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겪어보면 세상이 달라보여요"자기발전 꾀하며 사회참여욕구 충족

[체험열풍] 체험문화 홍수시대
"겪어보면 세상이 달라보여요"
자기발전 꾀하며 사회참여욕구 충족


장애인 체험에 나선 개그맨 김대의(가운데)가 휠체어를 타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 최규성 차장

옛 추억 한 가지를 먼저 떠올려 보자.

한 때 ‘체험 수기’니 ‘체험 고백’이니 하는 타이틀을 단 기사가 실린 잡지들이 잘 팔린 적이 있었다. 일반인들이 겪어보기 힘든 기이하거나 독특한 경험을 한 사람들의 인생 역정 스토리가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난데없이 1970~80년대의 빛 바랜 사진첩을 꺼내든 이유는 ‘체험’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 그 때 그 시절, 보통 사람들의 삶은 평범하고 단조로웠다. 먹고 살기 바빴던 까닭에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일상에서 빠져 나오기 어려웠다. 자기 울타리 밖의 일을 체험하는 것은 이따금 귀동냥으로, 혹은 책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젠 달라졌다. 요즘 사람들은 적당히 쓸 돈과 시간을 가진 데다 무엇보다 주변을 둘러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직접 뛰어들어 보고 듣고 느끼는 과정을 통해 제대로 알려는 욕구도 자연스레 강해졌다. 요컨대 ‘체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주변을 둘러 보라. 도처에 체험 문화가 넘치고 있다. 여러분도 한번쯤은 이 대열에 동참했을 수 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요, 백견불여일행(百見不如一行)이라! 잠시 한국 체험 문화의 만화경 속으로 들어가 본다.


- 다양한 체험행사 줄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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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풍요의 시대를 살면서 굶는다는 것은 색다른 체험이다. 단식 이야기가 아니다.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과 국내 결식 아동들이 겪는 배고픔을 직접 느껴보는 기아 체험을 말한다.

사회복지법인 ‘월드비전’이 한 방송사와 함께 개최하는 ‘기아 체험 24시간’은 국내의 대표적인 기아 체험 프로그램이다. 12년째 이어져온 이 행사는 그 동안 작지 않은 발자취를 남겼다. 꼬박 24시간을 쫄쫄 굶는가 하면 난민촌을 방불케 하는 캠프 생활을 해야 하는 등 풍족함에 길들여진 요즘 사람들이 견디기에는 모질다고 할 이 행사에 그 동안 동참한 인원이 46만 명에 달한다. 또한 행사를 마친 후 참가자들이 십시일반 털어 모은 후원금도 142억원이나 된다. 주로 학부모와 청소년 등 가족 단위로 기아 체험에 나선 참가자들은 비록 짧은 시간의 굶주림이었지만 음식 아까운 줄 알게 됐고 불우한 주변 이웃도 살피게 됐다고 입을 모은다.

신체 멀쩡한 사람들이 갑자기 휠체어를 타거나 길을 더듬으며 걷는 장면을 보게 되는 일도 있다. 이른바 장애인 체험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늘어나면서 생긴 행사이다. 대개 ‘장애인의 날’(4월20일) 등 특정한 계기가 마련됐을 때 관련 단체 주도로 벌어지는 이 체험 행사는 장애인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행사 자체가 조금은 이벤트 성격을 띤 데다 실제 장애인들이 느끼?만큼의 불편을 체험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한 사회복지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몇몇 외국의 경우 장애인의 불편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시설이 상설적으로 운영되는 데 비하면 우리나라는 아직 한참 모자라는 형편”이라고 아쉬워했다.

일제 식민지 시대 항일 투사들이 겪은 고초를 잠시나마 체험하면서 역사의식을 새로이 하는 부류도 눈에 띈다. 지난 98년 개관한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바로 ‘체험, 역사의 현장’이다. 개관 초기 정치인 등 지도층 인사들이 대거 찾으면서 잠시 각광받기도 한 이곳은 이후로도 소리소문 없이 방문객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98년부터 지금까지 누적 방문객 수는 약 3백만 명. 요즘도 하루 평균 2,000여 명이 찾는다고 한다.

