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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 族' 작은 불씨로 사회변혁을 이끄는 21세기 유목민

웹디자이너 A씨. 32세. 프리랜서. 그는 2002년 4월 동료들과 미국에 가 6개월간 모 대기업의 영어 홈페이지 작업을 하고 돌아왔다. 처음 가본 미국의 땅덩어리와 문화에 놀랐지만 직업인 웹디자이너로서는 나름대로 자신을 갖게 되었다. 이후 그는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인터넷과 메신저, 휴대폰을 통해 일감을 구한다.

그는 하루 24시간중 15~16시간을 모니터에서 작업하지만 그것에만 매달리지 않는다. 여러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구하고 필요한 정보가 있으면 그 쪽으로 옮겨놓기도 하고, 인터넷 정모(오프라인 정기모임)을 통해 만난 사람들과 메시징 기능을 통해 정보를 주고받기도 한다. 한일월드컵 때는 아내와 아이의 손을 잡고 시청 앞으로, 여중생 촛불시위에서는 촛불을 들었다.

광고카피라이터 B씨. 27세. 늘 새롭고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문안과 그림을 고민해야 하는 그는 인터넷 바다를 서핑하며 아이디어를 얻는다. 네티즌들의 ‘하핳핳’ 취향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컨셉을 가다듬는다. 틈만 나면 젊은이들이 모이는 사이트에 들어가 의견을 주고받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촛불시위 참여 제안을 다른 사이트에다 옮겨둔 일, 자신이 퍼온 글을 또 다른 사람이 퍼가서 광화문에 수천명이 촛불을 들고 모였다는 소식에 가슴이 뿌듯했다.


고압적 사회질서에 반기를 들다

두 사람은 이번 대선에서 아래로부터 혁명을 일으킨 또래의 20~30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노사모 회원들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어딘지 모르게 억압적이고, 고압적인 사회질서를 깨뜨리고 싶은 욕망에 차 있다.

N세대답게 사이버상에서 일정 규모의 응원군을 모집하면 그 힘을 현실타파에 쏟아내는 것이다. 컴퓨터 게임이나 모니터에 완전히 빠져 자신만의 안락과 편안함, 사고와 행동 속에 침몰했던 ‘코쿤’(Cocoon) 족’과는 다른 행태다. 모니터외에 휴대폰을 이용한다는 것도 큰 특징이다.

미디어 학자들은 이런 사람들을 현대판 ‘노마드’(nomard)라 부른다. 네티즌 혹은 네트워크를 상징하는 n세대와도 첫 글자는 같다. 20세기 미디어 이론가인 마셜 맥루한이 30년전에 “미래 사람들은 매우 빠르게 움직이면서 전자제품을 이용하는 유목민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이 유목민은 유럽 철학자들에 의해 프랑스어 학술용어 ‘노마드”로 정리됐다.

노마드족은 첨단 정보통신 기술을 이용해 자신의 생활터전에 필요한 뉴스를 찾고, 또 제공하기도 하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언제 어디서나 접속이 가능한 인터넷과 헤드셋, 휴대폰으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다.

노마드족의 등장과 그들이 개척해 가는 경제영역, 직업세계는 앞으로 우리 사회를 크게 바꿀 것이다. 그 일단이 이번 대선에서 나타났고, 흐름은 2003년에도 계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사람인가? 기존의 N세대를 앞장 서 이끌면서 뜻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노마드 세대 2명을 통해 도전하는 정신과 힘의 근원을 살펴보자.


낯선 사람들과의 훈훈한 동지애

의정부 여중생 사망사건에 항의해 연일 광화문 일대를 붉은 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촛불 시위를 독려하는 인터넷 사이트 ‘네티즌이 모이는 성지’ (www.cyberaction.co.kr)의 운영자 정의봉(31)씨. 그의 사이트에는 이런 글이 올라 있다.

“네티즌 여러분의 촛불 모임은 자발적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촛불을 들고 서 있으면 순식간에 여러 명이 모여 100명이 되고 1,000명이 됩니다.”

그는 사이트를 통해 촛불시위의 불씨를 더욱 확산시키면서 행동으로 실천한다. 지난해 12월 31일 ‘100만 촛불 대행진’에 참여한 그를 서울 광화문 앞에서 만났다.

“어젯밤에도 ‘반전(NO WAR) 구호를 쓴 피켓을 만드느라 뜬 눈으로 지샜다”는 그는 수척한 모습임에도 집안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는 것보다 추운 겨울 바람이 몰아치는 시위 현장에 시민들과 더불어 서 있는 것이 좋다고 했다. 온라인 속에서 만난 낯선 이들임에도 같은 생각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 훈훈한 동지애를 느낀다. 미군 궤도 차량과 핵 폭탄 등을 상징적으로 그려놓은 피켓의 문양도 인터넷 메신저를 통해 네티즌들과 서로 의견을 주고 받으며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정씨는 “무조건적인 ‘반미 시위’가 아니라, 국가간 불평등한 관계 개선을 요구하는 평화 집회”라고 촛불 시위의 성격을 설명했다.

