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匠人열전] 연극배우 이지은

'지하철 1호선'최장기 출연, 힘과 카리스마로 인기몰이

1996년 그녀는 낙상했다. 유달리 어둠이 많은 공연이라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던 사건이 그녀에게 들이닥쳤다. 공연이 석달째 접어 들던 날, 암전중의 2층 무대에서 내려오다 떨어져 6번과 9번 갈비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던 것이다.

1주일 동안은 압박 붕대를 상체에 조인 채 공연을 계속했지만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1달 동안 집에서 조용히 몸을 다독여야 했다. 그러나 상태가 제법 호전됐다 싶자 안방 생활을 1달 넘길 수가 없었다. 이후 3개월 쉬지 않고 공연했다.

이지은(36)은 그런 배우다. 1994년 5월 첫 운항을 시작한 후, 연극에서 대중 스타를 가장 많이 배출해 낸 이 뮤지컬에서 그가 처음부터 탑승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애착은 누구 못지 않다. 단일 배우로서 최장기 출연, 최고참 출연자라는 기록이 그렇게 나왔다.


독일공연서 “빨간 바지가 최고” 극찬

“대낮이여 음란한 너. 너를 혐오해, 대낮이여 너를 저주해. 토할 것만 같은 오, 대낮이여.” 서울역 지하 계단을 상징하는 계단에서 그녀가 배꼽을 드러내며 긴 하체에 끈적끈적한 록 선율로 절규하는 노래 ‘낮이여, 너를 저주하노라’이다. ‘맨발의 디바’ 이은미만큼 강렬한 힘과 카리스마를 필요로 하는 노래에다 연기가 곁들여 진다.

인터넷 동호회 모임인 프리챌 내 ‘지하철 1호선’의 오리지널 배우들의 동호인 모임 ‘곰보네’(www.freechal.com/gombo) 회원들이 그녀의 열성 팬들이다. 공연을 마친 뒤 분장실에서 몸을 풀고 있는 그녀를 직접 찾아 와 케이크 등을 선물하기도 한다. ‘건강을 챙기라’, ‘목에는 이런 것들이 좋더라’는 등의 팬레터를 하루에 10여통씩 e-메일로 부쳐 온다. 그의 고향인 원주에서는 팬들이 사탕이나 비타민 등을 보낼 정도다.

2001년 4월 작품의 원산지인 독일 베를린 그립스 극장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공연을 끝내자 원작자 폴커 루드비히가 격찬한 사람이 바로 그녀다. “빨간 바지가 최고(Red pants, best one)”이라며 기념 사진까지 찍었을 정도다. 독일의 대표적 일간지 ‘디 차이퉁’이 했던 “원작보다 낫다”는 평에도 그녀의 연기가 언급돼 있었다.


방송진행자서 연극배우로

원래 그녀는 원주의 인기 방송 진행자였다. 신인 가요제 은상 출신의 그녀는 KBS-TV의 ‘6시 내 고향’ 등 공중파 방송의 향토 소식 프로그램에서 리포터로 낯을 익혀 왔다. 특히 그 곳 KBS-FM에서는 그녀의 이름을 딴 ‘이지은의 밤의 데이트’가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었다.

그러다 1995년 방송을 하루 쉬고 친구와 올라 와서 보게 된 극단 학전의 ‘지하철 1호선’이 화근이었다. 돌아 간 그녀는 방송사에 “방송은 그만 두겠다. 이제부터 연극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미련 없이 떴다. 음반을 내겠다는 꿈도 함께 접었다. 가수 이선희가 차린 ‘해광기획’에서 준비 중이던 발라드 음반이었다. 그 노래 실력이 고스란히 무대로 살아 난 것이다.

극단 학전 특유의 역할바꾸기가 두드러지는 이 뮤지컬에서 그녀는 현재 불량 소녀 빨강바지를 비롯해 모두 5개의 인간으로 변신한다. 보험 외판원 영자, 588 창녀, 멀던 여사원, 지하철 청소부 등이 그것이다. 우수마발 같은 이들 극중 인물로 문화판에 알려졌던 배우들 중 일부는 대중 문화 스타가 되기도 했다.

설경구(창녀의 기둥서방)는 한국 영화계의 새별로 떴다. 황정민(문디)은 ‘와이키키 브라더스’로 신인남우상을 탔다. 또 방은진(걸레)은 영화 ‘301ㆍ302’의 여주인공으로, 장현성은 영화 ‘나비’의 주인공으로, 전영준은 EBS-TV의 인기 아동 교육 프로 ‘뿡뿡이 아저씨’의 주인공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단일 연극 작품에서 이처럼 많은 스타를 탄생시킨 예는 없다. 최장기 출연 배우인 이지은도 MBC-TV의 드라마 ‘6남매’와 극단 아리랑의 ‘유랑의 노래’의 섭외를 받고 극단 학전을 떠나 잠시 외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기억은 극단 학전의 출연작들이다. 현재 작품은 물론, ‘모스키토’, ‘개똥이’,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은 우리 시대가 잃어 가는 공동체적 가치를 복원해 낼 수 있었던 시간을 제공했다. ‘모스키토’에서는 아이들편에 서는 여선생을, ‘개똥이’에서는 호랑나비 역 등으로 객석의 환호를 받았다.


