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보다 먼저, 새로움에 눈 뜬다

(주)이바닥 대표 최문규, 얼리 어답터 전시회 열어

“참 사치스러운 취미도 다 있구나” 싶었다. 새로운 기술을 채택한 독창적인 제품만 남들보다 골라 먼저 수집하고 경험해보는 취미라니. 돈 많은 부잣집 아들이 닥치는 대로 비싼 물건을 사들이다 보면 그게 취향이 되기도 하고, 취미가 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헌데 그것이 ‘일’이라고 했다. “이 일을 시작한 목적은 하나입니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눈 높이를 한단계 끌어 올려 기업들이 더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자못 비장하기까지 했다.

서울 종로구 사간동 금호미술관에서 ‘얼리어답터전’(5월2~18일)이라는 다소 생소한 전시회를 갖고 있는 ㈜이바닥 대표 최문규(34)씨를 만났다. ‘early’와 ‘adopter’를 합성한 ‘얼리어답터’는 남들보다 먼저 제품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제품을 먼저 구입해 보면서 제품에 대한 평가를 내려 주변 사람들에게 전파해주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일컫는다고 했다.


얼리어답터가 되기까지

대학원생(연세대 건축공학과) 시절이던 1996년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경제학 공부를 하고 있던 자형이 그에게 책을 한 권 보내줬다. 미국의 경제학자 에버릿 로저스가 지은 ‘혁신의 확산(Diffusion of Innovation)’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 로저스는 신제품을 채택하는 순서에 따라 인간의 유형을 ‘이노베이터스’, ‘얼리 어답터스’, ‘얼리 머저리티’, ‘레이트 머저리티’, ‘래거즈’ 등 5가지로 분류했다.

이 중 “어떤 제품이 좋다더라”는 구전의 첫 발설자가 되는 유형이 바로 얼리 어답터다. “책을 독파하고 보니 제가 얼리 어답터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됐죠. 어려서부터 남들이 갖고 있지 않은 제품에 대해 유달리 많은 관심을 보였거든요.” 외국 출장이 잦았던 아버지가 해외에서 신기한 제품을 선물로 많이 사다 준 것도 한 원인이 됐다.

2000년2월 웹에이전시 회사로 설립한 ㈜이바닥은 이듬해 8월 얼리어답터들을 위한 국내 유일의 회사로 변신했다. 인터넷에 그들의 공간(www.earlyadopter.co.kr)도 마련했다. “남의 일을 도와주는 것(웹 에이전시)에서 벗어나 직접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직원(9명)들은 “분명히 실패할 것이다”고 결사 반대했지만, 최 사장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수집 기준 1순위는 아이덴티티

그가 지금까지 모은 수집품은 200여점. 구입 금액으로만 따져 보면 6,000만원이 조금 넘는다. “생각보다 별로 많지는 않은 것 같다”고 묻자 “아무런 제품이나 사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수집 기준은 (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쿨(cool)’한지 여부. “아무리 좋은 기술이 사용됐다 해도 조잡하거나 독창성이 없는 제품이면 거들떠 보지 않습니다.

특히 제조 회사만의, 혹은 제품만의 아이덴티티(정체성)가 있는 제품을 선호하죠.” 그의 인지도가 높아진 요즘, 중소기업은 물론 대기업에서도 제품을 소개해 달라는 요청이 빗발치지만 이중 채택되는 것은 10%에도 미치지 않는다.

얼마나 좋은 제품을 수집하느냐는 순전히 발품 팔기에 달렸다. 전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박람회는 빼놓지 않는다. 최근 2~3주간 독일 하노버에서 열린 ‘세빗 전시회’를 비롯해 일본 요코하마에서 열린 ‘로보덱스:로봇 전시회’, 프랑스 파리의 가정 용품 박람회 ‘프와르 드 파리‘를 다녀온 데 이어 5월 13일에는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게임쇼 ‘E3’를 참관할 계획이다.