벤처 창업을 준비하는 그는 시간만 나면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에 촛불의 ‘불씨’를 지핀다. 하루 평균 200여 개 이상이 올라오는 게시판의 글들을 관리하고, 메신저로 접속해오는 수많은 네티즌들과 의견을 교환한다. 일주일에 한 번은 현장의 시위에 나가 미선이 효순이의 넋을 기린다.

그는 “촛불시위는 인터넷을 통해 한 명 한 명의 참여가 확산되며 전국민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며 “그 힘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식으로 국가적 자존심 회복으로 발전하는데 쓰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비록 현장에는 나오지 않아도 촛불 시위 관련 소식을 각 게시판으로 옮겨주는 네티즌도 소중한 참여자”라고 덧붙였다. 반면 ‘맥도날드 달걀 투척 사건’ 등 일부 시위가 폭력 양상을 띠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정씨는 최근 정부 및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촛불 시위 자체 요청으로 인해 네티즌들간에 시위의 지속 여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한 것이 영 마뜩찮다. “자발적 시위인 만큼, 그만두는 것도 참여 시민들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며 “중요한 것은 SOFA(주한미군지위협정) 전면 개정 등 본래 촛불시위의 정신을 잊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발적 참여로 희망을 일궈낸 i세대

정씨보다 더 현실 정치에 깊숙이 뛰어들었던 강욱천씨. 그는 노사모 회원이다.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는 날, 관악구 신림역 앞에서 노사모 회원들과 함께 유권자들에게 감사의 노래와 인사를 올리며 감격에 겨운 눈물을 흘렸다. 그는 “대선은 성숙한 시민 의식과 자발적인 참여로 희망을 일궈내는 시발점이 됐다”고 말한다.

“과거 민주화세대는 치열한 데모를 통해 사회 변혁을 선도했지만 우리 세대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발판으로 부패한 정치 권력에 맞서고 있습니다. 이슈에 따라 자유롭게 결성되고 활동하기에 더 강력한 힘으로 발현될 수 있습니다. 불모지에서 가능성을 창출하는 방법에 대해 새롭게 눈 뜬 것이죠.”

그는 온라인 쇼핑몰 운영자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지만 지난해 10월부터는 민주당 산하조직이던 국민참여운동본부에 들어가 활동했다. 매일 밤 12시에 접속해 ‘하리아빠’란 아이디로 ‘출근부’를 찍었고, 신림동 일대 고시원을 돌며 부재자투표 신청서식을 나눠줬다.

대선 당일에는 350여 통의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날리며 투표 참가를 독려했다. 생업을 뒤로 한 채 ‘돈 내는 활동’에 매달리느라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대선 과정의 활동은 돈에 비교될 수 없는 값진 경험을 줬다”고 말한다.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욕을 먹던 우리 세대(노마드 세대)가 비로소 자기 역할의 중요성을 깨달았잖아요. 열정을 분출할 출구를 찾은 거죠. 인터넷을 통한 쌍방향 의사소통이 아니라, 정치 권력자에 의한 일방적인 결정 전달이었다면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겁니다.”

대선이 끝난 후에도 그는 2,000여 명의 관악구 노사모 회원들과 수시로 온ㆍ오프라인 모임을 가지며 향후 활동방향 등을 논의한다. 잦은 모임 덕에 기독교 신자로 평소 좀처럼 술을 입에 대지 않는 그가 술꾼이 다 됐다고 하소연하면서도 시민들의 뜨거운 관심과 호응에 자부심을 느낀다. “‘노짱’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1차적인 목표 달성에 불과합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그를 통해 정치 개혁을 이뤄내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활동은 이제부터입니다.”


거대한 국민적 메시지 만들어 내

2002년은 행동하는 n세대의 힘이 입증된 역사의 장면 장면들로 이어졌다. 인터넷을 터전으로 응집된 에너지는 월드컵에서 붉은 악마의 열기로 분출됐고, 12ㆍ19 대선의 승패를 갈랐으며 촛불 시위를 통해 세계를 깜작 놀라게 했다.

그들은 ‘불모지에서도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특성’을 지녔다. 그들, ‘노마드’족의 활동영역은 새해에 더욱 넓어져 시공간을 건너뛰며 우리 사회를 바꿀 것이다.

배현정 기자 hjbae@hk.co.kr

입력시간 2003/01/09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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