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공비·접대비] 접대 천국, 요지경 판공비

공무원 판공비는 아무도 모르는 판도라 상자

신발과 의류 등을 제조ㆍ수출하는 중견업체 F사의 박모(47) 영업담당 상무이사. 그는 1주일에 평균 3~4차례 해외 바이어 접대 등을 위해 강남의 룸 살롱을 찾는다. 또 주말에는 골프 접대에 나가야 한다.

강남의 웬만큼 유명한 술집이라면 다 둘러봤을 정도로 이 분야에서 빠꼼이인 박 상무는 줄곧 거래하는 단골 룸 살롱만도 3~4개나 된다. 스스로 한때 유명했던‘술상무’나 다름없다고 여긴다. 그나마 법인카드에 접대비 사용제한이 없어 다행이라는 그는 보통 고객 2~3명과 함께 룸 살롱에 가면 300만원 가량 쓴다. 통상 위스키 3~4병에 밴드 비, 웨이트리스 봉사료를 포함하면 그 정도 된다.

또 골프장에 갈 경우 4명을 한 팀으로 해 그린 피와 골프 후 식사대접까지 보통 100만원 정도 쓴다. 여기에다 가끔 있는 점심 접대까지 합치면 한 달에 각종 접대비로 쓰는 돈이 3,500만~4,000만원 선이 된다고 한다.


일주일에 한번이상 룸살롱 접대

중견 제약업체 C사에서 근무하는 최모(40) 차장도 접대 문화에 있어서는 일가견이 있는 영업 맨이다. 그는 박 상무처럼 룸 살롱을 자주 드나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 주일에 한번은 룸 살롱을 가는 편이다.

제약시장의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 보니 회사 자체가 영업 성과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경우가 많아 회사에서는 유능한 최 차장의 법인카드 사용액에 한도를 두지 않았다. 다만 한번에 100만원 이상을 결제했을 경우 부서장에게 사유서만 제출하지만 그 때문에 접대에 큰 불편을 느끼지는 않는다.

최 차장은 “회사내에서 법인카드 사용액 합계가 얼마인지, 어느 임원이 어디에 얼마를 썼는지 아는 사람은 이 정도”라면 손가락 세개를 편다. 사용자와 부서장, 회계 담당 임원만 구체적인 사용 내역을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영업분야에서 접대비 내역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는 게 그 세계의 불문률이다.

지난해 국내 기업의 접대비 4조7,000억원 중 룸 살롱과 골프장에서 쓴 접대비가 무려 1조8,330억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접대비 총액의 39%에 달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접대문화가 룸 살롱과 골프접대에 치중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 이유를 딱히 꼬집기는 어렵지만 법인 카드로 지출되는 룸 살롱의 술값이 접대비 항목에 포함돼 영업경비로 처리되기 때문에 기업으로서는 부담이 없는 탓도 있다.

그렇더라도 기업이 유흥업소에서 뿌리는 접대비가 천문학적인 규모에 이르는 현실은 접대 문화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얼마나 광범위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고, 또 후진적인지 보여주는 바로미터가 된다. 물론 한국적 현실에서 사업을 하다 보면 유흥업소 접대가 불가피하다는 주장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지만 문제는 유흥업소 접대 규모가 지나치게 크고 일반화돼 있다는 것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우리나라의 접대 문화가 술과 여자가 없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지적하면서도 “막대한 접대비가 일차적으로 기업의 비용으로 전가돼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지만 사업에 앞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이어주는 단추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국적 접대 문화의 특수성을 설명했다.


과다한 기업비용, 경쟁력 약화로 이어져

그러나 비싼 룸 살롱 접대가 직간접으로 기업의 부정ㆍ부패와 관련돼 있다는 점이 문제다. 모든 거래가 시장경제 원리에 의해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뤄진다면 굳이 유흥업소에서 아가씨를 끼고 술을 마셔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접대 문화에 의해 알게 모르게 쌓이는 거래 관행은 결국 기업의 투명성을 갉아먹고, 경쟁력을 약화시켜 ‘분식회계’와 같은 편법을 동원하게 하는 토양이 되기 때문에 더욱 큰 문제가 된다.

접대성 경비를 지출하는데 사용되는 법인카드는 흔히 판도라 상자라 불린다. 일반적으로 제조업체 과장급의 경우 법인카드 한도액이 1,000만원이지만 매월 50만원 안팎을 쓰는 게 대부분. 한 번 카드를 긁을 때 10만원이 넘으면 부서장에게 내역서를 올려야 한다.

