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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미의 우리풀 우리나무] 밤나무
풍요와 결실을 잉태한 비릿한 꽃내음



장마비가 그치고 나니 사라져 버린 것이 있다. 가까이서 맡아보면 비릿하나 아주 멀리서 언뜻 언뜻 느껴지는 냄새는 분명 그윽한 향기로움이다. 바로 밤꽃 냄새다. 국도를 오가며 곳곳에서 만났던 풍성한 꽃송이들도 이제는 사라졌다. 사람들은 무더위 속에서 휴가를 보내거나 더위에 아랑곳 않고 일을 하며 바쁘게 지내지만, 밤꽃들은 열매로 거듭나기 위해 보이지 않은 곳에서 더욱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래서 더위가 사라지고 나면 파란 가을 하늘 밑으로 탐스럽게 밤송이를 열어 더욱 풍요로운 가을을 만들 것이다.

밤나무는 참나무과에 속하는 낙엽성 큰 키 나무다. 잘 자라면 15m쯤 까지 큰다. 세로로 벗겨 지는 흑갈색의 나무껍질은 깊이 있어 좋고, 한 뼘쯤 되는 길이의 길쭉한 잎새는 시원해서 좋다. 밤나무 잎은 도토리가 열리는 상수리나무 잎과 아주 비슷해서 꽃도 열매도 없는 산속에서 만나면 쉽게 구분하기 어렵다. 한때 내게 이 나무의 이름을 물으면 주변에 작년에 떨어진 밤 껍질이 있나 없나 살펴 보곤 했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두 나무 모두 잎 가장자리에 바늘처럼 뾰족한 엽침(葉針)이 달려 있는데, 밤나무 잎에는 잎을 파랗게 보이게 하는 엽록소가 이곳까지 퍼져 있어 파랗지만 상수리나무의 엽침에는 엽록소가 없어 파랗지 않다.

밤나무의 꽃은 워낙 눈에 잘 띄고, 보이지 않아도 냄새만으로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별나지만 이 나무에 암꽃과 수꽃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술처럼 다북히 길게 길게 늘어져 달리는 것은 수꽃들의 꽃차례이고, 암꽃은 이 수꽃의 꽃차례 바로 밑에 3개씩 달리는데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밤나무 열매는 껍질이 유난히 많다. 그 고슴도치처럼 뾰족한 밤송이를 벗겨 내고 나서도 밤톨의 겉껍질, 그리고 속껍질이 또 나오니 말이다. 밤 알갱이의 속살을 먹기 위한 수고가 너무 많다.

밤은 한자로 쓰면 율(栗)이다. 이는 나무 위에 꽃과 열매가 아래로 드리 워진 모양을 본따 만든 상형문자이다. 일본에서는 밤을 구리라고 한다. 구리는 왔다는 뜻의 래(來)자를 발음한 것인데, 전쟁터에서 이기고 돌아왔다는 뜻이라고 하고, 그래서인지 개선 축하식에는 밤을 쓴다고 한다. 밤을 영어로는 체스트 넛트(Chest nut)라고 한다. 이는 단단한 통에 틀어 있는 견과라는 뜻인데, 가시 같은 밤송이는 아무도 접근하기 어려우므로 이러한 이름이 붙은 것 같다.

밤나무는 그 무엇보다도 맛있는 열매 밤을 생산해서 최고 인기다. 밤을 이용한 먹거리는 무궁무진하다. 가을철 밤에는 가족들끼리 둘러 앉아 삶은 밤을 까서 먹는 재미가 여간 아니다. 겨울 밤에는 군밤 한 봉지 사서는 주머니에 넣고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의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제사 상에 쳐서 올리는 생밤, 밤을 넣어 만드는 약밥은 별식중의 하나이고, 갈비찜을 비롯한 여러 요리에 모양 삼아, 맛 삼아 밤이 들어 간다. 그밖에도 밤으로 만든 음식에는 밤주악, 밤초, 밤죽, 밤떡, 밤다식, 밤단자, 밤경단, 송편의 밤소 등 무궁무진하다. 밤을 말려 껍질을 제거한 황률도 맛이 고소하다. 프랑스에는 마농 글라세(Marrons glaces)라고 하는 유명한 과자가 있다. 밤알을 설탕에 진하게 조려 만드는 이 과자는 세계 3대 명과에 속할 만큼 맛이 좋다.

한방에서는 열매를 율자(栗子) 또는 율과(栗果)라고 하며 밤 껍질이나 밤꽃, 나무껍질도 약으로 이용한다. 밤 자체가 영양가 높은 식품이지만 약재로도 아주 훌륭하다. 꽃에서 따는 꿀도 유명하고. 사당이나 묘에 세우는 위패를 만드는 데는 꼭 밤나무를 쓴다. 그 이유는 알고 보면 참 재미있다. 대부분 식물들은 종자에서 싹을 띄워 내면서 종자의 껍질을 밀고 올라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밤나무는 그 반대로 종자의 껍질이 뿌리가 내려 가고 줄기가 올라가는 그 경계 부근에 오래도록 달려 있다. 과장된 이야기겠지만, 10년 또는 100년 이상 껍질이 달려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밤나무는 자기가 나온 근본을 잊지 않는, 즉 선조를 잊지 않는 나무로 여겨지고 있다. 밤은 자식과 부귀를 상징하기도 한다. 혼례에 밤이 꼭 등장하는 이유다.

근본을 잊지 않고 요모조모 요긴하고 때론 특별하지만 풍성하게 끝을 맺는 밤나무. 밤나무는 작은 일에 너무 집착하는 요즈음 우리보다 낫다 싶다.

입력시간 : 2005-07-29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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