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문화읽기] 사투리의 부활

그러고 보니 벌써 재작년이다. 동네 꼬마들이 “내가 니 시다바리가?”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라는 말을 주고받으며 즐거워 할 때만 해도, 영화 ‘친구’의 공간적 배경이 부산이니까 경상도 사투리가 유행하는 것이려니 했다.

작년 상반기에 드라마 ‘명랑소녀 성공기’에서 장나라가 “아저씨, 이리 와 봐유, 안아 줄게유”하며 능청스러운 연기력을 선보일 때에도, 캐릭터의 엽기발랄한 성격과 충청도 사투리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고만 느꼈다.

영화 ‘가문의 영광’에서 김정은이 평소의 조신하면서도 나긋나긋하던 목소리를 완전히 뒤집어서 “그려, 우리 집안 다 깡패여, 그랑께, 좋게 얘기할 때, ○○○ 닥쳐라, 잉”이라고 말할 때에는,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서 완전히 뒤집어졌던 기억이다. 부산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어려서 서울에 올라온 터라 나에게 사투리는 그냥 그런 것이었다. 사투리는 작품의 재미를 위한 에피소드적인 소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사투리와의 만남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간만에 대학로 극장 나들이를 나섰다가 두 편의 연극을 보았다. 태백산맥 어느 골짜기의 산골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웰컴 투 동막골’과 원작의 배경을 강원도 바닷가 부채끝 마을로 옮겨놓은 ‘거기’는 연극 대본부터 배우의 연기에 이르기까지 사투리의 향연 그 자체였다.

소극장에도 사투리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뿐인가. 아직 관람하지는 못했지만 오태석의 연출의 ‘앞산아 당겨라, 오금아 밀어라’는 제주 방언만 사용하는 연극이라고 하며, 제작을 앞둔 영화 ‘황산벌’은 백제의 전투작전을 염탐한 신라측이 ‘거시기’라는 백제의 사투리를 해석하지 못해 벌어지는 코믹한 상황을 그릴 예정이라고 한다.

영화와 연극을 통해서 앞으로도 사투리를 계속 만나게 될 모양이다. 영화의 제목을 패러디하자면 그 즈음에는 ‘사투리의 힘’이라는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주간한국>에서 한대수를 취재한 장병욱 기자의 기사를 읽다가 “세상을 돌아다녔지만 고향인 부산 사투리의 억양은 죽어도 안 고쳐진다”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세계평화에 대해서 고민하는 영원한 히피 한대수만을 생각했었는데, 정말로 그랬다.

다큐멘터리 필름에서 보았던 한대수가 걸쭉한 부산 사투리의 네이티브 스피커였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떠올렸다. ‘목 마르요. 물 좀 주소’의 울림이 히피라는 문화적 코드가 아니라 사투리에 있음을 뒤늦게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강산에의 근작 앨범에는 랩 부분에 함경도 사투리를 사용한 ‘명태’와 경상도 사투리가 사용되는 ‘와그라노’가 들어 있었던 기억이다. 초기의 강산에는 아버지를 직접적으로 이야기했었다. 이때의 아버지는 단순히 강산에 개인의 아버지가 아니라 한국근현대사의 상징이기도 했기에 울림이 컸었다.

그러다가 사회적인 메시지를 직접 전달하는 쪽으로 음악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번 앨범에서 강산에는 ‘삐딱이’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아들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강하게 드러낸다. 사투리는 아버지의 언어로써 아버지를 이해하고자 할 때 필연적으로 요청될 수밖에 없었던 매개항이자 우회로였던 것이다.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다. 음악에도 사투리가 꿈틀대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 보니,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대선주자들이 사투리를 어떠한 방식으로 선거전략에 활용했는지 나와 있었고, 어느 정당의 부대변인은 각도의 사투리를 논평에 사용해서 화제가 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한 영화 ‘친구’의 DVD에는 2 가지의 한글 자막이 제공되는데 대사 그대로를 담은 자막과 부산 사투리를 표준어로 풀어 쓴 한글자막이 추가되었다고 한다. 또한 인터넷 게시판 이곳저곳에는 사투리 열풍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개그 콘서트’의 ‘생활 사투리’를 모아서 편집한 파일들을 손쉽게 얻어 볼 수 있었다.

“내 아를 나도”는 신세대의 새로운 프로포즈 멘트로서 자리를 잡은 지 오래였다. 이 정도면 사투리는 현재 대중문화의 대표적인 아이콘인 셈이다.

글로벌 스탠다드의 시대에 왜 다들 사투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일까. 사투리의 부활이 갖는 사회문화적 함의는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사투리에 대한 태도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가지의 변화가 감지된다.

하나는 사투리는 ‘차별’의 문화적 표지가 아니라, 다양성과 이질성을 내포하고 있는 ‘차이’의 문화적 표지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사적인 영역이 아니라 공적인 영역에서 사투리로 말하고 사투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는 태도의 변화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계속 이어서 살펴보기로 하자. (계속)

김동식 문화평론가

입력시간 2003/01/19 15:22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