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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SK, 기사회생 하나

채권단 출자전화 요구, '버티기'에서 '백기'로 급선회

“예전과는 다를 겁니다.” 채권단 고위 관계자의 SK글로벌에 대한 답변은 단호했다. 말투에서부터 분명 예전하고는 달라 보였다. “그간 정부의 정책적 판단에 따라 부실 기업에 출자 전환과 신규 지원을 얼마나 되풀이 했습니까. 한 번 발목이 잡히면 더 이상 빼내지도 못하고 말이에요. 또 그것이 고스란히 금융 불안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까.”

정부도 달라졌다. 대우 사태나, 현대건설 사태나, 혹은 가장 최근의 하이닉스반도체 처리 당시에 적극적으로 전면에 나섰던 것과는 딴 판이다. 그저 “채권단의 결정을 존중하겠다”는 얘기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SK의 운명은 철저한 상업적 판단과 시장에 맡겨지게 됐다. SK측이 1조원의 출자전환을 요구하는 채권단의 요구를 전격 수용한다면 최악의 사태는 피할 수 있겠지만, 끝까지 거부한다면 ‘법정관리→ 청산 →SK그룹 공중 분해’의 파국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당장은 충격이 적지 않겠지만 청산을 통해 손실을 확정짓는 것이 장기적으로 유리하다는 게 채권단의 상업적 계산법이다. 그리고 타협을 위한 시간은 이제 길어야 1~2주 정도만 남았을 뿐이다.


불신에서 싹튼 벼랑 끝 대립

채권단은 SK㈜에 SK글로벌에 대한 국내 매출 채권 1조원의 출자 전환을 요구했다. 채권단은 이렇게 마련한 자금으로 출자전환에 참여하지 않을 채권금융기관의 채권 3조원 가량을 30% 수준인 청산가치(1조원 가량)로 사들일 계획이었다.

채권단 관계자는 “최소한 SK글로벌의 빚 1조원 가량을 줄여야 현금 유동성을 추가 확보해 경영 정상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SK㈜와 SK그룹측의 답신은 채권단의 요구에 턱없이 못 미쳤다. 국내 매출 채권 기준으로 4,500억원 이상의 출자 전환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SK글로벌 정상화추진본부 이노종 전무는 “대규모 출자전환이 주주와 종업원의 이익에 반해 배임의 소지가 있는 데다 SK㈜의 최대 주주인 소버린과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 등의 반대로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더 이상의 줄다리기는 없었다. 채권단은 5월28일 운영위원회를 열고 전격적으로 ‘청산형 법정관리’을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채권단 관계자는 “SK측이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미흡한 자구안을 제시해 왔기 때문에 더 이상의 협상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며 “SK글로벌을 살리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인지 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였다”고 격분했다.

채권단이 이처럼 재고의 여지도 없이 즉각적으로 초강수를 둔 데는 SK에 대한 골 깊은 불신이 깔려 있었다. 공동관리 초기에만 해도 채권단은 SK글로벌이 제출한 자체 재무보고서에 대해 어느 정도 신뢰를 보내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실사 결과 밝혀진 재무 상황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특히 재무상태 악화의 원인이 분식회계와 사기 행각을 통한 것이어서 채권단 일부에서는 “검찰에 고발이라도 하자”는 극한 발언까지 나올 정도였다. 채권단은 이례적으로 그간 공식적으로 한번도 외부에 밝히지 않은 SK글로벌의 분식회계 수법과 사기 행각을 낱낱이 공개하기도 했다.

한 관계자는 “확실히 회생시킬 수 있는 자구안이 없으면 결국 은행권의 손실만 갈수록 불어날 수밖에 없다”며 “차라리 당장 손실을 입더라도 서둘러 빚 잔치를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긍정적이라는 판단”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SK측의 자구액을 높이기 위해 채권단이 고도의 전술을 쓰고 있는 것이라는 분석도 내놓았다.


SK 글로벌 청산은 곧 그룹 해체

경제계가 SK글로벌의 청산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SK그룹의 해체가 불가피할 것이란 예측 때문이다. 우선 SK글로벌이 청산으로 갈 경우 SK글로벌 회생의 담보로 맡겨둔 최태원 회장의 계열사 지분 전량은 매각돼 채권단의 주머니로 고스란히 들어가게 된다.

최 회장이 보유하고 있는 계열사 지분은 SK㈜ 0.11%, SK C&C 44.5%, 워커힐 40%, SKC 7.5% 등 시가로 4,500억원 상당. 비록 그룹 지주회사 격인 SK㈜의 지분은 미미하지만 SK㈜의 주식 8.5%를 갖고 있는 SK C&C의 대주주로서 우회적으로 그룹 전체를 장악해온 터였다.

