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억원 이상 전달증거 확보, 정치권 사정으로 이어질 가능성

[노무현의 도박] 정치판 뒤집을 SK 비자금
300억원 이상 전달증거 확보, 정치권 사정으로 이어질 가능성

SK비자금 사건이 ‘재신임 정국’으로 비화되면서 정치권이 요동치고 있다. 검찰의 칼끝이 어디를 향하는지 불투명한 상황에서 충격적인 대통령의 ‘재신임’ 카드가 돌출됐기 때문이다.

정치권은 SK비자금 사건이 ‘재신임 정국’의 빌미가 되고 청와대가 수사 대상에 오른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에 대해 ‘방임’하는 태도를 보이자 솔직히 긴장감을 숨기지 않고 있다. 강도 높은 ‘사정 정국’의 도래를 우려하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이 재신임 카드를 꺼낼 때만 해도 “즉시 국민투표를 시행하라”며 호재를 만난듯한 반응을 보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노림수’와 ‘진의’ 파악 및 대처에 골몰하는 양상이다. 민주당은 어리둥절해 하다 ‘선 진상규명, 후 재신임’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정가에서는 노 대통령이 무모하고 가볍기 그지 없는 정치적 카드를 빼들었지만 전략적으로는 소기의 성과를 거둔 측면이 있다는 분석을 벌써부터 내놓기 시작했다. 취임 이후 최악의 지지율로 대통령의 리더십마저 위협받고 국정운영의 바로미터가 될 내년 총선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반전’의 승부수를 재신임이란 핵폭탄급으로 던져 일정 부분 성과를 얻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재신임 여론이 불신임보다 앞선 것으로 나타난 것을 들 수 있다.

이에 따라 정치권은 노 대통령의 재신임 카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노 대통령은 11일 기자회견에서 “국정운영에 장애가 돼온 뒤틀린 정치환경을 명쾌하게 정리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유력한 재신임 방법으로 ‘국민투표’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러나 야당의 시각은 노 대통령측과 큰 차이가 있다. 신당 로드맵이 궤도를 이탈하고 검찰 수사가 노 정권을 압박하면서 정치 지형이 불리해지자 이를 돌파하기 위해 노 대통령이 승부수를 던졌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노 대통령이 ‘재신임’ 카드를 꺼낸 것은 ‘신당 띄우기’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라고 분석했다. 민주당 박주선 의원은 “사정 정국을 조성해 신당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책략”이라고 비난했다.

야당은 노 대통령이 승부수로 국민투표를 거론하고 있지만 이것은 ‘검찰 사정’ 등으로 유리한 정치 지형을 형성한 뒤에 시도할 문제로 보고 있다. SK비자금 수사는 결과에 따라 노 대통령이 치명상을 받을 부메랑이 될 수도 있고, 야당을 제어할 전가의 보도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 이유는 SK 자금의 정치권 유입 시기 및 규모, 성격 때문이다.

SK비자금의 정치자금 유입 관계를 수사중인 대검 중수부(안대희 검사장)는 지난 2일 손길승 회장의 소환 조사에서 SK그룹이 2000~2001년 SK해운을 통해 2,000억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해 16대 총선과 대선 당시 여야 정치권 인사들에게 최소 300억원에 달하는 ‘정치보험금’을 전달한 증거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총선ㆍ대선 당시 여야에 뿌려

앞으로 문제가 될 SK비자금의 정치권 유입은 크게 세 유형으로 요약된다. 먼저 2000년 총선 당시 여야 정치인 10여 명에게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씩 전달된 67억원이 있고, 이 돈과는 별도로 민주당 중진 현역 의원과 여권 고위인사인 전직 의원에게 각각 20억원씩, 한나라당 중진 현역의원에게 30억원 등 모두 70여억원이 정치권에 전달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서 민주당 현역 의원은 측근인 K씨가 SK그룹의 고위간부로 근무했다는 점에서, 한나라당 중진 의원은 손길승 회장과 학연이 있고, 최돈웅 의원을 손 회장에게 소개해준 것으로 전해져 요주의 대상이다. 마지막으로 16대 대선 직전 민주당에 후원금 명목으로 SK 자금 68억원이 전달됐는데, 10억원 이상이 정상적으로 회계처리 되지 않았다는 의혹이 있다.

SK비자금 수사가 2000년 총선에 맞춰질 경우 당시 민주당의 핵심 실세들과 한나라당 중진의원이 타깃이 된다. 민주당에서는 궐밖 대신으로 ‘2인자’로 통하던 권노갑 전 고문을 비롯해 총선에 깊이 관여한 김옥두 사무총장, 정균환 특보단장, 윤철상 사무부총장 등이 불똥을 맞을 가능성이 있다.

한나라당에서는 총선 및 대선에 관여한 이회창 전 총재의 핵심 측근들이 대상이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SK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한나라당, 민주당 인사들이 줄줄이 소환될 경우 총선 판도는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양당이 SK비자금 수사를 ‘신당 띄우기’를 위한 ‘표적 사정’이라고 반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민주당의 경우 소환 대상이 대부분 호남 인사라는 점에서 내년 총선서 호남표의 향방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호남표심이 비리 정치인을 외면할 경우 통합신당은 의외로 호남에서 상당한 세력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의 하나, 검찰 사정이 ‘호남 탄압’이라는 지역 정서로 이어질 경우 통합신당은 수도권에서마저 고전할 가능성이 높다.


신당ㆍ노대통령에게 불똥 튈 수도

SK비자금 중 최근 검찰이 손을 대고 있는 ‘대선 자금’은 수사 결과에 따라 구 여야 뿐만 아니라 신당과 노 대통령에게까지 불똥이 튈 가능성이 있다. 대검의 소환을 받은 통합신당 이상수 의원은 대선 당시 민주당 사무총장으로 대선 자금을 직접 관리했고, 스스로 “지난 대선에서 SK그룹이 생각보다 많은 돈을 후원했다”고 말한 바 있어 수사 결과가 의외의 파장을 불러올 수 있다.

또 최도술 전비서관은 노 대통령의 측근 중 측근으로 2000년 총선에서 사무국장을 지냈고, 대선에서 부산 선대위 회계를 담당했다.

일각에선 최씨가 부산에서 ‘향토기업’을 상대로 비공식 대선 후원금을 모금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는데, 이상수 의원과 최씨가 SK비자금과 연루됐다는 사실이 밝혀질 경우 깨끗한 대선을 치뤘다는 ‘도덕성’을 제일로 내세우는 노 정권은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 노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는 근저에는 이런 가능성을 미리 예방하는 차원의 노림수도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의원과 최씨의 개인 비리에 그칠 경우 노 정권의 ‘사정’ 칼날은 더욱 힘을 받아 한나라당과 민주당을 당장 압박할 수 있다. 검찰은 이미 2000년 총선 자금과 관련해 구 여야 의원 5~6명에 대해 소환 통보를 해놓은 상태다.

이렇게 정치권의 지형을 바꿀 메가톤급 파괴력을 지닌 SK비자금 사건에 대한 공정한 검찰의 수사를 담보하기 위해 청와대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청와대 일각에선 구 여야 의원들을 사법처리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최도술 전비서관과 이상수 의원이 ‘희생양’이 되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됐다는 후문이다.

칼자루를 쥔 검찰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조만간 고위 관계자 회의를 열어 ‘공명선거’와 ‘부정선거 척결’을 결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SK비자금 사건 수사는 바로 그러한 ‘공명 선거’ 캠페인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권은 당분간 늦가을 추위에 시달릴 것으로 보인다.

박종진 기자


입력시간 : 2003-10-15 17:26


박종진 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