재래시장이나 벼룩시장도 부지런히 다녀야 한다. “지금까지 수집한 제품 중 80~90%는 공개된 박람회가 아닌 재래 시장 등에서 구입했다”고 했다.


재기발랄한 수집품들

어린이 날을 겸해 아이들을 위한 얼리 어답터전 형식으로 마련된 이번 전시회에 나온 제품은 120여점. 첨단 정보기술(IT) 제품 보다는 이색 게임이나 장난감이 대부분이다. 성냥갑만한 무선 조종 미니자동차, 나사(NASA)가 개발한 진공 상태의 우주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스페이스 펜, 인공지능 로봇 아시모, 바퀴가 달린 어린이용 책가방….

그가 가장 애착을 갖는 소장품은 ‘두루마리 메모 철’. “뉴욕 맨해튼 거리에서 장인 정신이 투철한 한 아랍 상인이 하루에 10개 안팎씩 물건을 만들어 나와 제품을 팔곤 했어요. 냉장고에 붙여 두고 두루마리에서 종이를 찢어 간단히 메모를 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는데 기술이 뛰어나기 보다는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돋보인 상품이었죠.” 최 사장은 맨해튼을 들릴 때마다 같은 제품을 구입하곤 했는데, 9.11 테러가 발생한 이후 그 상인을 볼 수 없었다고 했다.

실리콘으로 만들어져 거품이 나도 넘치지 않도록 만든 ‘돼지 모양의 냄비 뚜껑’, 세제를 쓰지 않고도 페트병을 깨끗이 씻을 수 있도록 한 ‘완두콩 모양 수세미’ 등도 자기만의 색깔이 뚜렷한 제품이라 애착을 갖고 있다. 소장품 중 가장 고가 제품은 로봇 강아지 아이보. 1999년 미국에서 구입한 손바닥만한 이 장난감은 한 개의 가격이 무려 350만원이다.


세계로 진출한다

홈페이지를 개설했던 첫 달, 고작 6명에 불과했던 회원은 1년6개월여만에 8만5,000명을 넘어섰다. 입장료 3,000원의 결코 적지 않은 요금을 받고 있는데도 전시회는 하루 1,000명이 넘는 관람객들로 늘 붐비고 있다.

최 사장은 “예상했던 것보다 얼리 어답터적 기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고 있다”고 했다. 기업 제품 컨설팅 수입, 전시회 수익금, 홈페이지 회원 가입비 등으로 사업도 안정적인 기반에 올라선 덕에, 그의 생활 수준은 중소기업 대표에 버금 간다.

하지만 그는 “아직 멀었다”고 했다. 그의 꿈이, 목표가 무척 거창한 탓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소비가 곧 과소비로 인식되면서 소비자들의 욕구가 제대로 표출되지 못해왔어요. 그래서 국내 업체들이 생산하는 제품은 어디 선가 본 듯한, 독창성이 떨어지는 것들이 대부분이죠.” 소비의 질을 높여 제품의 질을 향상시키겠다는 그의 목표가 이뤄지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세계 시장 진출도 곧 가시화할 전망이다. 조만간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일본 중국 미국 등지에 사이트를 개설해 얼리어답터를 역수출할 계획이다. “해외 사이트를 통해 국내 제품을 많이 알리는 동시에 판매까지도 연결시키기 위해서”란다.

인터뷰 도중 전시회를 찾은 대학생들로부터 사인을 요청받을 만큼 유명 스타가 된 최 사장이 ‘팬’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어떻게 하면 얼리 어답터가 될 수 있느냐”는 것. 그의 준비된 대답은 이랬다. “얼리 어답터는 취미가 아니라 성향입니다. 그저 새롭고 신기한 것이 선천적으로 좋은 것일 뿐이죠. 기질이 없다면 일찌감치 포기하세요.”

이영태기자

입력시간 2003/05/14 11:28


이영태 ytle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