문제는 법인카드의 변칙사용 및 회계처리다. 대부분의 기업은 법인카드로 사용한 접대비를 회계항목에 기입하지 않는다. 다른 경상경비 지출 항목에 분산해서 올리는 게 보통이다. 일부 회사에서는 아예 직원들의 법인카드를 모아서 한꺼번에 접대비로 쓰는 경우가 있다.

K그룹 민모(39) 차장은 “법인카드가 일부에서 잘못 쓰여진다고 해도, 회사 카드이기 때문에 쓰는데 신경이 쓰이고 전체 매출액에 비하더라도 미미한 액수”라고 말했다. “영수증으로 처리하면 공과 사 구별이 오히려 더 어렵다”는 민 차장의 주장이다.

그러나 다른 케이스도 있다. A증권의 김모 상무는 얼마 전 법인영업을 담당하는 부하직원이 회사의 법인카드로 처리해 달라고 내민 신용카드 영수증을 보고 놀랐다. 5명의 주요 고객에게 20만원짜리 퍼트(골프채)를 선물했으니 법인 카드로 접대 처리 해달라는 것이다.

이 직원은 한 달 새 무려 5건이나 이 같은 방식으로 골프채를 샀다고 주장했다. 김 상무는 퍼트를 샀다는 곳에 구입 여부를 확인한 결과 2건에 불과했다. 그는 직원들의 무분별한 법인카드 이용을 막기 위해 골프채 등을 선물로 주는 행위를 금지 시켰다.


법인카드 개인용도로 악용

지난해 연말 B증권의 이모 차장은 500만원을 들여 단골 고객 몇 명과 부부동반으로 태국을 잠깐 다녀왔다. 자신이 쓸 수 있는 월 업무추진비 한도(400만원 가량)를 초과했기 때문에 400만원 이하만 쓴 것처럼 가짜 영수증을 만들어 줄 것을 여행사에 요청했다.

이처럼 회사의 법인카드를 개인용도로 악용하는 사례는 한 둘이 아니다. 대기업은 임직원 등이 제출한 영수증을 다시 확인하는 내부검증을 통해 남용 사례를 막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고 한다.

더욱 심한 사례는 법인카드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카드’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중소기업에서 나타난다. 조그마한 봉제업체를 운영하는 김모(59) 사장은 가족들 소유의 차량 유지비, 외식비 등도 법인카드로 경비 처리하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아예 포기했다는 게 경리관련 직원들의 귀띔이다.

외부접대가 유난히 많은 또 다른 중소업체 S사의 박모 상무는 법인카드로 상품권을 일괄 구입한 뒤 그 상품권을 시중에서 할인, 현금을 융통해 접대비로 쓰기도 한다. 골프를 칠 때 캐디 비용은 현금으로 처리하기 때문이다.

통상 법인카드에는 접대비는 물론 복리후생비 등의 성격도 포함돼 있어 규모가 크지 않은 기업체 임원들은 입시학원이나 성형외과, 한의원, 골프 연습장 등에서 법인 카드를 사용하고, 심지어는 백화점과 동네 슈퍼에서 식료품을 산 예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복리후생비는 일반 경비로 처리되기 때문에 그 만큼 접대비로 쓸 수 있는 금액이 많아지는 점을 악용한 수법이다.

최근 접대비 사용내역에 대한 논란이 일면서 LG전자 감사실은 지난 2월 말 법인카드 사용 내역에 대한 일제조사에 착수했다. 조사는 과장급 초급 간부에서 임원, 최고 경영자(CEO)에 이르기까지 전 임직원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법인카드가 개인용도로 쓰여졌거나 룸 살롱 접대, 골프 향응 등 규정에 어긋난 용도로 사용되지 않았는지를 세세하게 조사했다. 국세청의 고강도 법인카드 정밀조사를 앞둔 일종의 계도성 문단속이었다는 것이 LG전자측의 설명이다.

국세청이 법인카드의 부당사용에 대해 칼을 빼 들면서 업계에서도 비상이 걸렸다. 국세청은 3월26일 법인카드 부당 사용 기업에 대한 특별관리에 들어갔다. 대상 기업만도 무려 5만8,956곳에 달한다. 지난해말 전체 결산법인의 19%에 해당하는 규모다.

국세청은 또 내년부터 룸 살롱 등 고급 유흥업소와 골프장 등 기업의 직접적인 경영활동과 관련이 없다고 판단되는 업종에 대해 접대비 인정을 하지 않기로 방침을 세웠다. 이들 업종에 대해 접대비가 인정되지 않을 경우 기업은 이익금이나 개인비용으로 지출할 수 밖에 없어 이용을 자제할 수 밖에 없고 접대 문화가 축소돼 사회전반에 걸쳐 파장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아질 전망이다.

