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휘몰아치는 사정 한파에 검찰 출신들 사외이사 모시기동국제강 수사 이후 검찰ㆍ고위직 출신 사외이사에 선임총수 재판 기업도 검찰 선호

재계엔 지금 사정 한파가 휘몰아치고 있다. 외풍을 막아줄 '가림막'이 절실할 수밖에 없다. 기업들은 그 해답을 '힘 있는 사외이사'에서 찾고 있는 듯하다. 실제 최근 주주총회 시즌을 맞아 사정 대상에 오른 기업들은 '검찰 출신 모시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물론 전부터 사외이사를 맡아온 경우도 있다. 그러나 새로 영입된 사례도 적지 않다. 사실상 '로비용' 내지는 '방패막이용'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라는 견해가 많다. 지배주주에 대한 견제를 위한 사외이사 제도의 본래 취지에서 벗어난 행태라는 지적이 나온다.

'살생부' 기업 검찰 출신 선임

최근 재계 곳곳으로 뻗어나가는 검찰의 칼바람이 매섭다. 하루 걸러 새로운 기업이 수사대상에 오르고 있는 상황이다. '살생부'에 오른 기업들은 일제히 사정기관 출신들을 사외이사로 선임하고 나섰다. 수사에 대비한 나름의 자구책이라는 분석이다.

동국제강이 바로 그런 경우다. 100억원대 횡령 및 탈세 혐의로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세조사부의 수사를 받고 있는 동국제강은 지난달 27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검찰 고위직 출신의 정진영 김앤장 변호사를 사외이사로 영입했다.

정 변호사는 인천지검장을 끝으로 퇴직한 뒤 김앤장에 몸을 담아왔다. MB정부 시절엔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내기도 했다. 이후 현재까지 김앤장에서 다시 활동 중이다. 정 변호사는 황교안 법무부 장관과 사법연수원(13기) 동기생이기도 하다.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의 수사를 받고 있는 포스코는 선우영 법무법인 세아 변호사가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사법연수원 10기인 선우 변호사는 초대 법무부 감찰관을 지냈다. 2007년 서울동부지검장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검찰의 수사선상에 올라있는 신세계그룹 주력계열사인 이마트도 김성준 전 청주지검 차장검사를 새로 영입했다. 검찰은 회삿돈 일부가 비자금화돼 총수일가의 계좌로 흘러들어간 정황을 파악하고 현재 사실 확인 작업을 벌이고 있다.

총수 재판 중인 기업도 선호

이재현 회장의 횡령·배임·탈세 혐의와 관련해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는 CJ그룹도 검찰 출신 사외이사를 중용했다. CJ오쇼핑과 CJ대한통운도 검찰총장을 지낸 김종빈 화우 변호사와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 출신 최찬묵 김앤장 변호사를 사외이사로 각각 재선임했다.

특히 최 변호사는 2013년 이 회장의 변호인단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대주주 견제라는 사외이사의 본분에서 벗어나 대주주 변호 역할을 한 셈이다. 사외이사가 변호사로서 기소된 대주주를 변호하는 건 상법상 불법은 아니지만 부적절한 행위라는 비판을 받았다.

회삿돈 횡령 등의 혐의로 2012년 1월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구속 중인 최태원 회장의 SK그룹 계열사들도 검찰 출신들을 모았다. SK가스는 김광준 전 서울남부지검 부부장을 새로 선임했고, SK증권은 이승섭 전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부장을 재선임했다.

SK가스의 경우 최근 사정설이 나돌고 있는 상황이다. 2009년 석유공사가 주도한 러시아 캄차카 석유탐사사업에 경남기업 등과 컨소시엄으로 참여한 때문이다. 자원외교와 관련해 검찰 수사가 한창인 경남기업의 다음 차례로 SK가스가 거론되고 있다.

조석래 회장이 조세 포탈 등의 혐의로 1심 재판을 받고 있는 효성그룹은 이번 주주총회에서 김상희 전 법무부 차관을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2007년 3월 주주총회에서 임기 2년의 사외이사로 처음 선임된 후 올해까지 4차례 임기를 연장하게 됐다.

지난해 9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가전박람회(IFA)에서 삼성전자 세탁기를 파손한 혐의로 조성진 홈어플라이언스&에어솔루션(H&A) 사장 등이 기소된 LG전자는 대검찰청 기획조정부장을 지낸 홍만표 에이치앤파트너스 변호사를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홍 변호사의 사외이사 선임 이후인 지난달 31일 LG그룹은 삼성그룹과의 모든 법적 공방을 끝내기로 합의한 상황이다. 다만 업무방해와 재물손괴죄의 경우 피해자의 처벌 의사와 무관하게 기소와 재판이 이뤄져 조 사장에 대한 재판은 계속될 전망이다.

