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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 도박 '레드라인' 넘을까?

체제 건 벼랑 끝 '핵 시위'로 긴장 고조, 갑갑해진 盧 정부

북한이 ‘핵 시위’를 계속하고 있다. 12월 12일 핵 동결 해제를 선언한 후 21일 영변의 5 ㎿원자로 봉인 제거, 22일 폐연료봉 저장시설 봉인 제거, 23일 방사화학실험실 봉인 제거, 24일 핵 연료봉 제조공장 봉인 해제, 25일 핵 연료봉 이동 개시, 27일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추방 결정 등 연일 위협의 수위를 높이고 있다. 내일은 또 무슨 행동으로 한반도와 세계를 놀라게 할 지 그 어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번 사태는 한반도를 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1993~94년 핵 위기보다 여러 측면에서 더 위험하다. 이번 위기는 우선 북미 양국이 1년7개월 간 IAEA를 사이에 놓고 줄다리기를 되풀이한 끝에 극적으로 타협을 도출했던 과거와 달리 북한의 연속적인 ‘선제공격’으로 단번에 국제 문제로 비화했다. 그만큼 실제 위기가 빨리 닥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번 위기는 미국이 냉전 종식 직후 포용과 봉쇄 사이에서 고민하던 상태가 아니라 확고한 의지로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유일 패권국’ 미국은 ‘원상회복 없는 협상은 없다’는 원칙을 확고히 유지하고 있다.

이라크 핵 사찰 결의가 채택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유엔의 동의를 발판으로 군사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과거 끝까지 중립을 유지하며 미국의 군사주의에 제동을 걸었던 중국도 이번에는 북한의 모험을 내놓고 편을 들 입장이 아니다. 북한의 거침없는 핵 모험주의 행보, 패권국 미국의 단호한 배격은 한반도를 조금씩 ‘2003 핵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북한의 목표는 미국과의 담판

물론 북한의 잇단 핵 위협은 대미 협상력을 높이기 위한 선전전 성격이 강해 보인다. 북한은 단계적으로 핵 동결 해제 조치를 취하면서도 “핵 시설 재동결은 미국에 달려있다”(22일 조선중앙통신), “핵무기 개발과는 관련이 없다”(26일 평양방송)며 협상 가능성을 꾸준히 흘리고 있다.

미국과의 ‘작용→반작용’ 과정을 밟으면서 궁극적으로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 세워 김정일 체제를 보장 받겠다는 속내인 것이다.

이는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이 불투명해지자 1993년 3월 핵비확산조약(NPT) 탈퇴를 선언, 일순간에 국제사회의 파문을 일으키고 미국으로부터 체제인정, 경수로 제공 등을 단번에 얻어낸 것과 비슷하다. 극한의 위기고조와 대립상황을 연출한 끝에 협상력을 발휘해 성과를 내는 벼랑 끝 전술의 답습이다.

북한은 특히 미국이 11월 중유제공 중단, 12월 미사일 수출선박나포 등으로 대북 압박을 높여나가면서도 대 이라크 전쟁에 골몰하며 틈을 보이자 체제를 걸고 공세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들어 북한 매체들이 “사생결단으로 맞설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 여중생 사망사건으로 인한 반미감정, 노무현 당선자 탄생 등 다분히 우호적인 남한의 기류를 활용, 한미관계까지 흔들어놓겠다는 계산도 있는 듯하다.

때문에 북한은 당분간 대미 압박을 위해서라도 핵 위협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93, 94년처럼 NPT 및 IAEA 탈퇴 선언을 잇따라 내놓고, 여차하면 금지선(red line)으로 간주돼온 폐연료봉을 재처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은 이미 27일 핵재처리 시설인 방사화학실험실 가동 준비작업 착수를 선언했다.


진로든 퇴로든 이기는 게임?

우려되는 것은 미국이 끝내 북한식 협상에 임하지 않을 경우 북한이 ‘당당하게’ 핵 무장으로 나아갈 개연성이다. 북한은 남한과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의 반대로 유엔이 이라크처럼 공격예고를 담은 결의안을 채택하지는 못할 것이고, 미국도 한반도에 제2의 전쟁을 몰고 올 군사적 선택은 내리지 못할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 하에 핵 카드를 내밀었을 수 있다.

사실 북한은 핵 보유를 선언하는 순간 단번에 국제정치적, 군사적 위상을 몇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다. 북한의 핵 무장이 일본 및 남한의 핵 개발로 이어질 수 있지만, 북한은 스스로 주장하듯 자위 수단을 갖춤으로써 미국도 감히 군사적 위협을 가할 수 없는 ‘강성대국’을 꿈꿔왔다. 더욱이 북한은 오키나와 미군기지를 타격할 정도의 장거리 핵무기 운반 수단도 보유하고 있다.

물론 북한은 핵무기에 관한 한 긍정도, 부정도 않는 ‘NCND’의 입장을 고수해 오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이미 90년대 초 영변의 5㎿원자로에서 7~22kg의 플루토늄, 즉 ‘과거의 핵’을 추출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핵무기 2~3개를 제조할 수 있는 양이다.

북한은 ‘현재의 핵’인 폐연료봉 8,010개를 재처리하면 3, 4개월 내에 핵무기를 제조, 1년 안에 4~6개를 보유할 수 있다.

