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소비심리] "땡처리 시장도 장사 종쳤어"

"IMF때도 이렇지 않았는데…" 지독한 불경기에 한숨만

시내 중심가 호텔에 ‘5일장’이 섰다. 재고품을 할인 판매하거나 부도 기업의 제품을 정리하는 ‘땡처리 시장’이다. 장이 시작된 4월2일 오전 10시30분 남산 힐튼호텔 컨벤션센터 입구. 아줌마, 아저씨들의 발길이 속속 이어진다.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일찍 가야 좋은 물건을 고르죠. 또 알아요? 진흙 속에서 진주를 캐낼지….” 서울 용산에 산다는 40대 한 아주머니는 총총 걸음을 옮긴다.

LG패션 신사 정장 4만원, 발렌티노 콤비 4만8,000원, 나산 본사 특별 초대전 균일가 1만~2만원, 리복 본사 최초 대공개…. 행사장으로 들어서자 솔깃하게 눈길을 끄는 플래카드와 함께 수십만 점의 남녀 의류가 빼곡이 들어차 있다.

비교적 알려진 브랜드 명패를 단 제품의 경우 옷걸이에 걸려 그럴싸하게 진열돼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중소업체 제품은 좌판 위에 수북이 쌓여 있다. 3만~4만원 짜리 양복 자켓이나 숙녀 원피스는 여기서는 비교적 ‘고가 제품’으로 통한다. 1만원만 갖고도 살 수 있는 옷들이 수두룩할 정도다. 점원들은 연신 “백화점 매장에서도 판매되는 제품”이라고 외치며 지나는 고객을 유혹한다.

아르바이트로 일을 한다는 한 점원은 “디자인이 약간 유행에 뒤쳐질 수는 있지만 제품의 질은 여느 제품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비슷한 시각, 서울 장충체육관에서도 3월27일부터 문을 연 ‘땡처리 10일장’ 막바지 행사가 한창이다. 아예 체육관을 통째로 빌렸는지 입구에서부터 통로 양쪽을 가득 메운 점포를 따라 체육관을 한바퀴 돌고 나면 경기장 안쪽으로 다시 수백개 점포가 눈에 들어온다. 가장 시선을 끄는 곳은 세계 명품 직수입 할인 행사장.

버버리, 페라가모, 아이그너, 프라다, 조르지오 아르마니, 구찌, 발리, 크리스찬 디오르…. 명품이라는 명품은 죄다 모여 있다. 백화점 판매가격이 70만원이라는 여성용 프라다 가방이 45만원, 50만원 짜리 페라가모 남성 구두는 33만원의 가격표를 달고 있다.

“‘짝퉁(모조 명품)’이 아니냐”고 묻자 “눈으로 확인해 보라”며 점원이 발끈해 되받는다. 바로 옆 매장에는 ‘부도 대처분’ 광고판과 함께 코오롱TNS, 나산 등 부도 업체의 제품 수만점이 좌판 위에 수북이 흩뜨려진 채 고객을 기다리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전국 곳곳은 땡처리 열풍

‘땡처리 시장’이 다시 돌아왔다. 거리 곳곳에 나붙은 ‘수백만점 대공개’ ‘세계 명품 최초 공개’ ‘부도 대 처리전’ 등의 광고 전단이 길 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 끈다. 4월 첫째 주말인 5~6일에만 해도 서울에서 힐튼호텔을 비롯해 잠실 실내체육관, 올림픽 파크텔, 양재동 교육문화회관 등 무려 5~6곳의 대형 땡처리 시장이 열렸다. 부산 대구 광주 청주 울산 등 전국 주요 도시까지 합하면 20여 곳을 훌쩍 넘는다.

땡처리 시장은 불황의 상징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 초기인 1997~98년은 땡처리의 절정기였다. 부도나 폐업 처리된 업체가 속출했고, 창고 가득히 쌓여있던 물품들이 대거 좌판으로 쏟아져 나왔다. 요즘이 딱 그런 양상이다. 상인들은 “아마 그 때보다 지금이 경기가 훨씬 나쁜 것 같다”고까지 얘기한다. 땡처리 시장의 부활은 소비 심리가 꽁꽁 얼어 붙은 2003년 봄 불경기가 만들어 내는 풍경이다.

땡처리 시장의 단골 메뉴는 부도 업체 제품이다. 나산 신원 진도 보성 서광모드 등 수년전 부도 처리된 업체의 브랜드는 시장이 열리는 곳마다 매장 한 켠을 차지한다. 여성 정장은 5만원 안팎에, 가죽 제품은 10만원대 정도면 구입할 수 있다.

시중에서 정상 제품을 100만원 이상에 구입해야 하는 모피 제품도 이곳에서는 30만~40만원에 판매된다. “재기를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지만 부도 처리된 회사이다 보니 고객들의 기피 현상이 심해 결국 땡처리 시장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매장 직원의 설명이다.

고객들을 유혹하기 위해 유명 브랜드 제품들도 속속 동원된다. 제일모직 LG패션 파크랜드 등 백화점 매장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브랜드 제품들이 ‘최고 80% 할인’ ‘5만원 균일가’ 등의 팻말을 달고 행사장에 깔린다. 대부분 유사 상표일 거라는 생각과 달리 진품들도 상당수 있다.

의류 업체 본사들은 한결같이 “우리 브랜드는 땡처리 시장에 내놓지 않는다”고 극구 손사래를 치지만 신사복의 경우 유통 과정의 맨 마지막에는 땡처리 시장으로 흘러 들어 간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한 업체가 100만원 짜리 신사 정장 100벌을 신상품으로 내놓을 경우 백화점 등에서 정상가에 판매되는 것은 4~5벌에 불과하다. 60벌 가량은 1개월쯤 지난 뒤 30% 가량 할인되고, 다시 시즌 막판에 5~6벌 정도가 50% 할인된 가격에 팔린다. 남은 30벌은 이듬해 ‘이월 상품전’의 몫이다. 여기서도 팔리지 않고 2~3년 창고에서 묵은 제품이 땡처리 과정을 밟게 되는 것이다.

