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계·정권 눈치에 문중 눈치까지박정희 정권때 母子도안 수명 25일… 석굴암 불상도안은 발행전 폐기

정부가 10만원과 5만원권을 2008년 이후 발행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고액권에 담길 도안 인물을 놓고 설왕설래 말들이 많다.

김구, 장영실, 광개토대왕에다 여성으로서 유관순 등을 추천하는 사람들도 많다. 한국은행은 일단 여론조사를 통해 결정하기로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은행 창립 이후 화폐 도안과 관련된 논란사를 짚어본다.

현재 1만원권 지폐에서 만나는 세종대왕 초상은 1973년에 처음 등장했다. 올해로 34년째 장수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1만원권 지폐 앞면에 세종대왕 초상본이 실리기 전, 그 자리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당시 한국은행과 조폐공사의 선정위원회는 1만원권 앞면에는 국보 제24호인 석굴암 본존석가여래좌상을, 뒷면에는 불국사 전경을 싣기로 결정한 것. 우리나라의 대표 문화유산이니만큼 도안 소재로 손색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대내외 공고 절차에다 지폐를 찍어낼 종이까지 수입해 인쇄를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된 상태에서 문제가 터졌다. 종교계가 집단적으로 반발한 것이다. 기독교 측에서 ‘특정 종교를 홍보하는 일’이라며 반대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불교계는 불교계대로 ‘신성한 부처님에게 불경죄를 저지르는 처사’라며 마찬가지로 반대했다. 결국 1만원권 도안 원안은 단 한 장도 인쇄되지 못한 채 폐기되었다. 그 후 대안으로 선정된 인물이 세종대왕이었다. 1973년 발행된 1만원권 앞면에는 세종대왕 초상이, 뒷면에는 경복궁 근정전이 실리게 된 속사정이다.

■ 대통령 얼굴 가운데 실었다가 '괘씸죄' 화폐 도안을 둘러싼 비화는 이승만 정부 시절에도 많았다. 한국은행이 창립된 날은 1950년 6월 12일. 13일 뒤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당시에는 일제 강점기의 조선은행이 발행한 조선은행권이 유통되고 있었다.

그런데 제조사였던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가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전시 자금을 긴급조달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1천환권과 1백환권 제작을 일본에 맡겼다. 전시인 만큼 화폐 도안에 제대로 신경 쓸 여건이 못되었다. 다급한 대로, 1천환권에는 주일대표부에 걸려 있던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화를, 1백원권에는 주일대표부가 소장하고 있던 책자에 실린 광화문을 그려넣었다.

지금껏 지폐에 도안된 인물 초상화들이 모두 오른쪽에 배치된 것도 이승만 정부 때부터의 관례다.

한때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으로 경호실장과 국회의장 등이 발의해 5백환권 지폐 중앙에 이 전 대통령의 초상을 실은 적이 있었다. 56년에 발행된 5백환권 지폐다.

그런데 이 전 대통령이 ‘어떻게 내 얼굴을 마음대로 접을 수 있느냐’며 화를 내자 곧바로 개정 작업에 들어가 2년 뒤인 58년 8월 초상화가 다시 오른 쪽으로 이동했다. 이른바 ‘중이박 5백환 괘씸죄 사건’이다. 발행 기간이 2년밖에 되지 않고, 당시 신권 교체 속도가 빨랐던 터라 이 5백환권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수량이 얼마 되지 않는다.

때문에 화폐수집가들 사이에 고가로 거래되고 있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와 함께 지폐의 초상화 도안도 운명을 함께 했다. 60년 4·19혁명으로 이 전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지폐 속의 이승만 초상도 동반 하야했다.

62년 6월 10일 제3차 통화조치 직전에 발행된 1백환권도 숱한 시비와 루머를 만들어냈던 화제의 화폐다. 이 1백환권 도안에는 한복 차림의 다정한 모습으로 저축통장을 들고 있는 모자(母子)상이 실렸다.

당시 박정희 군사정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추진에 필요한 자금 조달에 골몰해있던 상황이라 범국민 저축운동을 전개했다. 저축을 장려하는 상징적인 모델로 평범한 모자(母子)상을 지폐에 도입했다. 한국은행이 국내 지폐 도안에 무명의 인물을 채택한 것은 이것이 유일무이하다.

