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양성에 올라 무병을 빌고 메밀꽃에 취해 역사를 읽는다禮와 판소리와 역사의 고장, 고인돌은 세계문화유산

[여행] 전북 고창
모양성에 올라 무병을 빌고 메밀꽃에 취해 역사를 읽는다
禮와 판소리와 역사의 고장, 고인돌은 세계문화유산


어느새 가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봄날의 붉은 동백꽃으로 유명한 선운사를 품고 있는 고창은 가을에도 길손을 불러들이는 매력이 넘쳐 나는 고을이다. 무려 20만평에 이르는 공음면 선동리의 메밀밭이 그것이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스치면 한시라도 빨리 메밀꽃으로 뒤덮인 들판에 묻히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고창으로 떠난 나들이에서 고창읍성을 걷지 않으면 왠지 허전하다.

세 번 돌면 무병장수 한다는 고창읍성

"언니, 돌을 이렇게 머리 위에 얹으면 되는 거야?"“응, 성문 앞에 세워진 동상들도 우리처럼 이렇게 했어.”

서울에서 왔다는 어린 자매가 자그마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벽을 걷는다. 언덕 능선을 따라 포근한 곡선으로 휘돌아 가는 튼튼한 성벽엔 점차 붉은 빛으로 변해 가는 담쟁이 넝쿨이 걸려있고, 발 아래로는 고창 읍내의 초가을 풍경이 정겹다. 수백년 전 조선의 여인들도 이렇게 돌을 이고 성벽을 거닐었을 것이다.

고창 읍내에 자리한 고창읍성(사적 제145호)은 조선시대인 1453년(단종 원년)에 외침을 막기 위하여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백제 때 이곳의 지명이 모양현이었던 데서 유래했다.

고창엔 여자들이 돌을 머리에 이고 읍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죽은 후에도 길이 환히 트여 극락으로 간다는 속설이 담긴 성 밟기 풍속이 전해온다.

성 밟기는 4년 만에 돌아오는 윤달, 그 중에서도 윤 삼월에 해야 효험이 많다고 한다.

특히 초엿새, 열 엿새, 스무 엿새처럼 여섯 수가 든 날은 저승 문이 열리는 날이라 하여 다른 지방에서도 많은 여인들이 고창읍성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성을 다 밟은 후에는 머리에 이었던 돌을 성 입구나 안쪽에 쌓았다.

결국 성 밟기는 해빙기에 틈이 생길 수도 있는 성벽을 보수할 때 필요한 돌을 확보하려는 데서 유래한 슬기로운 풍습이었던 것이다. 요즘엔 매년 중양절(음력 9월9일)에 이를 재현하는 ‘모양성제’를 열고 답성 놀이를 한다.

성벽을 돈 뒤 성안 약수로 목젖을 축이고 성문을 나서면 은은한 판소리 가락이 귀를 흐뭇하게 한다. 성문 앞엔 조선 후기에 창극(唱劇) 발전에 공이 큰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 1812~1884)가 말년까지 살던 고택이 있다.

이곳에서 동리는 이전까지 체계 없이 불러오던 광대소리를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가루지기타령’ ‘토끼타령’ ‘적벽가’ 등 여섯 마당의 판소리로 절차를 세우고 가사를 고쳤다. 동리고택 옆에는 동리의 사설집을 비롯해 민족 예술로 승화한 판소리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판소리박물관(063-560-2761)이 있다.

이외에도 고창엔 국내 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자랑거리가 있는데, 바로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린 고인돌이다. 현재 전 세계에서 확인된 고인돌의 수는 5만5,000여기.

이 중 절반 정도인 2만6,000여기가 우리나라에 분포하고 있으며, 고창의 고인돌의 숫자는 2,000기가 훨씬 넘는다. 고창에서도 고인돌이 가장 밀집되어 있는 곳은 죽림리와 상갑리 주변이다.

20만평의 들판을 뒤덮은 메밀꽃

고창읍성과 고인돌군을 둘러본 다음, 고창 읍내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달리면 길은 공음면 선동리 학원농장(鶴宛農場) 메밀밭으로 이어진다. 8월 말이 되면 14만평에 이르는 농장은 벌써 새하얀 메밀꽃으로 점차 뒤덮이기 시작한다.

여인의 곡선을 닮은 호남 땅 특유의 부드러운 구릉을 뒤덮은 새하얀 메밀꽃밭을 보는 순간 누구나 저절로 감탄사를 터뜨리게 마련이다. 올해는 주변의 농가에서도 힘을 합쳐 메밀을 심은 덕에 메밀밭의 전체 면적이 20만평이 넘는다.

학원농장의 메밀꽃은 9월 초순에 절정을 이루지만, 하순까지도 서운치 않게 감상할 수 있다는 게 농장 관계자의 설명이다.

학원농장은 봄에는 보리밭으로, 가을엔 메밀밭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개인 농원이다.

농장을 이처럼 가꾼 주인공은 진의종 전 국무총리의 아들로서 대그룹 이사까지 지냈던 진영호씨다. 그는 어릴 적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귀거래사’를 부르고 1992년 낙향한 뒤 잡목만 무성했던 야산이나 불모지를 개간해 지금의 농장을 일구었다.

메밀밭에서 승용차로 10분쯤 달리면 무장면 소재지에 이른다. 무장(茂長)은 옛날 무송현(武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을 합친 지명이다.

예전엔 현(縣)이 있을 정도로 컸다는 고을이건만, 지금은 탐방객들이 요기할 만한 식당 하나 변변치 않을 정도로 작은 시골마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고을의 역사와 같이한 무장읍성 안에는 객사, 동헌, 진무루 같은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고 성 주변에도 많은 유구들이 흩어져 있다. 이곳은 1894년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의 본격적 시작을 알리는 봉기 현장이기도 하다.

여행정보

숙식: 고창읍내나 무장면 주변엔 가족 여행에 적합한 마땅한 숙박시설이 없다. 선운사 입구나 구시포ㆍ 동호해수욕장 등에는 숙식할 곳이 많다. 학원농장(063-564-9897 www.borinara.co.kr)의 간이식당에선 메밀국수와 메밀묵, 메밀부침개 등을 맛볼 수 있다.

교통: 서해안고속도로 고창 나들목→3㎞→고창읍성→23번 국도(영광 방면)→15㎞→대산면 사거리(우회전)→796번 지방도→8㎞→선동리 학원농장. 학원농장으로 먼저 가려면 서해안고속도로 영광 나들목으로 나와 대산면을 거치면 된다. 수도권에서 3시간30분 소요.


글·사진 민병준 여행작가


입력시간 : 2005-09-06 19:14


글·사진 민병준 여행작가 sanmin@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