이곳의 인기 체험 코스는 0.8평 독방과 고문실. 단체로 방문하는 초ㆍ중ㆍ고 학생들 중에는 몸서리 쳐지는 ‘역사 체험’을 하고는 “앞으로 일본 제품은 절대 쓰지 않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게 양성숙 학예연구사의 귀띔이다.

근래 우후죽순 등장하는 체험 문화에는 이처럼 개인의 시야를 자신이 발 딛고 있는 사회로 넓혀주는 ‘사회 참여적’ 체험만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자아(自我) 발전을 위한 체험 문화에서 훨씬 많은 다채로움을 발견할 수 있다.


- 관광상품으로 자리잡은 체험프로그램

해병대 극기훈련에 참가한 삼성 에스원 직원.

나약해진 심신을 다잡는 극기 훈련의 대명사인 해병대 체험. 귀신도 울고 갈 이 체험은 국내 기업체의 임직원 교육 프로그램 등으로 널리 사랑받는 가운데 이제 해외에까지 ‘수출’될 모양이다. 조직 구성원의 단합과 인내심 배양에 그만이라는 소문이 현해탄 건너까지 전해져 일본 기업체나 대학가에서 해병대 체험을 노크하고 있는 것. 지난 9월초엔 일본의 3개 회사 직원이 무리를 이뤄 2박3일 간의 단내 나는 훈련을 소화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불교계가 최근 몇 년 사이 국내에 성공적으로 보급한 산사 체험(템플 스테이)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도시 생활에 찌든 사람들에게 스님들의 예불, 참선 등 수행 방식을 그대로 행하게 함으로써 내면을 돌아볼 기회를 제공하는 이 체험은 새로운 여가 문화로 완전히 자리잡았다는 평가다. 대한불교 조계종은 일반인들이 언제든 산문을 두드릴 수 있도록 현재 전국에 11개 산사 체험 지정 사찰을 운영 중이다.

요즘 사람들의 체험 욕구가 부쩍 커지면서 전국 지방자치단체들의 관광 정책도 체험 문화 위주로 바뀌고 있다. 과거엔 여행객들에게 단순한 볼거리와 지역 특산품을 판매하는 수준에 그쳤다면 최근 들어선 직접 체험을 통해 향토의 참맛을 느끼도록 하는 상품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서해안 지역의 생태 체험이나 경기 이천시의 도자기 마을 체험 등은 이미 제법 알려진 사례들이다.

특히 경기도는 최근 ‘체험의 메카’를 자처한 듯 보일 정도로 다양한 체험 문화 상품을 쏟아내 주목받고 있다. 영어권 나라의 생활 환경을 그대로 재현한 안산시의 영어 체험 마을이나 웰빙 음식과 농촌 체험을 한데 묶은 ‘슬로 푸드 마을’ 등은 경기도의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 체험은 가장 건강하고 좋은 교육

그렇다면 들불 같은 기세로 체험 문화가 확산되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할까.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시대적ㆍ사회적 여건이 무르익은 데 따른 자연스런 흐름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한다. 빈곤으로부터의 해방, 정치ㆍ경제적인 민주화의 진전에 이어 개인의 감수성을 중시하는 문화적 민주주의의 도래가 그 배경이라는 것이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장을 역임한 한상진 서울대 교수는 “사회가 발전하면서 개인들의 주체적인 참여 욕구도 함께 신장했다”며 “기성의 권위나 틀에 박힌 지식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의 관점에서 뭔가를 얻고자 한다는 점에서 체험 문화는 건강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의 어느 유명한 교육학자는 ‘가장 좋은 교육은 체험’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지금 우리 국민들은 최상의 수단으로 스스로를 가르치는 방법에 눈을 뜬 셈이다.

김윤현 기자


입력시간 : 2004-09-15 15:39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