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나 연습이 끝나 피곤이 몰려올 쯤, 나는 선생에게 이렇게 말한 적 있다. "메시앙 시대, 그러니까 관념철학이념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더 좋았을 거에요." 켸켸묵은 녹음 테이프에나 어울릴 카세트 외에는 쓸 줄 모르고, 거기 맨날 녹음해서 듣느라 선생님은 한 번도 남의 경조사를 챙긴 적이 없다. 뭣보다 물리적으로 시간이 없다.

선생님과 내가 다른 점이라면 나는 구체적인 방식으로 접근해 들어가 걸음마를 떼지만, 선생님은 있는 그대로 일단 무대에 올려보고 살 자는 살아보라고 하는 방식이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귀납과 연역이란 논리 방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강씨의 연역적 접근법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그야말로 선블교적 수행 도구인 "할(?)" 아니겠는가!)

왜 그런 방식을 택할까? 그렇게 나는 물었고, 이렇게 그는 말한 적 있다. "영혼의 구원을 중시하기 때문"이라고. 수 년 전부터 선생님이 해 오던 말이 있다. "재천씨, 진인사 대천명이 아니라 대천명 진인사인 것 같어."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까닭 모를 허망함이 밀려 오면서 나는 깊은 상념에 빠진다.

자존심이 매우 강한 분이다. 특히 일본 관객한테는 냉담할 정도였다. "너무 고개 숙여 인사하지 마라. 저들이 우리한테 고마워 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한국 재즈의 제 1세대로 일본에서 인기 있었던 어떤 색소폰 주자가 그 곳 클럽에서 연주할 때, 관객(일본인)들 앞에서 무릎을 꿇은 자세로 연주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절로 났다. 그럴 때마다 객석은 뒤집어졌다 하니 쇼맨십에서 우러나온 전략으로는 성공작이었다고 봐 줄 도 있겠다) 하여간 뮤지션이 팬덤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문화를 매우 불만스러워 한다.

공연 때 팬들의 환호를 의식한 행동을 극히 싫어한다. 예를 들어 앵콜 때는 보통 열정적이고 기교적인 곡을 들려주기 십상인데, 선생은 오히려 느린 곡조를 들려주는 식이다. 때에 따라서는 앵콜이 예기치 않게 길어질 수도 있다.

올해 68세인데 그의 세계를 요약하는 음반이 두 장뿐이라니, 어림없는 일이다. 조바심이 나서 내가 닦달 하면 선생은 80까지도 까딱없이 살 거라지만.

나로서는 그렇다면 선생이 기술적인 것은 완전 배제하고 새 곡을 써 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것은 가야금 고수가 농현(弄絃)을 배제하고 연주한다면 관객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생각과 흡사한 궁금증이다..

그와의 본격 듀오 활동은 1996년~1999년까지 한국 일본을 오가며 계속 됐다. 당시 일본쪽에서 제의가 들어왔다. "강 선생은 솔로보다 듀오가 나은데, 트리오는 더 낫지 않을까" 하면서. (정제된 미학적 근거에 입각한 판단이라기 보다, 다양성과 함께 일종의 시각적 효과를 고려한 선택일 가능성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로서도 그 쪽이 화려하겠다 싶어, 실제로 베이스를 구하러 애쓰기도 했다. 아이 놓고 4년째 피아노에서 손을 놓고 있다시피 한 아내 미연을 불러들일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선뜻 그렇게 못 한 것은 바로 코앞에서 우리 두 사람이 고생하는 꼴을 지켜본 아내에게 차마 못 할 짓 같아서였다.

그러나 결국 미연은 2000년 이후 '강태환 트리오'라는 이름으로 함께 활동하게 됐고, 앨범 'Improvised Memory', 'Isaya'를 함께 만들면서 비중이 점점 커갔다. 그러나 재즈를 기조로 한 즉흥 피아노는 이미 사토 마사히코, 세실 테일러 등 기라성들이 많은 장르다. 재즈는 물론 현대 음악 이론과 그를 받쳐줄 테크닉을 겸비해야 하는 작업이다. 미연은 결국 한국의 전통으로 귀결되는 자신의 고유 어법을 찾으려 나름 애써왔다.

5살부터 피아노를 치고, 교회 성가대 반주를 하다 나와 인연이 맺어지게 된 중앙대 작곡과에 입학하는 것으로 큰 변화를 맞게 된다. 나한테는 5년 후배였던 미연은 입학 때 이미 전문 연주가 수준이었다. 곧바로 나와 무용, 연극, 영화 음악 분야에서 공동 작업을 할 수 있었던 이유다. 다행히 재즈에도 관심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검증이고 뭐고 거칠 여유가 없었다. 선생은 검증이고 뭐고 없이 즉흥의 중심으로 우리를 세웠다. 그래서 맞닥뜨린 첫 무대가 2001년 딸기소극장에서 가졌던 '강태환 트리오'라는 제목의 공연이었다. 우리는 꾸준히 1년에 5~6회꼴로 무대를 이어갔고, 소문을 전해 들은 일본쪽과 인연이 맺어졌다.

도쿄, 시즈오카에서 치렀던 무대의 소문이 나자 영국과 프랑스 투어의 길이 뚫렸다. 우리는 늘 하던 대로 무대 전체를 즉응으로 만들었고, 우리의 수준에 그들은 한국에 즉흥 연주가들이 많은 줄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그 곳 즉흥 연주자들이 한국서의 무대가 가능할지를 묻더니, 한국에 즉흥 연주의 기치를 내걸고 활동중인 연주자가 우리 셋뿐인 것을 알고는 단념하던 일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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