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는 사찰서 합동차례, "차례는 장남이'란 관념도 무너져

[추석 특집] 여성 祭主 등장등 형식파괴 늘고 차례상에 피자·스테이크 올리기도
불자는 사찰서 합동차례, "차례는 장남이'란 관념도 무너져

추석 풍경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심각한 저출산 풍조와 남녀 평등의식 확산에 따른 가족제도의 변화 등으로 추석의 원래적 모습은 문화행사장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고 있다.

차례상을 홈쇼핑이나 인터넷을 통해 손쉽게 주문한다는 것은 이미 구문이고, 추석 연휴에 여행을 떠나 여행지서 인터넷 차례와 성묘를 지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일부에서는 연휴를 즐기기 위해 추석 전에 차례를 지내거나 추석 다음주 휴일에 지내기도 한다.

이처럼 가족들이 모여 그 해 수확물을 정성껏 장만해 상을 차리고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전통적 추석 모습은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 어느새 추석도 ‘무늬’ 만 남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전통 전례 권위자인 이승관 성균관 전례연구위원장은 추석이 변해 간다고 마냥 낙담할 것까지는 없다고 말한다. 이 위원장은 “극단적으로 인터넷으로 차례상을 차리든, 해외에서 온라인 성묘를 하든 안 하는 것보다야 낫다”며 “전통 예법이 사라져 가는 것이 아쉽지만 형식적으로라도 예가 이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예도 상황에 맞게 변하는 것이어서 달라진 세태를 탓할 일만은 아니지 않느냐는 얘기다. 2005년 달라진 추석 한가위의 모습을 살펴본다.

장ㆍ차남이 번갈아 가며 제사나 차례를 모시는 윤회봉사(輪回奉祀) 가정이 늘면서 의례 장남이 조상봉사를 책임지는 종법제(宗法制) 관념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특히 심해지는 저출산 현상은 ‘여성 제주(祭主)시대’마저 활짝 열고 있다.

2000년 통계청 인구주택 총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가구 중 딸하고만 동거하고 있는 가구수는 전체의 15.8%를 차지했다. 딸 아들 구분 않고 1명, 많아야 2명의 자녀를 낳는 지금의 추세를 생각하면 사촌도 없이 딸만 가진 가정은 앞으로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여성 제주시대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앞으로 10년 내 추석 등 차례ㆍ제사를 여자 형제가 모시는 경우는 특별한 이야기거리도 되지 않을 것이란 지적이다.

'여성 제주(祭主)'활짝

또 여성이 제주로 차례나 제사를 모시는 것에 대해 일반 가정에서의 부정적 시각과는 달리 학계에서는 일찍이 있어왔던 일이라며 금기시 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 우세하다.

조선시대 때 양반집 딸들도 제사를 모셔왔으며, 예법이란 것도 집안의 사정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세상의 변화를 어느 정도 수용해야 예법도 유지될 수 있다는 현실론을 펴기도 한다.

정신문화연구원 문옥표 교수는 의성 김씨 분재기(分財記) 연구를 통해 조선시대 양반가문에서 적장자(嫡長子ㆍ정실 부인 소생 중 장남) 중심의 종법제가 17세기 중반에 확립되고 보편화 했다는 그 동안의 학설을 뒤집는 결과를 내놓았다.

문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딸에 대한 재산분급이 꾸준히 나타나고 있으며, 분재기 상에는 봉사조(奉祀條ㆍ제사를 받드는데 쓰기 위해 별도로 떼어둔 재산 항목) 외에 장ㆍ차남이나 아들 딸 구분을 두지 않는 평균 분집(平均 分執)이 명시돼 있다.

이는 아들 딸 구별 없이 돌아가며 제사를 모시는 윤회(輪回)와 3~4대에 이르는 외손 봉사, 딸에 대한 분재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들이 없는 집안에서 딸이 제사와 차례를 모시는 것은 새로운 예(禮)가 아니라 조선시대에부터 내려오다 잠깐 사라졌던 예법이 새로운 상황에서 되살아 난 셈이다.

이승관 성균관 전례연구위원장도 “예부터 소위 대가 끊긴 집에서 딸이 부모제사를 모신 경우는 많았다”고 밝힌다. 충주 박씨 박순 가문은 외손이 제사를 모셔온 지 수백 년이 됐고, 최근에서야 충주 박씨 문중에서 제사를 가져갔다고 한다.

이 위원장은 “갈수록 딸만 가진 가정이 늘어나는 요즘에는 시집 간 딸이라도 고조부모 등 4대까지가 아니라 자신들의 부모, 즉 당대만 모시면 예법이나 현실적인 면에서 문제될 것 없다”고 설명한다.

더욱이 ‘딸들의 반란’으로 불리는 7월20일 대법원 판결로 결혼한 딸도 종중 회원이 되어 차례나 제사를 주도적으로 모시는 데 법적으로도 아무 하자가 없게 됐다.

사찰에서 추석 차례상 유행

추석 차례를 사찰에서 지내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서울 종로구 견지동에 있는 조계사는 1980년대부터 추석 합동 차례 법회를 마련하고 있다.

1가족 6위(3代)의 차례상을 모시는 데 드는 비용은 5만원. 차례는 오전 7시와 9시, 오후 1시 등 추석 당일 3차례 나눠 지낸다. 가족들이 편리한 시간에 이용할 수 있다.