신세계백화점 구자영 과장은 “신사복은 애초에 판매율 70%가 손익분기점이 되도록 가격 책정을 한다”며 “정상적인 매장에서 70%만 소화가 되면 나머지는 이월, 재고, 땡처리 등을 통해 처분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말했다.

한 의류업체 상설할인매장 관계자는 “예전에는 위탁 판매 방식을 택해 팔리지 않은 물건은 본사에 반납하면 됐다”며 “하지만 요즘은 대금을 전부 치르고 물건을 구입하기 때문에 재고가 쌓이면 땡처리 시장에 내놓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백화점 세일 행사 조차 거부하는 콧대 높은 명품 브랜드들은 개인 보따리 장사를 통해 땡처리 시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국내 판권을 확보하지 않고 정상적인 유통 과정을 거치지 않은 제품이 대부분이다. 한 기획사 관계자는 “개인들이 해외에서 명품을 들여와 판매하다가 남은 제품을 떨이 형식으로 내놓는 것”이라며 “때문에 모조품도 있을 수 있고 디자인과 색상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요란한 광고가 불황 대변

땡처리 행사가 불경기 때만 열리는 것은 아니다. 행사 횟수로만 따진다면 오히려 2~3년 전 경기가 좋을 때가 더 많았다.

하지만 대부분 소규모였고 산발적이었다. 행사장에 나오는 품목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 장충체육관 할인 행사 기획을 맡은 프라자기획 김동필 사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경기가 좋을 때라고 이월 상품이나 재고 상품이 없는 것은 아니잖아요. 몇몇 업체만 참가하는 소규모 땡처리 행사가 주로 지방 중도 도시에서 열리죠.” 그렇게 행사가 변변찮아도 경기가 좋을 때는 고객들이 많이 몰린다. 그래서 시끌벅적한 광고 전단을 뿌릴 필요도 없다. 김 사장은 “경기가 좋을 때는 서민들도 헐값으로 옷을 사서 몇 번만 입어도 본전은 뽑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경기가 좋을 때는 땡처리 시장도 ‘조용한 호황’을 만끽하는 법이다.

요즘 같은 불황에는 땡처리 시장이 요란해진다. 대대적으로 광고를 하지 않으면 고객들을 끌어들일 수 없는 탓이다. 그만큼 땡처리 시장이 열리는 횟수도 줄어든다. 창원기획 박동훈 사장은 “예전에는 한 달에 2~3번 정도 행사를 기획했지만 요즘은 2달에 2~3번 꼴로 줄어들었다”고 했다. 대신 행사의 규모는 커진다.

백화점이나 쇼핑몰 등에서 물건이 팔리지 않다 보니 땡처리에 동참하겠다는 상인들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박 사장은 “실제 행사 횟수가 많이 줄었는데도 불구하고 규모가 커지고 광고가 많다 보니 불경기 때 유난히 땡처리 행사가 많아 보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요즘처럼 대규모로 행사를 치르려면 하루 전체 매출이 5,000만원은 돼야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다. 행사장 임대료나 광고비 등이 만만치 않은 탓이다. 하지만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때가 그리 많지는 않다. 행사 첫날에는 호기심으로 고객들에 제법 몰려들지만 둘째 날부터는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게 보통이다. 하루 매출이 1,000만원을 간신히 넘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힐튼호텔의 땡처리 행사를 주관한 D기획 손모 사장은 깊은 한숨을 내쉰다. “경기가 워낙 얼어 붙어있다 보니 1만원 짜리 물건 하나를 사는데도 고르고 또 고르는 분위기요. 불황의 상징인 땡처리 시장이 불황을 겪고 있으니 참 아리러닉하지 않소?”


땡처리 쇼핑의 허와 실

땡처리 행사가 고객들로부터 외면받는 또 다른 이유는 실속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진품도 있지만 유사 브랜드 제품도 허다하다.

‘A 브랜드 1만점 1만원 균일가’라는 광고 문구를 100% 믿고 행사장을 찾았다가는 헛걸음을 하기 쉽다. A 브랜드 매장에 진열된 옷들은 상표가 전부 제각각이다. A사 원단으로 만든 옷을 회사 브랜드인 것처럼 포장하는가 하면, 아예 브랜드를 모방해 내놓는 옷들도 많다.

제일모직 관계자는 “제일모직 원단을 이용해 중소기업에서 옷을 만들고는 제일모직 제품이라고 판매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회사 입장에서는 브랜드 이미지가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설사 진품이라고 해도 이리 저리 매장을 전전하다 수년간 창고에 쌓여있던 제품들이기 때문에 디자인이나 색상이 유행에 뒤쳐지는 것은 물론이고 흠집 등 하자가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판매장에서 직접 입어보기 힘든 데다 한번 구입하면 환불이 되지 않는 것도 큰 흠이다.

따라서 땡처리 행사장에 가려면 되도록 빨리 가는 것이 좋다. 유사 브랜드 제품이나 중소업체 제품은 상자 채로 쌓여있지만 진짜 괜찮은 제품은 소량만 구비해 놓는 경우가 대부분인 탓이다. 치수나 색상도 골고루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원하는 상품을 구입하려면 서둘러야 한다.

또 참여 브랜드 업체를 구체적으로 밝힌 곳을 찾는 것이 좋다. 두루뭉실하게 광고한 경우 99%는 유사 브랜드 제품일 가능성이 높다.

이영태기자

입력시간 2003/04/10 13:47


이영태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