뮤지컬 대중화시대에 주목받는 배우

지금 한국에는 뮤지컬의 본격 대중화 시대의 꽃이 활짝 폈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볼거리, 들을거리로 중무장한 뮤지컬들이 2003년 벽두의 공연가를 달구고 있다. 한국 뮤지컬의 보증수표 ‘아가씨와 건달들’이 1월 13일 막을 내리자마자, 브로드웨이 오리지널팀의 ‘포에버 탱고’내한 공연도 14일 끝난다.

이에 질세라 뮤지컬의 본고장 영국의 대형 뮤지컬 제작사 RUG가 ‘캐츠’를 직접 들고 와 1월 29~3월 2일까지 공연해 한국 뮤지컬사의 기록을 하나 세울 전망이다.

또 극단 유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 담의 꼽추’를 뮤지컬로 만들어 26일까지 공연 중이다. 인터넷에서 조회수 50만을 넘긴 연애 칼럼 ‘우리가 연애를 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도 3월 2일까지 젊은 관객들에게 손짓하고 있다.

그녀는 여타 대형 뮤지컬과 비교해 극단 학전의 “인간적인 느낌”이 좋다고 했다. 이것은 이 사이버 시대에도 연극 공동체라는 낡은 가치가 왜 여전히 유효한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한 집안 식구 같은 극단원은 물론, 늘 부드러운 남저음 목청으로 재기발랄한 단원들을 이끌어 가는 대표 김민기씨 특유의 미덕에도 높은 점수를 준다.

특히 배우의 입에 짝짝 들러 붙도록 원작을 개작해 내는 대표 김민기씨의 번안 작업이 최대의 실질 공신이다. 지금, 바로 여기를 돌아다 보게 하고 비판하는 순 국산 뮤지컬에서 잔뼈가 굵은 이지은은 오늘도 서울의 지하철 1호선에서 어둠의 공간을 달구고 있다.

요즘 그녀는 공연과 함께 2월9일까지 홍콩에서 열리는 ‘제 31회 홍콩 아트페스티벌’ 참가 무대에도 신경을 부쩍 쓰고 있다. 에딘버러(영국), 바이로이트(독일), 아비뇽(프랑스) 등 서구의 3대 예술제에 버금가는 아시아권 축제에서의 공연은 올해 최대의 이벤트다. 홍콩 공연을 돌아 오고 끝내면 그동안 늘 아쉬웠던 재충전의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다.


“즐기면서 무대에 서고 싶어요”

먼저 여타 뮤지컬들을 많이 보러 갈 계획이다. 숨쉴 틈 없이 ‘지하철 1호선’ 무대에서만 살았다. 이제 초심으로 돌아가, 즐기면서 뮤지컬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요즘 부쩍 든다.

“안달 내서, 쫓겨서는 하고 싶지는 않아요.” 카리스마 있다는 말을 너무 들어, 이제는 착한 선녀 역도 하고 싶다. 정원을 넘치는 관객들은 객석 바로 앞 무대의 바닥에 2~3줄씩 쪼그려 앉아 봐야 하는 그 열기에서 잠시 한발짝 비껴서고 싶다는 마음이다.

숨바쁘게 돌아 가는 연극판에서도 남이 만든 작품을 보려 애쓰는 것은 남다른 덕목이다. ‘아가씨와 건달들’, ‘오페라의 유령’, ‘페임’ 등 국내 뮤지컬의 화제작을 놓치지 않은 것은 그래서다. 브로드웨이식의 화려한 뮤지컬, 예를 들어 ‘아가씨와 건달들’의 아들레이드 같은 역할도 이제는 마다 않을 생각이다.

“푼수끼에다 장난끼까지, 재미 있잖아요.” 그녀는 볼거리 위주의 “속없는” 브로드웨이식 뮤지컬과 비(非)브로드웨이 뮤지컬이 병행돼야 한다고 믿는다. “어차피 각각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요. 선택은 관객의 몫이죠.” 관객이 왜 브로드웨이식 뮤지컬을 찾는지를 한국 뮤지컬계는 냉철히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연하의 남편 최혁진(34ㆍ원주 밝음의원 기획실장)과 2000년 8월 원주 시내에서 치렀던 결혼식도 극단 학전 식구들의 극성 덕에 꽤 시끌벅적했다.

이 뮤지컬 출연 배우 16명은 물론 대표 김민기 등 학전의 식구들이 원주를 떠들썩하게 한 것이다. 남편은 이미 유기농 관련 일을 하면서 김민기, 김지하 등 문화계 인사들과 교분을 터 둔 터였다. 미뤄왔던 첫 아기는 홍콩 공연을 포함한 이번 봄 시즌 이후에나 가질 계획이다.

장병욱 차장

입력시간 2003/01/2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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