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디자인 파워로 바닥부터 다시 시작"

모닝글로리는 국내 문구 업계에서 최고의 브랜드 인지도를 자랑하는 회사다. 1981년 창사 때부터 문구 제품에 디자인 개념을 도입하고 1980년대 중반에는 CI(Corporate Identity)를 선포하는 등 업계를 선도하면서 해마다 가파른 성장세를 기록했다.

그러나 순풍에 돛 단 듯 거칠 게 없었던 이 회사는 IMF 외환위기라는 미증유의 사태를 맞아 좌초하고 말았다. 대출 동결과 자금 회수, 살인적인 고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1998년 1월 부도를 맞았다.

여기에는 창사 이래 15년 이상 지속된 호황을 믿고 방만한 경영을 한 것도 중요한 원인이 됐다.

2003년 화의 절차가 종료된 후 ‘구원투수’로 투입된 이종선 사장은 부임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화의 졸업했다고 해서 와보니 완전 자본잠식 상태에 회사 운영 자금은 한 푼도 없었어요.

게다가 직원들도 위기의식이 없는 등 분위기가 엉망진창이어서 이 회사를 맡을까 말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죠.”

심사숙고 끝에 이 사장은 2가지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하나는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도 브랜드 파워가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회사 경쟁력의 근간인 디자인 인력이 다행히도 남아 있었다는 점이다.

“유형 재산은 거덜나다시피 했지만 1등 브랜드, 디자인 파워 등 무형 재산을 발판 삼아 난국을 헤쳐나가기로 결국 마음 먹었죠.”

군살빼기로 자연스런 구조조정 유도

가장 먼저 한 일은 역시 최소한의 생존 여건을 확보하기 위한 구조조정이었다. 우선 비용 절감을 위해 소모성 경비의 30% 이상을 줄이는 조치를 단행했고 연간 2억원 정도가 소요되는 사보 발행마저 중단했다.

서울 마포구의 본사를 경기 안산으로 이전하는 계획도 추진했다. 전 임직원이 한 목소리로 반대했지만 경비를 줄이려면 어쩔 수 없었다. 생활 터전을 서울에 두고 있던 직원들 중 상당수가 이 과정에서 회사를 떠나 자연스런 인력 구조조정 효과도 얻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인재들이 남아 회생의 길에 동참했다. 전결 제도 폐지에 따라 이 사장과 직접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았던 직원들이 그에게 신뢰를 갖게 됐기 때문이다.

몇몇 임원은 오전 8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노원구, 경기 일산에서 매일 새벽 5시30분에 출근하는 수고도 감내했다.

이 사장은 회사의 무형 재산을 더욱 늘리고 적극 활용하는 전략도 병행했다. 한 때 사무용품, 팬시용품, 할인점용 등으로 세분화했던 브랜드를 다시 모닝글로리 하나로 통합하는 전략을 취했다.

또 고품질을 유지하고 할인 판매를 없애 브랜드 이미지를 관리해 나갔다. 핵심 인력들이 배치된 디자인실을 독려하기 위해 없는 형편에도 디자인 담당 중역을 발탁하고 디자이너 성과급제를 도입했다.

신 사업 발굴과 해외 시장 개척 등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일도 이 사장의 관심사다. 미국, 호주 등 영어권 국가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블루 베어’ 등 고유 캐릭터를 고부가 상품화하는 한편 중국의 3대 문구 업체와 손을 잡고 거대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경영이란 것은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절대 성공할 수 없어요. 더군다나 재정 여유가 없기 때문에 아직도 외나무를 타는 심정으로 일에 임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직원들은 제가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만 이 사장은 요즘 직원들에게 어려운 고비는 넘겼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 스스로 생각해 봐도 돈 한 푼 없이 재기에 나서 지금까지 온 것만 해도 기적처럼 여겨진다.

스톡옵션을 받고 열심히 일해온 임직원들의 가슴에도 희망이 더욱 커지고 있다. 조금만 더 고생하면 ‘아침의 영광’을 다시 노래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다.


김윤현 기자 unyo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