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문화읽기] 굴리고 싶은 욕망의 확장

대기업의 경제연구소에 근무하는 Y 대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요즘 바퀴 달린 탈것들이 유행이잖아요? 인라인스케이트, 스케이트보드, 킥보드 등에 이어서 최근에는 운동화에 바퀴를 장착한 힐리스가 유행이라고 하더군요. 왜들 그렇게 바퀴에 열광하는 걸까요? 바퀴에서 어떤 문화적 의미를 읽어낼 수 있을까요?” Y 대리의 미모를 생각하면 그럴 듯한 답변을 해야 될 것도 같은데, 스케이트보드를 조금 타 보았을 뿐 인라인스케이트는 신어 본 적도 없는지라,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겠다며 답변을 미루었다.

전화를 끊고 나자, 문득 황동규의 시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주변에 정말로 많은 바퀴들이 있다.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의 바퀴, 여의도 공원을 달리는 자전거 바퀴, 퀵서비스와 중국집 철가방의 스쿠터 바퀴, 폭주족들의 오토바이 바퀴, 한 줄로 배열된 인라인스케이트의 바퀴, 운동화 뒤축에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힐리스의 바퀴, 그리고 바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바퀴벌레에 이르기까지. 2003년 한국의 문화적 일상은, 가히 바퀴의 춘추전국시대라고 할 만하다.

영화 ‘품행제로’에 잘 그려져 있듯이 1980년대 롤러장은 입시제도의 중압감에 시달리던 당시의 학생들에게 가벼운 일탈의 즐거움을 제공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청소년 유해환경으로 사회적인 지탄을 받으면서 그 열기는 시들해져 갔고, 1990년대에는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스케이트보드, 인라인스케이트, 킥보드 등이 유행했다.

흥미로운 것은 최근 2~3년 동안 인라인스케이트나 스케이트보드가 두 가지의 흐름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방향은 고난위도의 묘기를 펼쳐 보이는 익스트림스포츠(또는 X게임)로 나아가는 것이고, 또 다른 방향은 연령이나 세대의 차이를 넘어서 일상적인 레포츠로서 자리를 잡는 것이다. 익스트림스포츠의 문화적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바퀴 레포츠’가 대중화될 수 있는 심리적 근거를 헤아려보는 것은 어떨까.

최근의 바퀴 레포츠는 세대, 연령, 성별을 넘어선 일반적인 문화현상이다. 대학강사 K는 다이어트를 위해 인라인스케이트 매장에 들렀다가 일군의 스님들을 만났다고 한다.

스님들은 스케이트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 매장을 찾았다고 하는데, 몰라서 망설이고 있는 K를 위해 전문가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조용한 도량에서 인라인스케이트를 즐기며 환하게 웃고 있을 스님들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무척이나 코믹하면서도 흥미롭지 않은가. 바퀴 레포츠의 대중적인 열기를 짐작할 수 있는 에피소드라 하겠다.

왜 인라인스케이트나 힐리스를 타냐고 물으면,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재미있다” “번잡한 생각이 없어진다” “몸에 힘이 붙는 걸 느낀다”고 말한다. 바퀴 레포츠가 신체적인 건강 증진, 정신적인 스트레스 해소, 일상생활의 즐거움과 관련된다는 것은 다른 레포츠와의 공통점일 것이다. 즐기는 사람이나 바라보는 사람 모두에게 바퀴 레포츠는 그 자체로 건강한 욕망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바퀴는 일상의 생활공간을 레포츠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 마술과도 같은 힘을 가지고 있다. 인라인스케이트를 위한 별도의 공간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라인스케이터가 달리는 곳이 바로 레포츠의 공간이다. 바퀴가 기존의 공간구획방식을 무너뜨리며 새로운 공간성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바퀴 레포츠의 또다른 특징은 자기해방감이다. 인라인스케이트의 경우, 체감속도는 실제속도의 2~3배 가량 된다. 걷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운동량으로 걷는 속도의 몇 배에 해당하는 속도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신체적인 능력이 종전의 한계를 넘어 확장되고 있다는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만끽하게 된다. 노인들 중에 인라인스케이트 애호가가 많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대학원생 J의 말에 의하면, 바퀴 레포츠를 즐기기 위해 스케이트를 신고 보호장비를 착용하는 동안, 바퀴 달린 신발이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신체의 일부로 밀착해 들어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새로운 몸’ ‘보다 확장된 신체능력을 가진 몸’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신체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느낌, 최소한의 도구인 바퀴로 최대의 육체적인 능력을 이끌어내는 경험,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자아해방감은 바퀴 레포츠가 가지고 있는 최대의 매력이 아닐까. 고도로 기계화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가장 단순하고 원시적인 도구인 바퀴를 통해서, 잊고 있었던 몸과 자연을 재발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만간 바퀴를 굴리게 될 것 같다.

김동식 문화평론가

입력시간 2003/05/27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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