그런 점에서 금융권은 접대비 문화에서 앞서 간다는 소리를 듣는다. 금융권 임원들은 과거에는 월급외에 별도로 업무추진비를 받아 접대비로 활용했지만 지금은 업무추진비가 월급에 포함된다. 각종 접대비나 경조사비 등을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지출하는 모양새가 돼 씀씀이가 그리 헤프지 않다고 한다. S 그룹 등 일부 대기업에서도 업무추진비ㆍ접대비를 월급에 포함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판공비, 자리따라 천차만별

공무원들의 판공비 내역 역시 베일에 싸여있다. 중앙부처 간부들이 한 달에 쓰는 ‘판공비’(업무추진비)가 1,000만원을 넘는다는 청와대측 주장이 나오면서 공무원이 한달에 쓰는 판공비가 과연 얼마나 될지 관심이다.

판공비는 소위 각 부처 실ㆍ국의 접대비를 일컫는다. 지금은 판공비 대신 업무추진비로 불리고 있지만 예산 항목상으로 업무추진비는 일반 업무비, 특정 업무비, 직급 보조비 등으로 구성된다. 이중 일반 업무비가 바로 판공비라고 보면 된다.

판공비는 주로 3가지 용도로 쓰여진다. 실ㆍ국에서 외부 전문가를 불러 회의를 하거나 체육대회 등의 행사에 사용하든지, 또는 실 국장들이 외부 인사를 만나는 경우 등에 사용한다.

그동안 일부 부처 장관들의 판공비 규모가 간간이 드러난 적은 있지만 주무부처 국장들이 쓰는 판공비 액수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예산을 담당하는 기획예산처의 한 관계자도 “국장들이 얼마나 많은 일반 업무비를 쓰는지는 부처 성격에 따라 천차만별”이라고 말했다. 확인 결과, 국장들은 한 달에 많게는 300만원, 적게는 40만원의 판공비를 쓰는 것으로 보인다.

판공비 규모가 상대적으로 큰 재정경제부는 국ㆍ실별로 월 일반업무비가 300만원을 넘지 않는다. 한 달 평균으로 많게는 300만원을 카드로 쓸 수 있다는 얘기인데, 다른 경제부처 국장의 판공비는 월 평균 150만원 안팎이다. 국장급은 한 달에 150만~200만원, 1급은 300만원 한도 내에서 쓰라는 내부 지침에 따른 것이다. A국장은 “직원 30~40여명과 식사라도 한 번 하게 되면 한꺼번에 몇 십만원의 식사비가 든다”고 말했다.

중앙청사 한 부처 B국의 형편은 훨씬 열악한 편이다. 외부인사와 접촉이 거의 없는 B국이 지난 한해동안 사용한 일반업무비는 고작 486만원으로 한 달 평균 40만원을 사용한 셈이다. C과장은 “지난해 체육대회를 하면서 가게에서 음료수를 샀는데 카드사용이 되지 낳아 계좌이체를 해줬다면서 판공비는 투명하게 쓰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과천청사 사회부처 D국장은 “국 운영비로 한 달에 쓸 수 있는 금액은 90만원 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반해 서울시장이 지난 한 해 동안 사용한 판공비는 4억3,000만원이고, 장관들의 판공비는 2억원 안팎이지만 많게는 4억원을 훨씬 웃도는 부처도 있다.

게다가 장ㆍ차관들이 국장의 일반 업무비를 전용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부처 관계자들은 실ㆍ국장 들이 일반 업무비를 쓰지만 상당 액수는 장 차관들의 모자라는 일반 업무비를 충당하는데 사용되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앞에 예를 든 A국장의 경우 국에 배정된 연간 일반 업무비 4,000만원 가운데 1,800만원 가량만 국 차원에서 쓰고 나머지는 회의 또는 장ㆍ차관 판공비로 나간다고 한다.

청와대는 판공비 공개입장을 밝히고 있지만 부처 관계자들은 장관이 함께 식사를 한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할 경우 사생활 침해가 될 수 있다며 공개가 어렵다는 입장이다.

최근 대법원도 지방자치단체장의 판공비 공개를 제한하는 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판공비를 사용한 간담회, 연찬회 등의 행사에 참석한 개인의 인적사항과 판공비에서 격려금이나 선물을 받은 개인의 인적사항은 개인을 식별 할 수 있는 정보로서 보호돼야 한다는 게 법원의 취지다.

장학만 기자

입력시간 2003/04/22 16:34


장학만 local@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