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李사건 남북 정상화에 걸림돌 평가…朴정부에 도움되는 행보 취할 수

北 해방 60년사 정리…DJㆍ盧 정부 역사 수록 NLL 등 불똥 튈수

‘이석기 사건’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 예전과 크게 다른 모습이다.

사건 초기 침묵을 유지하다가 그나마 반응을 보인 게 논평은 않은 채 남한 언론 보도를 인용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후 첫 공식 입장도 남한 정부에 대한 비난보다 이석기 사태로 인해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경계하는 데 방점을 두었다.

이석기 통합진보당(통진당) 의원의 내란음모 혐의를 놓고 남한이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전국이 들썩이는데 반해 정작 북한은 그다지 무게를 두지 않는 입장이다. 남한에서 정치권은 물론, 사회적으로 좌우가 갈려 극심한 대립을 보이고 있는 반면, 북한은 ‘이석기 사건’에 무척 말을 아끼는 양상이다.

조선중앙통신은 국정원의 통진당 압수수색 다음날인 8월 29일 남한 언론 보도를 인용해 국정원과 검찰이 통진당에 대한 ‘대대적인 폭압’에 나섰다고 짤막하게 보도했지만 논평은 하지 않았다. 단지 통진당이 “유신 독재체제의 선포나 다름없다”고 비난한 것을 그대로 전달하기만 했다.

대남 선전용 웹사이트인 ‘우리민족끼리’도 지난달 31일 남한 정부가 ‘통일민주세력에 대한 탄압 책동’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번 사건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다.

조선중앙통신은 6일 이석기 사태가 발생한지 열흘만에 나온 첫 공식 반응에서 우리 정부를 직접 겨냥했다.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은 ‘이석기 사건’을 북한과 억지로 결부시키는 것은 북남관계 개선 의지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이며 용납 못 할 도발이라고 주장했다.

서기국은 이어 남측 정부가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으로 위기에 몰리자 이를 모면하기 위해 마녀사냥극을 벌이고 있다며 북남대화, 북남관계개선을 가로막는 광란극이라고 비난했다.

‘이석기 사건’에 대한 북한의 반응에서 주목되는 것은 남한 정부를 비난하면서도 ‘남북관계 개선’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남한에서 공안사건이 발생하면 우리 정부가 진보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모략극’을 벌이고 있다며 일방적으로 비난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2011년 북한의 지령을 받고 간첩단을 구축했다는 ‘왕재산’ 사건이 불거졌을 때는 검찰이 사건을 공개한 지 7일 만에 ‘우리민족끼리’를 통해 이명박정부가 공안정국을 조성하고자 과거 독재정권의 상투적인 수법을 쓰고 있다고 비난했다.

2006년의 간첩단 ‘일심회’ 사건 때도 북한은 이를 남한 보수세력의 ‘파쇼 탄압 기도’라며 공세를 폈다.

‘이석기 사건’에 대한 북한의 변화된 모습에 대다수 전문가들은 개성공단 정상화 등 남북간 해빙무드를 깨뜨리지 않으려는 전략적 판단일 뿐 근본적으로 달라지진 않았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이석기 의원 등이 북한과 연계됐다는 쪽으로 수사방향이 가닥이 잡힐 경우 북한은 ‘조작극’이라며 비난 공세를 펴는 것은 물론, 남북대화의 창까지 닫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北 ‘해방 60년사 정리’변수되나

반면, 북한은 이 의원에 대한 수사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든 예전처럼 남한 정부를 일방적으로 매도하며 남북대화까지 단절하는 경우는 없을 것이라는 반론이 있다.

오랜 기간 북한과 교류를 해온 대북 소식통들은 북한이 체제 변화와 함께 남북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 하기 때문에 ‘이석기 사건’을 이유로 박근혜정부와 단절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전망했다.