조계사 이세용 총무과장은 “가족 제도의 급격한 변화로 사찰 합동 차례에 참가하는 가족이 매년 늘고 있다”며 추석 당일에는 법당이 꽉 찬다고 밝혔다. 이 과장은 올해는 지난해보다 늘어난 500여 가족이 이번 합동 차례에 참여할 것으로 내다봤다.










사찰 합동 차례는 불교 신자들이 많이 이용하지만 제사를 모셔줄 직계후손이 없어 방계친척이 제사를 지내는 경우나, 직계 후손은 있지만 아들이 없어 결혼한 딸이 가정에서 제사를 지내기 어려운 경우가 다수를 차지한다.

이세용 총무과장은 특히 “가족 구성원 간 종교적 갈등 문제로 집에서 차례를 모시지 못하거나, 첩 등 제대로 지방(紙榜)을 쓰지 못하는 조상의 차례상을 마련하기 위한 경우도 종종 있다”고 밝혔다.

사찰의 합동 추석 차례는 승려들이 염불하며 집례하는 형식이다. 참례자 모두 조상의 위패를 한꺼번에 모시고 차례를 지낸다는 점에서만 다를 뿐 잔을 올리고 절을 하는 등 순서는 가정에서 모시는 차례와 동일하다.

단지 사찰에서 차리는 차례상이란 점에서 육류와 어류는 상에 오르지 않는다. 술 대신에 차 또는 정한수를 올린다. 떡 과일 과자 나물 등 다른 제물들은 일반 가정에서 차리는 차례상과 다름없다.

올해 추석 합동 차례를 마련하는 사찰은 서울 조계사,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 도봉구 우이동 도선사, 강남구 포이동 구룡사 등을 비롯해 대도시 근처에 있는 유명 사찰 대부분이다.

음식 만들어 와 나눠 먹기

추석 풍경의 달라진 모습은 무엇보다 차례상에 오르는 음식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다. 홈쇼핑이나 인터넷에서 상 채 주문하는 것은 물론이고 차례상에 올리는 음식들이 자유자재다.

# 1. 지난해 결혼하고 지난 설에 처가를 찾은 한 신세대 신랑은 차례상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처가 차례상에 피자가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돌아가신 처의 할머니가 평소 피자를 즐긴 데다 처도 피자를 좋아해 어차피 차례 후 먹을 음식이므로 좋아하는 음식을 상에 올렸다는 것이다.

# 2. 갓 결혼한 새댁이 추석 며칠 전 차례상 장만을 위해 잔뜩 긴장한 채 시가를 찾았다. 그런데 시가 식구며 손위 동서들이 손 하나 까닥 안하고 잡담만 하고 있었다.

속으로 모두 내 몫인가 하며 서운하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큰 오산이었다. 시가는 명절이라고 특별히 다른 음식을 준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족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이니 각자 좋아하는 갈비며 스테이크, 만두 등을 각자 집에서 만들어와 나눠 먹는다는 것이다. 차례상도 그런 음식으로 차린다.

소위 신세대들 사이에 유행하는 ‘포틀럭 파티(Potluck Party)’인 셈이다. 음식 만드는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니 함께 모여 가족의 우애를 다지는 명절이 그렇게 즐거워졌다는 얘기다.

여성들만 ‘죽어라’ 일하는 명절 스트레스를 없애기 위해 여성민우회에서는 몇 년 전부터 ‘평등 명절 보내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여성민우회에서 권장하는 평등 명절을 위한 주요 지침은 우선 장보기에서 음식 만들기, 설거지까지 명절 노동을 남녀가 나눠서 하라는 것이다.

명절 하루 편하겠다고 아내를 부엌데기 같이 부리는 ‘간 큰’ 남편의 위세는 ‘1일 천하’로 끝날 것임을 경고하는 있는 것이다.

네티즌 46% “이번 추석 고향에 안 간다”

이번 추석 연휴는 3일로 짧다. 주5일제 근무자에게는 단지 하루가 더 늘었을 뿐이다. 그런 탓인지 네티즌의 46%는 이번 추석에 고향에 내려가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

옥션의 추석맞이 설문조사에 따르면, 네티즌의 37%가 “집에서 쉬면서 보낸다”고 응답했다. 7%는 “부모님이 역귀성”, 2%는 “여행을 할 계획”이라고 대답했다.

짧은 추석 연휴에 차례 지내려 고향에 왔다 갔다 하며 길에서 시간을 다 보내느니 차라리 집에서 쉬든지 여행을 가겠다는 것이다.

몇 년 전만 해도 귀성길 차편을 구하느라 길에서 밤을 새우기도 하면서 필사적으로 고향 길에 동참했던 풍경과는 사뭇 거리가 있다.

추석선물 비용도 지난해보다 줄이겠다는 응답이 49%였으며, 선물 가격도 10만원 이상 지출하겠다는 네티즌은 19%에 불과했다.

또 차례상 준비 비용?대해서도 54%가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으로 하겠다고 밝혔고, 41%는 작년보다 줄이겠다고 응답했다. 제수 비용으로는 62%가 10만~20만원을 적정 비용으로 꼽았다.

이 외에도 추석 때 부모님께 드릴 선물로는 55%가 현금 또는 상품권이라고 대답해 실속 있는 선물을 선호했다.


조신 차장


입력시간 : 2005-09-14 14:12


조신 차장 shincho@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