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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0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김철수 선생 손자 김소중씨 인터뷰
"이념의 그늘서 부대끼던 삶··· 할아버지는 비운의 지식인"



독립운동가 김철수 선생 손자 김소중 씨가 앨범 사진을 보이며 설명하고 있다. /임재범 기자

“조부께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인 1947년에 사회주의 활동을 중단했어요.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다 그토록 고초를 겪었고 이후 한국에 살면서 친북 활동을 한 적도 전혀 없는데 왜 이제야….”

정부가 올해 광복 60주년을 맞아 포상키로 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47명 중 1명인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출신 김철수(金綴洙ㆍ1893~1986) 선생의 종손자 김소중(69) 씨가 밝히는 소감에는 세상에 대한 섭섭함이 배어 있다. 김철수 선생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게 된다. 국가보훈처 발표가 있은 3일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그의 집엔 보훈처로부터 훈장 추서를 통보하는 전화 한 통이 왔을 뿐 여느 때와 다름 없었다.

“조부께서 살아계실 때 공로를 인정 받았다면 좋았을텐데…. 1986년에 돌아가셨는데 그 때까지 아무도 찾아 오는 이 없고 그야말로 외로움 속에 지내다 가셨다”고 말하며 그 동안 기구했던 가족들의 삶이 스치는 듯 나이든 손자의 눈이 붉어진다.

김소중 씨는 “6ㆍ25때는 남과 북 모두로부터 협조하지 않았다고 괴로움을 당했어요. 당시 남쪽의 극우파들이 집에 불을 지르고 할아버지를 사형대에까지 올렸는데 마침 조부를 아는 지휘관 덕에 생명을 건진 적도 있었다”며 분단과 이념대립으로 인한 민족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긴 가족사를 풀어낸다.

민족의 아품 고스란히 간직한 가족사

지운(遲耘) 김철수 선생은 전북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에서 태어나 1912년 일본 와세다대 정치과 유학 후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든 거물급 사회주의자였다. 1920년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목표로 국내 최초의 사회주의 결사체인 ‘사회혁명당’을 결성했다. 이후 국내 초기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고 일본, 러시아, 중국을 전전하며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그는 1921년 ‘고려공산당’을 창립했고, 1923년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했으며 1926년엔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됐다. 이듬해엔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 승인을 받았다. 사실 그의 활동은 조선 사회주의 운동사와 맥을 같이 한다. 1930년과 1940년 2차례 13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감옥에서 광복을 맞았다.



와세다대 유학시절. 앞줄 왼쪽 네번째가 김철수 선생.



사회주의자 김철수는 동시에 민족주의적 성향도 강했다. 해방 공간에서 자발적 친일파를 제외한 좌ㆍ우익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박헌영과 노선 갈등을 빚었다. 결국 노선투쟁에서 패배한 그는 무기한 정권(停權) 처분을 받고 조선공산당을 떠났다. 이후 여운형 선생이 이끄는 사회노동당에 몸을 담았지만 여운형이 암살되자 1947년 모든 정치활동을 접고 낙향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후보였던 와세다대 동창 신익희를 적극 지원하며 정치 재기를 시도했으나 신 후보의 급사로 또 다시 좌절을 겪기도 했다. 이후 1986년 93세 일기로 사망 때까지 은둔하듯 고향서 농사를 지었다.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삶이 대개 그러하듯 낙향한 독립투사 김철수를 기다리는 것은 가난의 멍에였다. 종손자 김소중 씨에 따르면 고향 부안에서의 가족의 삶은 매일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어려웠다. 한때 일본 유학까지 보냈던 증조부의 가산은 일제의 교묘한 탄압으로 거덜 난 상태.

여기에다 김철수 선생의 형제 7남매(5남2녀) 중 남동생 2명이 월북해 가솔들이 모두 김 선생 집으로 모여들어 조그만 고향 토방에 식솔이 자그마치 24명에 달했다. 우선 먹는 것 해결부터가 어려웠다. 이 와중에 장남은 초등학교도 못 마치고 농사일로 가족의 생계를 부담해야 했고 종손인 김소중 씨도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뒤 농사를 도왔다.

김 씨는 “조부께서는 밥만 먹고 살면 된다며 가난에 애써 초탈했지만 가난이 대물림 되는 현실 앞에 늘 가족들에게 미안해 하셨다”고 전한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자존심 탓에 지인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고 연리 50%에 가까운 고리대금을 쓰다 결국은 경제적으로 파탄을 겪기도 했다.

여기에다 김 씨의 부친은 조부인 김철수 선생의 고지식함에 대한 원망으로 가출을 하는 불화까지 겪었다. 이후 김 씨는 집안 생계를 위해 68년 상경하고 고향에 남은 김철수 선생은 야산에 10평 남짓한 움막을 짓고 살았다. 김 씨는 그간 막노동도 하고 조그만 사업도 하며 생활비를 벌어 시골과 서울 집을 끌어왔다고 한다.

이승만 정권 입각 제의 거절

김 씨는 “사실 이승만 정부 때 입각 제의도 있었지만 조부께서는 친일파 정권과는 함께 할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했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말년에는 죽거든 조그만 비석에 이름 석자만 파고 책도 쓰지 말라고 유언처럼 얘기했다”고 전한다. 현실에서는 좌절했지만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몸부림쳤던 ‘비운의 지식인’ 김철수의 강단이 그려지는 대목이다.

인터뷰 말미에 러시아 모스크바대에 유학한 후 러시아 연방 변호사와 연방상공회의소 부회장으로 활동 중인 김소중 씨의 2남 선국(40) 씨로부터 축하 전화가 왔다. 김 씨는 선국 씨도 대학 시절 증조부를 닮아서인지 대학(단국대) 총학생 회장을 하다 수 차례 감옥을 들락거리며 애를 먹였다며 그 동안 고난의 가족사를 씻은 듯 한바탕 환하게 웃는다.

김철수 선생의 3남2녀 자녀 중 막내딸 용화(85) 씨는 아직도 전북 부안군 계화면 돈지에서 홀로 살고 있다.


조신 차장 shincho@hk.co.kr  


입력시간 : 2005-08-11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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