하지만 채권단에 담보로 맡긴 계열사 주식이 모두 처분됨으로써 결국 최 회장의 그룹 오너십은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여기에 SK글로벌이 보유하고 있는 SK텔레콤(3.55%) SK생명(71.72%) SK해운(33.17%) SK C&C(10.5%) SK증권(14.47%) 등 계열사 지분의 매각도 불가피하다. 결국 계열사들은 독립적인 경영을 위해 출자 지분을 정리하고 그룹은 해체의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룹의 해체는 계열사들에게 엄청난 후유증을 동반할 것으로 보인다. SK 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해온 SK㈜는 SK글로벌 지분(자본금) 6,500억원, 매출 채권 1조5,000억원 등 산술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손실만도 2조원이 넘는다. 게다가 SK글로벌이 운영해 온 알토란 같은 주유소를 모두 잃게 돼 자칫 영업망이 붕괴될 수도 있는 처지다. SK텔레콤 역시 일부 단말기 대리점과 두루넷 전용망을 SK글로벌에서 관리해 왔기 때문에 일정 정도의 사업 차질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들 주력 계열사를 제외한 나머지 계열사들의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SK글로벌 청산에 따라 SK㈜라는 그룹의 우산이 사라질 경우 유동성 위기 등 보다 현실적인 위기를 맞게 될 수밖에 없다. 이미 일부 계열사들은 SK㈜와 채권단 사이의 협상 과정에서 불거진 여신 압박 만으로도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어 이 같은 우려를 더욱 짙게 하고 있다.

매출 규모가 54조원에 달하는 재계 3위 그룹의 공중 분해는 금융권은 물론 한국 경제 전반에도 상당한 파급을 몰고 올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금융권이 당장 입어야 할 손실이 5조~6조원에 달한다. SK글로벌에 대한 금융권 여신이 8조6,000억원에 달하지만 이 중 회수할 수 있는 채권은 기껏해야 30% 안팎에 그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카드채 문제로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채권 시장이 또 다시 엄청난 회오리에 휘말릴 것이라는 게 더 큰 문제다. 만약 은행을 비롯해 2금융권이 SK 계열사에 대해 유동성을 지원해 주지 않을 경우 SK 회사채의 신용등급 하락은 피할 수 없다. 결국 SK 회사채를 편입한 펀드의 수익률이 급락하면서 대규모 환매 사태 등으로 확산돼 금융시장 불안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더 이상 재벌은 안전판이 아니다

채권단의 ‘청산형 법정관리’ 방침 발표 이후 채권단과 SK간 갈등은 극에 달했다. 채권단이 SK㈜가 SK글로벌에 공급한 석유 제품의 대금 지불을 하루 동안 중단하자, SK㈜측은 이에 맞서 SK글로벌에 석유제품 공급을 일시적으로 끊는 등 감정 대립으로까지 격화됐다. 이쯤 되면 서로 마주보고 달리는 두 열차처럼 정면 충돌은 불가피해 보인다.

하지만 채권단이나 SK측이나 SK글로벌의 청산이 최후의 수단이라는 데에 여전히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는 점은 아직도 실낱 같은 기대를 갖게 하는 대목이다. 양측 모두 “그래도 이왕이면 좋은 쪽으로 타협이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속내를 숨기지는 않고 있는 탓이다.

손길승 SK그룹 회장은 5월29일 SK글로벌 사태 이후 처음으로 가진 사내 공식 행사인 ‘신임 임원과의 대화’ 시간에 참석해 “SK글로벌은 반드시 살려 내겠다”고 강조했고, 그룹측은 채권단에 재협상을 요청하는 등 그룹 해체를 막기 위해 분주히 뛰기 시작했다. 채권단도 당초 30일로 예정돼 있었던 최태원 회장의 선고 공판에 맞춰 SK그룹의 비도덕성에 대한 탄원서를 재판부에 제출하려던 계획을 보류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길어야 2주일 정도다. 채권단은 이르면 6월 첫째 주말, 늦어도 둘째 주에는 전체 회의를 열어 SK글로벌의 법정관리 신청 여부를 최종 확정할 방침이다. 이 때까지 SK측이 채권단의 얼어 붙은 마음을 녹일 수 있는 획기적인 협상안을 내놓지 않을 경우 파국은 불가피하다.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우선 SK글로벌 지원의 열쇠를 쥐고 있는 SK㈜의 1대 주주인 외국계 크레스트증권, 즉 소버린측이 계열사 지원에 동의할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 않아 보인다. 참여 연대 등 SK그룹 소액 주주들의 반발도 크다. 참여연대 등은 그간 계열사 경영 실패에 대해 대주주 기업이 무작정 지원하는 것은 기업 지배구조 개선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누누이 밝혀 왔다.

물론 법정관리를 신청한다고 해서 모든 기회가 박탈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이 청산 결정을 내리기 까지는 3~6개월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재산보전처분, 법정관리인 선임, 자산ㆍ부채 실사, 관계인 집회, 정리계획 제출 등의 절차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일단 법정관리에 들어간다면 그 자체가 시장에 악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법정관리 이후에도 청산 결정 이전까지 타결의 여지가 남는 것은 사실이지만 금융 시장이 크게 동요하는 등 사태를 되돌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어떻게 결론이 내려지든 이번 SK 사태는 그간의 관행을 뒤엎은 사건이라는 점에서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과거 대우그룹 해체 등과는 달리 대주주들의 이해 관계에 따라 그룹 해체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외국 자본(크레스트증권)의 힘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더 이상 기업 스스로도, 또 대주주들 조차도 한국 사회의 ‘재벌 체제’를 모든 위험으로부터 방어해주는 안전판으로 여기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입력시간 2003/06/0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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