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어학자 박대종씨 '세종대왕 익선관 발견 주장' 반박의 글"해례본 완성된 시기엔 세종대왕, 5조룡 복장 착용… 4조룡 관모 썼다는 건 어불성설익선관은 두 날개 필수 요소인데 발견된 관모에는 없다화려한 문양의 화관, 세자빈의 것일 가능성 커"
더군다나 이 모자 안에는 국보 70호인 <훈민정음> 해례본 내 제자해(制字解) 일부가 인쇄된 몇 장의 종이가 들어있어, 오리무중인 상주본 때문에 답답해하던 국민들의 마음을 크게 설레게 했다. 기존 훈민정음 간송본 제자해 3쪽 뒷면과 비교해보면, 아직은 종이에 대한 과학적 연대측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지만 글자체, 글자 사이의 간격, 주변 글자들과의 관계 등이 일치하여 서로 동일한 판본임을 알 수 있다. 이 관모는 향후 탄소연대측정 등 검증작업을 거쳐 진품 여부 등이 최종 가려질 예정이나, 그에 앞서 진품이라는 가정 하에 몇 가지 사항을 짚어본다.
세종 익선관 주장의 의문점
첫째, 날짜를 헤아려보면 이 관모는 세종대왕의 익선관이 될 수가 없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완성된 시점은 1446년 음력 9월이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8년(1446) 9월 29일자 기록 "이달에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是月, 訓民正音成.)"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또한 해례본 말미에 있는 정인지 후서의 "정통 11년(1446) 9월 상한에... 정인지 삼가 쓰옵니다." 문구도 그 증거이다. 따라서 해례본 일부 종이가 들어 있는 이 관모는 당연히 1446년 9월 이후에 제작된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판본이 둘 이상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어떤 판본도 1446년 음력 9월 이전의 것이 될 수는 없다.
그런데 세종께서는 최소한 1444년 이후 1450년 돌아가실 때까지 발톱 다섯 개의 5조룡(五爪龍) 복장을 착용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대왕은 김하(金何)를 통해 1439년 5월 11일 명나라로부터 5조룡 익선관을 가져오고, 또 사은사 유수강(柳守剛)을 통해 1444년 3월 26일 명의 황제로부터 향조추사 익선관(香皂皺紗翼善冠)을 포함한 오조룡복(五爪龍服)을 받았다. 그러니 5성 장군이 4성 장군의 모자를 쓸 수 없는 것처럼, 최소 1444년부터 5조룡 모자를 썼던 세종대왕이 1446년 이후에 제작된 이 4조룡 관모를 썼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속칭 '오사관(烏紗冠)'으로도 불리는 명대의 익선관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옥(前屋)과 후산(後山) 및 날개 모양의 절각(折角)이 그것이다. 익선관에는 두 마리 용이 있고 태를 유지키 위해 속에 대(竹)나 나무, 또는 종이를 댄다. 그런데 이번 공개된 관모는 두 마리 용이 있긴 하지만 검은 색도 아니고 익선관의 핵심 성분인 절각(翼)이 없기 때문에 익선관이라 칭할 수 없다.
셋째, 이상규 교수가 공개한 관모는 그 장식이 매우 화려하고 많은 꽃이 수놓아진 화관(花冠)의 일종이다. 왕과 왕세자가 착용하는 단순한 모양의 검은색 익선관과는 달리 날개가 없고 화려한 꽃장식이 특징이다. 이로 보아 이 화관은 그림에 나오는 명청대 황실 여인들의 모자처럼 남성용이 아닌 여성용이다. 이 관모의 하단부 둘레(머리 둘레와 모자 둘레는 다름에 유의)는 57㎝이고 현재 우리나라에서 판매되는 여성용 모자의 둘레 길이는 보통 55~57㎝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관모의 장식에 王자와 4조룡을 사용할 수 있는 조선왕실의 여인은 왕세자빈이다. 왕비는 현재 남아있는 오조룡왕비보(五爪龍王妃補)가 증명하듯 왕처럼 5조룡을 썼다. 그림에 보이는 명대 효정황후(孝靖皇后)의 복장을 보면 꽃과 구부러진 줄기들이 어우러져 있는데 그 기법이 금번 발견된 4조룡 화관과 매우 유사하다. 4조룡 화관 또한 그 옆에 많은 주옥을 달면 그림의 것처럼 훨씬 더 화려한 모양이 될 것이다. 그림 위쪽의 청대 후비의 점취전자(点翠鈿子)에는 길상을 뜻하는 卐(만)자가 보이는데, 4조룡 화관과 그 양식이 매우 닮았다. 卐자의 네 끝선이 구부러진 것 또한 동일하여 주목된다.
이번에 발견된 4조룡 화관에는 王자가 작은 글씨로 수놓아져 있고, 卐(만)은 모자 전면에 제목처럼 큰 글씨로 나타난다. 그 방향이 반대인 卍자는 卐과 같은 '만'자로 본래 불교에서 비롯되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 당나라 측천무후가 그 음을 '만'으로, 그 의미는 '길상(吉祥) 만덕(萬德)이 모이는 것'으로 정하였다. 그러니 이 '4조룡 卐자 화관'의 용도는 경사스러운 날에 착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철저하고 객관적인 검증 필요
이처럼 국보급으로 판단되는 중요한 유물이 나왔을 때는 성급함은 자제될 필요가 있다. 제4대 국새 사건에서 보았듯 세상이 얼마나 험악하고 교묘한가? 향후 문화재청 등이 잘 알아서 정밀검증을 하겠지만, 위조 여부 조사 시 다음 사항들을 유념해줄 것을 조언하고 싶다.
이번 건은 지난 공개발표 시 문화재청 공무원들도 현장에 참석한 중대한 사안이다. 따라서 신뢰를 주기 위해서는 문화재청 주도로 복수의 기관을 통해 이 화관에 대한 연대측정을 실시해야 한다. 저명한 외국기관에 의뢰하면 객관성이 더욱 담보될 것이다. 또 옛 종이를 구해 현대용 인쇄기 등 새로운 방식으로 위조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육안감정만 하지 말고 잉크의 성분 및 연대에 대한 철저한 과학측정도 해야 할 것이다.
과학적 연대측정을 통해 이번 '4조룡 卐자 화관'이 옛날 물건임이 맞고 또 그 내부의 해례본 문건도 옛 것이 맞다 하더라도, 여성용 화관에 훈민정음 종이를 넣었다는 것은 세종대왕 자신이라면 몰라도 왠지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가정하건대, 만약에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주본이 낱개 단위로 여러 곳에 팔려나가, 그 중 몇 장이 옛날 모자 속에 교묘히 들어가 새로 포장되었다면 어찌 할 것인가? 탄소 측정을 할 때 꿰맨 실까지도 측정을 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王자 등을 원래 무늬 위에 나중에 수놓았는지 여부 또한 확인해야 할 것이다. 꽃 장식의 세자빈 모자에 王자가 들어있는 것이, 물론 王世子嬪(왕세자빈)이란 용어에는 王자가 들어가긴 하지만 그 또한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과 중국의 역대 왕관들 위에 "나 왕이오"를 나타낼 목적으로 '王'자를 쓴 실례가 있는가?
철저히 검증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꽃장식이 화려한 여성용 화관을 미리 세종대왕의 익선관이라고 그래픽까지 동원해 씌우는 것은 마치 한 편의 블랙 코미디 같다. 민화에 나오는 것 같은 해학적 표현의 웃고 있는 용의 모습이 현대인들에게 "무슨 모자인지 알아맞혀봐"하며 우리나라의 문화적 역량을 시험하는 듯하다.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