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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마리 토끼 잡은 앨 고어

두 마리 토끼 잡은 앨 고어

대선 불출마 선언으로 "품위있는 정치인" 찬사

지난주 미국은 떠날 때를 알고 무대에서 내려온 한 정치인의 용감한 퇴장에 큰 박수 갈채를 보냈다.

2000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인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보다 많은 표를 얻었지만 패배의 고배를 마셨던 앨 고어 전 미 부통령은 12월 15일 2004년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미국은 그를 ‘품위있는 정치인’으로 한창 추켜세우고 있다.

고어는 CBS의 시사 프로그램 ‘60분’에 출연, “지금은 때가 아니며 현 정권을 끝내기 위해서는 내가 출마하지 않고 다른 후보를 도와주는 것이 최선”이라며 “다시 한번 선거전에 뛰어들고 싶은 에너지와 야심은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특히 그는 “부시 대통령과 내가 차기에서 다시 맞붙는다면 불가피하게 선거전의 본령에서 벗어날 우려가 있다”고 밝혀 국민과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2000년 대선 당시 플로리다주 개표를 둘러싼 부시와의 이전투구가 악령처럼 되살아 나 2004년 대선을 물들인다면 미래지향적 이슈들이 사라져버릴 우려가 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의 결심은 매우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11월 중간선거 당시 그는 팔을 걷어 붙이고 민주당 지원 연설에 나섰고, 부시의 이라크 전쟁 기도에 맹공을 가하는 등 활발한 정치활동을 펴왔기 때문이다. 고어의 최근 심경을 잘 알고 있는 최측근 인사들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재출마 포기가 선언되리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낮은 승리확률 인기도 예전만 못해

그렇다면 고어가 불출마를 선언한 현실적 배경은 무엇일까. 첫 번째 이유로는 2004년 대선에 출마한다 하더라도 승리를 따낼 확률이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이 꼽히고 있다. 11월 공화당이 압승을 거둔 중간선거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부시 대통령은 현재 거론되고 있는 민주당의 어떤 예상 후보와 대결하더라도 20%이상의 큰 격차로 승리를 따낼 것으로 예측됐다.

2003년 1월 또는 2월로 예상되는 이라크 전쟁이 발발할 경우 부시의 인기는 더욱 치솟을 것이라는 점이 감안된다면 당분간 부시와 대적할 후보는 없다는 것이 워싱턴 정가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둘째 이유는 고어 개인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이다. 고어는 최근 ‘마음의 결속’(Jointed at the Heart) ‘변화하는 미국의 가정’(About the Changing Family in America )이라는 두 권의 책을 아내 티퍼와 함께 낸 뒤 한 달 여 간의 전국 순회 판촉 겸 정치자금 모금행사를 진행했으나 그 성과가 기대에 크게 못 미쳤던 것으로 전해졌다.

중간선거 직후 조사된 여론조사에서는 민주당 지도부가 향후 대선 후보로 고어를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었다.

이런 여론은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진 듯 하다. 유권자의 40% 가량이 고어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여론조사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는 세련되면서 귀족적인 그의 이미지에서 연유한다.

대학에서 C학점 밖에 받은 기억이 없다고 떠들어대며 유권자에게 편안하고 친근한 이미지를 심어주는 부시와 달리 그는 대중들이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인물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마지막 이유로는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그의 성격이다. 그의 측근들은 “그가 지긋지긋한 선거전을 다시 참아내야 하는가”라고 토로해왔다고 전했다. 가정에 충실한 모범적인 가장으로 소문난 그는 최근 고향인 테네시주 내슈빌의 새집으로 이사하면서 사생활을 정치로 인해 다시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점을 자주 언급해왔다.

최근 그가 ‘메트로폴리탄 웨스트 파이낸셜’이라는 금융지주회사의 부회장으로,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의 객원교수로서 만족스러운 생활을 꾸리고 있다는 점도 또 다른 방증으로 거론된다.

그의 선언이 미국민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가면서 미국 정치에 대한 희망을 품도록 만들었다. 친 민주당 계열의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개인적으로 고통스러웠을 그의 불출마 결정은 내부 갈등을 겪고 있는 민주당 뿐만 아니라 전 국민의 찬사를 받을 만하다”고 평가했다.

친 공화당 성향의 월스트리트저널도 “인기 급상중인 부시 대통령을 차기 대선에서 상대하기 버겁다는 예상 등을 인식하고 내린 결정이지만 2000년 대선에서 부시보다 득표율이 앞섰던 그가 차기 대선을 포기한 것은 현명하고 품위 있는 결단이었다”고 칭송했다.


미국민들에게 신선한 충격

이런 평가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국민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자신의 처지와 국민의 반응, 이를 둘러싼 상황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한 한 정치인이 이를 선뜻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 감동스러운 일이다.

고어의 출마 포기를 전해들은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중간선거 직후 부시는 “고어와의 재대결을 환영한다”며 재 승부에 강한 자신감을 밝혔었다.

하지만 고어의 선언으로 부시는 돌발 변수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할 처지가 됐다. 아버지 부시가 아칸소주의 신출내기 주지사 빌 클린턴의 돌풍에 낙마한 악몽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당사자인 민주당으로서도 적지 않은 고민에 휩싸이게 됐다. 전국적 지명도를 갖춘 고어를 제외한 민주당 예상 후보들이 고만고만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존 케리 상원의원, 조셉 리버맨 상원의원, 하워드 딘 버몬트 주지사, 톰 대슐 상원의원 등 민주당 후보들이 부시를 상대하기에는 아직 버겁다. 따라서 민주당은 돌풍을 일으킬 새 인물을 육성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떠맡게 됐다.


2008년에 나선다면 승산

고어의 불출마는 그가 미국 정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은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무대로 복귀할 수 있는 막간 퇴장일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는 불출마 의사를 밝히면서 “내가 출마하지 않고 다른 후보를 도와주는 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그가 지닌 영향력을 다른 민주당 후보에 실어주어 킹 메이커의 역할을 맡겠다는 것이다. 그가 부통령 재직시부터 갈아온 표밭과 돈줄을 누구에게 물려주느냐가 민주당 후보를 결정지을 것이라는 게 워싱턴의 분석이다.

일부 관측통들은 2004년 민주당 후보가 대선에서 낙마할 경우 현재 50대인 그가 2008년 대선 후보로 고어가 나설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아직 동정여론이 아직 많은데다 이번 불출마 선언으로 정치인으로서 그의 새로운 면모가 드러난 만큼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다.

그럴 경우 죽을 각오를 한다면 살 것이고, 살겠다고 하면 죽을 것이라는 생즉사(生卽死), 사즉생의 금언이 실감되나 될 것이다.

이영섭 기자 younglee@hk.co.kr

입력시간 2002/12/27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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