북한이 이라크의 무기력한 모습을 보면서 ‘핵이 없으면 안보도 없다’는 생존적 결정을 내렸다는 분석도 있다. 이것이 제임스 켈리 10월초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에게 공세적으로 핵 개발을 시인하게 된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렇다면 북한은 북미협상이 잘못되더라도 핵무기 보유의 기정사실화라는 목표를 달성, 국제적 지위에 중대한 변화를 줄 수 있고, 반대로 협상이 잘 되면 핵 개발 중단의 대가로 안전확보 등의 이익을 얻는다는 계산을 했을 수 있다. 북한은 이미 단단히 각오를 다지는 듯하다.

북한 언론들은 최근 ‘제2의 고난의 행군’을 거론하며 변화하는 정세에 따른 ‘혁명적 무장력’을 촉구하는 등 체제결속에 분주하다.


꿈쩍도 하지 않는 부시 행정부

그러나 미국의 태도를 보면 핵 위기가 북한의 뜻대로는 굴러가지 않을 것 같다. 현재까지 북한의 조치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한마디로 철저한 외면이다. 대화를 위해 위협의 수위를 높이겠다는 것이라면 잘못된 계산일 뿐 아니라 국제사회의 제재를 자초하는 악수(惡手)가 될 뿐이라는 식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북한이 연일 강수를 두고 있는데도 “북한이 먼저 신속하고 검증가능한 방법으로 핵 개발을 포기하지 않는 한 협상은 없다”는 일관된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미 백악관은 북한이 27일 IAEA 사찰관 추방 결정으로 핵안전조치협정을 위반했는데도 “우리는 위협이나 약속 파기에 응해 협상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둔다”고 강조했다. ‘해 볼 테면 해 봐라. 결단코 못된 짓을 놓고 협상하진 않겠다’는 것이다.

미국의 이 같은 태도는 이라크 전쟁을 벌일 시간을 벌고, 북한이 페연료봉을 재처리 해 폭탄 제조용 플루토늄을 양산하기까지 1년 가량 걸릴 수 있다는 현실적 판단이 크게 작용한 듯하다.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이 23일 대 이라크전과 대 북한 공격의 동시 수행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지만, 미국은 어디까지나 ‘악의 축’ 국가들을 한번에 하나씩 상대하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때문에 미국은 당분간 북한의 일방적 구애(求愛)에 응하기 보다는 주변국과 국제기구를 통해 외교적 압박의 고삐를 더욱 죌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이 선호하는 해결책은 아니지만 북한 핵 문제의 유엔 안보리 상정도 임박한 분위기이다.

미국은 또 내년 1월부터 공격 명분을 쌓을 수 있는 경수로사업중단, 경제제재 등을 단계적으로 내놓으며 북한을 코너로 몰 것으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볼모는 노무현 정부

북한과 미국이 각각 자신의 ‘시간표’대로 압박 수위를 높이며 으르렁댈수록 그 부담은 남한, 특히 노무현 신정부에 떨어진다. 그러나 북미 갈등의 틈 바구니에서 노 당선자의 운신 폭은 그리 넓지 않아 보인다.

노 당선자는 어쩔 수 없이 ‘핵 문제는 북미간의 사안’이라는 북한의 경직된 태도는 물론이고 DJ 정부까지 무시하면서 대북 강경책으로 일관해온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적 태도와도 부딪쳐야 한다. 노 당선자는 대화로 해결할 수 있다고 강한 자신감을 보였지만,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자칫 모두 놓칠 수도 있는 위급한 처지이다.

특히 안정적이지 못한 한미관계가 노 당선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한미 양국은 북한 핵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남한은 미국이 대북 압박을 낮춰 북한에 핵 포기의 명분을 주길 기대하고 있지만, 미국은 어림도 없다는 태도이다.

미국은 오히려 ‘악의 축’과 자꾸 대화하고 협상하려는 남한을 의심하고 있는 눈치이다. 뉴욕타임스는 주한미군 철수론 마저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노 당선자는 북한 핵 문제 해결의 실질적 카드를 쥐고 있는 미국을 대화로 이끌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

다행히 노 당선자는 핵 문제 해결을 위한 1차적 방향을 남북관계를 통한 대북 설득이 아니라, 한미관계 정상화 쪽으로 잡은 듯하다. 노 당선자는 28일 “이제 촛불시위를 자제해 줄 것을 간곡히 호소한다. 미국에 굴복을 요구해선 안 된다. 선(先) 북한 핵, 후(後)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의 수순으로 해결하겠다”고 공개 천명했다.

노 당선자의 언급은 주요 지지층인 젊은이들의 희망사항과는 거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북한 핵 문제 해결과 한미관계 복원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사실 남한의 대미 입지가 약화한 것은 DJ 정부의 책임이 크다는 지적도 상당하다. 현 정부는 미국의 한미관계를 희생해가면서 남북관계를 진전시킨 측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DJ 정부가 최소한 핵 위기의 단초는 해결하고 정권을 넘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북한 핵 문제가 북한의 우라늄 핵 개발 시인과 미국의 대북 중유제공 중단으로 발생한 만큼, 남한이 일시적으로 중유를 제공하고 북한으로부터 핵 개발 포기 약속을 받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물론 이 방안은 국내적으로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이고,미국과 북한이 수용할지도 불투명하다.

그러나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북미관계를 최소한 핵 파문 이전으로 되돌릴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이동준 기자 djlee@hk.co.kr

입력시간 2003/01/07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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