치적 목표까지 이루게 된다.


‘코리아 드림’이뤄낸 오뚝이의 승리

숱한 고비와 위기를 이겨낸 그의 당선은 정치 사회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혁명적 상황에 비견될 정도로 냉전시대 이후 뿌리박힌 온갖 관습의 틀을 완벽하게 뛰어넘는 새 역사를 일궈냈다.

먼저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가 발족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그를 도왔다. 돼지저금통을 이용한 국민성금 모금방법도 이전의 정치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방식이었다. 사상 처음 치러진 미디어 선거에서도 평범한 시민들을 등단시켜 서민들의 감성을 자극했다.

또 소속 정당에서 조차 냉대를 받으며 소수의 현역 의원으로 꾸려진 초라한 캠프만으로 선거를 치렀고, 미국과 북한의 외풍에도 흔들림 없이 한편의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했다. 모두 구 정치, 구 세대, 구 체제의 관습과 산물을 노 당선자 개인이 극복해 낸 결과였다.

“남대문시장에, 자갈치시장에, 동성로에, 금남로에 찾아가 거기서 마주친 서민들과 소주 한잔을 기울일 수 있는 따뜻한 대통령이 되겠다”는 노 당선자. 그는 부산 출신으로 호남지지를 받은 대통령, 재야 인권변호사 출신으로 정치적 지지기반이 일천한 대통령, 재벌개혁을 앞세워 대기업들의 실탄지원을 거부하며 탄생한 전무후무한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노 당선자 부부의 1남1녀 중 아들 건호씨는 지난 8월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LG전자에서 일하고 있으며 홍익대 역사교육학과를 졸업한 딸 정연(27)씨는 주한 영국대사관에 근무중이다. 건호씨는 12월25일 대학 후배인 배정민씨(25)와 결혼한다. 신부의 부친은 부산 강서구 농협조합장을 맡고 있다.

노 당선자의 맏형 영환씨는 1973년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둘째 형 건평(61)씨는 고향에서 과수원을 하고 있다. 두 누나 명자(74) 영옥(64)씨는 남편과 사별한 뒤 부산에서 살고 있다. 권 여사의 모친은 남편과 사별한 맏딸 창좌(57)씨와 부산에서 살고 있으며 여동생 진애(52)씨는 주부이고 남동생 기문(48)씨는 부산은행 지점장이다.

염영남 기자 liberty@hk.co.kr

입력시간 2002/12/27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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