북한 고위층과 인연이 깊은 베이징의 대북 소식통은 “북한은 김정은 체제에서 당이 명실상부하게 중심에 서면서 남북관계를 정상화하려 한다”면서 “ 남한의 ‘이석기 사건’ 같은 일로 남북관계가 파탄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2003년부터 북한 내부에서 ‘해방 60년사 정리’라는 큰 흐름이 형성됐고 남한에 박근혜정부가 들어서면서 그런 흐름에 속도가 붙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이 지향하는 해방 60년사(1945~2005) 정리의 기준은 ‘민족’으로 이 입장에서 냉정하게 평가해 반민족적 행위를 엄단하고 향후 민족(남북한)이 중심이 되어 새 역사를 열어가는 것으로, 현재진행형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북한은 정상적인 남북관계를 형성해 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북이나 남에서 모두 제거되야 한다는 입장인데 ‘이석기 사건’은 그(걸림돌)에 해당할 수 있다는 게 소식통의 설명이다.

그는 “남한에서 종북(從北)이라고 하는 ‘이석기 사건’ 에 대해 북한이 박수를 보낼 것이라고 보지만 큰 틀에서 남북(민족)이 정상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데 오히려 장애가 되는 것으로 판단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즉 북한은 ‘이석기 사건’을 종북주의자들의 그들(북한)에 대한 ‘짝사랑’ 정도로 보고 있고, 그래서 북한엔 기분 좋은 일일 수 있지만 남한에선 암초가 되는 것이어서 크게 봐서는 남북관계 정상화에 걸림돌로 평가한다는 것이다.

북한 내부를 잘 아는 또 다른 소식통은 북한이 1994년 김정일 시대를 열어가면서 ‘궁극적인 파트너는 남한’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과 관련해 ‘이석기 사건’을 새롭게 봐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소식통에 따르면 1994년 이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최광 당시 총참모장이 군 엘리트들을 해외에 파견한 것을 비롯해 행정관료 중에도 해외로 내보낸 인원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김일성 시대의 자주ㆍ자조ㆍ자립만으로는 북한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체제 위기가 심각한 수준이었다는 것.

그 후 해외 파견자들이 보고한 내용을 종합한 결과 ‘북한이 공조할 수 있는 상대는 남한뿐’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 1998년 이후 현대그룹의 대북 투자를 비롯한 남북교류ㆍ경협이 본격화하고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나왔다는 게 소식통의 설명이다.

그는 김정일 사후 김정은 체제에서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경제’로, 남한을 궁극적인 파트너로 생각하는 북한이 ‘이석기 사건’과 같은 이념적인 문제로 남북관계의 틀을 깨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더욱이 ‘이석기 사건’은 현재까지 드러난 정황에 비춰 국정원 조사와 검찰 수사로 북한이 심각한 타격을 받을 만한 것이 없을 것으로 보여 남북관계는 이번 사건과 무관하게 순항할 것이라는 게 소식통의 관측이다.

북한과 10년 넘게 거래를 하고 있는 중국의 한 무역상도 “남한에서 ‘이석기 사건’이 큰 화제가 되고 있어 북한 고위층의 얘기를 들어봤더니 논의할 만한 인물이 못 되는 데다 설령 북한과 관련된 부분이 있더라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다”면서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남한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무현ㆍ김대중 정부에 불똥 튈 수

앞서 북한 소식통들은 한결같이 북한이 박근혜정부에 상당한 기대를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들에 따르면 북한은 박근혜 대통령이 ‘민족’을 중시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점과 남북 경협을 강조한 것에 호감과 기대를 갖고 있다.

베이징의 북한 소식통은 “북한이 ‘해방 60년사 정리’에 기준으로 삼고 있는 ‘민족’과 관련해 남한에선 박정희 전 대통령이 ‘민족’을 중시한 대표적 인물로 봐 왔는데 그의 딸이 대통령이 된 것에 호감과 함께 기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북한은 2002년 5월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대화한 것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당시 두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의 7ㆍ4 남북공동성명과 ‘민족’을 화두로 많은 얘기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 2007년 10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서 노 전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이 6ㆍ15회담부터 자주적인 행보...”라고 말하자 김정일 위원장이 중간에 말을 끊으며 “박정희 대통령 때 자주라는 구호가 나오지 않았소?”라고 반문한 사실은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북한의 시각을 드러낸 일화로 알려졌다.