범LG가 3세 구본호 범한판토스 부사장이 최대주주인 레드캡투어도 홍만표 변호사를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과 6촌 관계인 구 부사장은 지난달 한 상장사로부터 투자를 빌미로 한 사기 및 횡령 혐의로 피소돼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땅콩회항 사건으로 홍역을 치른 대한항공의 지주사 한진의 경우엔 사외이사에 한강현 전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를 올해 재선임했다. 현재 땅콩회항과 관련해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은 조현아 전 부사장은 현재 항소심을 하고 있다.

일선 직원도 영입 시도

사외이사는 오너와 관련 없는 외부인사를 이사회에 참가시켜 대주주의 독단경영과 전횡을 사전에 차단하는 제도다. 한국에선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사외이사를 처음 도입해 의무화하고 있다. 자산규모 2조원 이상 기업이 대상이다.

초창기만 해도 주로 학계와 시민단체 인사가 사외이사로 선임됐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특히 박근혜정부 들어 경제민주화에 속도가 붙으면서 관피아 출신의 '힘 있는 사외이사 모시기'에 더욱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최근 재계에 사정정국이 조성되면서 사정기관 출신들을 선호하는 경향은 더욱 짙어지고 있다. 기업들이 사정기관 '신세'를 질 일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 때문이다. '방패용' 내지는 '로비용'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라는 시각이 많다.

한 사정기관 관계자는 "재계에 사정정국이 조성되면 굵직한 공직자 출신들에 대한 스카우트 제의가 끊이지 않는다"며 "이들을 통해 수사 동향 파악은 물론 압력 행사 등 수사기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 기업 입장에선 절실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는 사정기관의 칼날을 막기 위한 '방패막이'가 필요한 대기업과 고액의 연봉을 챙길 수 있는 '자리'를 꿰차고자 하는 관료 출신들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로 해석된다. 대주주 일가의 감시를 위해 도입된 사외이사 제도가 오히려 보호막으로 전락한 셈이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현재 경영감시라는 취지로 대기업에서 사외이사를 선임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며 "대기업들은 이사회가 갖는 무게감을 외부에 과시하고 규제 이슈에 대한 로비 통로 확보를 목적으로 권력기관 출신을 사외이사로 임명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문제는 기업의 '사정기관 출신 선호사상'이 비단 은퇴한 고위자들에만 해당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한 사정기관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검찰 소속의 일선 직원들에 대한 기업들의 러브콜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 목적을 두고 '로비용'이라는 견해가 많다.

한 사정기관 관계자는 "본인을 포함한 주변 일부 직원들이 최근 수사 대상으로 거론되는 기업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며 "착수금 조로 비교적 큰 금액을 먼저 제공하고 이후 내부직원보다 일부 높은 연봉을 받는 게 조건이었다"라고 말했다.

고위 관료 출신 사외이사 선임한 기업 어디?


사외이사제도 부조리 척결 공감대에도 관행 여전


현재 대기업들은 검찰 이외에도 고위 관료 출신 영입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외이사제도의 부조리를 근절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에도 이런 관행은 여전하다. 박근혜정부의 경제민주화 기조와 현재 재계에 조성된 사정정국 때문이라는 시선이 많다.

두산그룹은 최근 주총에서 고위 관료 출신을 대거 사외이사로 영입했다. 두산인프라코어는 한승수 전 국무총리와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 박병원 경총 회장, 김대기 전 청와대 정책실장 등 4명을 신규 선임했다. 두산중공업은 김동수 전 공정위원장을 사외이사로 들였다.

신세계그룹 지주사인 신세계도 공정위 부위원장을 지낸 손인옥 화우 고문을 재선임했다. 계열사인 이마트는 박재영 전 국민권익위 부위원장과 김성준 전 청주지검 차장검사를 새로 영입하고 전형수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을 재선임했고, 신세계인터내셔날은 김문수 전 국세청 차장과 손건익 전 보건복지부 차관, 정진영 전 청와대 대통령실 민정수석비서관 등 3명을 신규 선임했다.

삼성그룹 역시 복수의 고위 관료에게 사외이사 자리를 맡겼다. 삼성중공업은 유재한 전 재정경제부 정책조정국장, 삼성정밀화학은 변동걸 전 서울중앙지법원장을 각각 사외이사로 임명했다. 삼성생명은 박봉흠 기획예산처 전 장관과 김정관 지식경제부 전 차관을, 삼성SDI는 노민기 노동부 전 차관을 사외이사로 각각 재선임했다.

현대차그룹에선 현대자동차가 이동규 전 공정거래위원회 사무처장과 이병국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을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했고, 기아자동차는 이귀남 전 장관 외에 김원준 김앤장 고문을 재선임했다. 현대글로비스는 이동훈 전 공정위 사무처장과 석호영 전 서울지방국세청 국장을 선임했다.

SK그룹 역시 관료 출신 사외이사로 선택했다. SK텔레콤과 SK C&C가 이재훈 전 지식경제부 2차관과 하금열 전 대통령실장을 각각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했다. 또 SK이노베이션은 김대기 전 청와대 경제수석에 사외이사를 맡기기도 했다.



송응철 기자 sec@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