논란은 이 모자의 정체에 관한 것이었다. 그림의 실제 모델이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부인과 아들이며 부하들의 과잉 충성심이 두 모자를 선정했다는 근거없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러나 모자가 당시 한국조폐공사에서 근무하던 직원과 그 아들인 것으로 밝혀지면서 이 논란은 종지부를 찍었다. 문제의 1백환권은 발행된 지 불과 20여 일 만에 폐기되는 비운을 맞았다. 긴급통화조치가 발표되면서 수명이 끝난 것. 국내 화폐 역사상 가장 단명한 지폐로, 화폐수집가들이 구입하기를 선망하는 희귀한 화폐 중 하나다.

화폐 도안과 관련 율곡 이이 선생의 ‘두 얼굴’ 소동도 있었다. 70년대 세간의 도마에 올랐던 일이다. 국내 지폐에 초상화가 실렸던 옛 인물은 모두 3명. 세종대왕, 율곡 이이, 퇴계 이황 선생으로 ‘이 씨 성의 조선 시대 남자’들이다.

■ 외국인이 그린 어색한 율곡선생 초상 그중 72년에 첫 발행된 5천원권의 율곡 선생 초상은 얼굴이 작고 갸름하며, 큰 눈과 오똑한 코를 가진 모습이었다. 전체적으로 서양인의 분위기를 자아내, 마치 외국인이 한국 전통의상을 갖춘 것처럼 어색하다는 논란이 일었다.

당시 국내 기술로는 원판을 만들 수 없어 제작 대행을 의뢰한 영국회사 측에서 자신들과 닮은 꼴로 율곡의 초상을 그린 탓이다. 논란 끝에 77년 두 번째 버전이 나왔다. 전문가의 고증을 거친 ‘표준영정’을 사용해 율곡의 초상과 관련된 ‘인상 착의’ 시비는 끝났다.

이 씨 문중 사이의 항의 소동도 유명하다. “진성 이씨(퇴계 문중)가 덕수 이씨(율곡 문중)보다 인구가 더 많은데 왜 화폐가치가 더 낮은 1천원권에 퇴계 선생 인물을 넣었느냐”며 퇴계 선생의 후손들이 조폐공사에 항의했다.

조폐공사 측에서는 ‘1천원권의 사용 빈도가 5천원권보다 많으니 조상을 알리는 데 더 유리할 것’이라고 답해 무마한 것으로 알려졌다.

83년에는 ‘돌사자상 괴담’이 항간에 떠돌았다. 10원짜리 주화에 돌사자상 도안이 새겨져 발행된 것. 그런데 그때에는 무탈했던 주화가 2년이 흐른 뒤 괴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돌사자상을 불상으로 풀이해,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통령 만들기’용 사전 포석이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이 불자였기에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반면에, 화폐 도안의 덕을 본 이도 있다.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일화가 대표적이다.

71년 9월, 당시 정 회장은 현대조선소 건립 자금을 빌리기 위해 영국 바클레이 은행 관계자를 만난 자리에서 우리나라 5백환권 지폐를 펴보이며 “우리는 이미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철갑선인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이후 정 회장이 차관을 얻는데 성공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러나 거북선 도안 역시 순풍만을 만난 것은 아니다. 도안 그림이 변경되면서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66년에 처음 발행된 5백환권에는 거북선 그림 중 깃대는 있으나 돛대가 없었다. 73년판 발행권에는 깃대와 돛대가 모두 그려진 거북선 그림이 실렸다. 이 때문에 ‘형태가 너무 쉽게 변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화폐 도안과 관련된 일화는 외국에서도 많다. 극단적인 예로, 프랑스 황제 루이 16세는 지폐 도안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자신의 초상을 지폐 도안에 실었다가,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 급히 마부로 변장하고 외국으로 도망치던 중 지폐에 그려진 얼굴로 왕을 알아본 농부에게 붙잡혔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폐든 주화든 화폐에 어느 얼굴을 담을 것인가는 당대에 늘상 관심과 논란의 대상이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책에서 보듯 주화에 담긴 얼굴들은 시대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그래서 화폐에 실린 도안은 그 나라를 상징하는 얼굴이자 경제와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화폐 도안과 관련한 논란이 일어서는 안 된다. 화폐 도안을 결정할 때 고증에 고증을 거듭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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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주 pinplus@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