북한 내부사정에 밝은 소식통은 “박근혜 대통령이 남북이 신뢰를 바탕으로 경협과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에 대해 북한은 큰 기대를 갖고 있다”면서 “박 대통령이 언급한 북한판 마셜플랜이라는 ‘한반도 그랜드플랜’에 특히 관심이 많다”고 전했다.

대규모 북한 지원 프로젝트인 ‘한반도 그랜드플랜’에 대해 북한은 박 대통령이 순수 ‘민족’차원에서 추진할 것으로 보고 있으며, 또한 실천력 있게 이행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이러한 북한의 박 대통령과 박근혜정부에 대한 시각은 ‘이석기 사건’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선 ‘이석기 사건’에 대해 북한이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가 관심사다. 북한은 사건 자체뿐 아니라 박근혜정부와의 관계도 고려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석기 사건’에 북한이 연계된 부분이 밝혀지더라도 예전같이 현 정부를 거칠게 공격해 파탄 지경에 이를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오히려 박근혜정부에 도움이 되는 행보를 취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북한이 추진하고 있는 ‘해방 60년사 정리’의 연장에서 노무현ㆍ김대중 정부 때의 남북 관련 일들이 도마 위에 오를 수도 있다.

정국을 뒤흔들었던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 대화록 상의 ‘NLL 발언’ 문제만 해도 대화록 원본이 북한에 있다. 국내에선 대화록 실종, 왜곡 논란이 여전하지만 아직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의 원본 대화록이 공개될 경우 남한의 정치권은 물론, 사회 각 계층에 미치는 후폭풍은 상상 이상일 수 있다.

나아가 남북관계의 새 역사를 쓴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정상회담도 재평가받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남북관계에 정통한 미국의 한 정보통은 “당시 정상회담에는 현대그룹의 해외자금 등 큰 돈이 북한에 들어갔고 이것이 핵개발에 유용된 것 때문에 미 정부가 대단히 화를 냈다”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 직후 미국을 방문했을 때 그 문제가 논란이 됐다”고 말했다.

베이징의 북한 소식통은 “북한의 ‘해방 60년사 정리’에 2000년 남북정상회담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아마 순수하게 ‘민족’ 차원에서 성사됐다기보다 정치적 목적(노벨상 수상, IMF 때 현대 구제 대가 등)도 작용했다고 평가했던 것으로 들었다”고 전했다.

그런 때문인지 북한에서 2000년 정상회담의 주역인 김용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 및 통전부장(2003년 10월 사망), 송호경 아태위 부위원장(2004년 9월 사망) 등이 2003년 ‘해방 60년사 정리’ 시행 직후부터 사망한 것을 두고 뒷말이 무성했다.

이처럼 ‘이석기 사건’이 하나의 공안사건을 넘어 남북 간에 ‘정상관계’ 형성을 위한 ‘걸림돌’제거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라면 제2, 제3의 ‘이석기 사건’이 불거질 수 있다.

그것이 노무현ㆍ김대중 정부 시절 남북관계와 관련된 일이라면 대화록 등의 공개를 주장한 문재인 의원을 비롯한 친노(친 노무현) 그룹과 현 민주당에도 불똥이 튈 가능성이 있다.

지난 5일 이석기 의원이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면서 ‘이석기 사건’에 대한 조사가 본격 시작됐다. 북한과의 연계 여부와 북한의 반응, 이에 따른 남북관계 변화가 주목된다. 이는 ‘이석기 사건’의 후폭풍의 위력을 가늠하는 시금석이기도 하다.



박종진기자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