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총수 일가 '손가락 경영' 제동 걸까… 삼성·현대차 시험대에

지난해 7월17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위한 임시 주주총회를 마친 뒤 열린 기자간담회 모습. 삼성은 통합 삼성물산 합병으로 생긴 순환출자 고리를 3월까지 해소해야 한다. 사진=데일리한국 장동규 기자
삼성, 통합 삼성물산 출범으로 탄생한 순환출자 해소해야
현대차, 순환출자 처분 못해 '위기'
롯데, 지난해 350여개 순환출자 고리 해소
순환출자 규제 한계… 총수 일가 지배력 여전히 강해
소액 주주 권한 강화, 사외이사 통한 감시 철저해야
"관련법 통해 시장 압력 높이는 사후 규율 바람직"

그동안 순환출자는 경제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첫 번째 과제. 혹은 재벌 개혁을 이루기 위해 필수적으로 선결해야 할 대상으로 꼽혔다. 이러한 순환 출자가 국내 대기업에서 점차 자취를 감출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의 순환출자 고리를 끊기 위한 순환출자금지법이 첫 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대상자는 재계 1ㆍ2위인 삼성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이다. 삼성그룹은 지난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을 통해 새로 생긴 순환출자 고리를 오는 3월까지 해소해야 한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순환출자금지법 시행 이후 처음으로 제재를 받을 수도 있게 됐다. 현대차는 공정위로부터 지난 연말 현대제철과 현대하이스코의 합병에 따라 강화된 순환출자 지분을 처분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촉박한 시일 때문에 처리하지 못했다. 현대차는 기한을 늘려달라고 요청했으나 공정위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졌다.

순환출자금지법은 대기업 총수 일가가 소수 지분만을 갖고도 대기업 전체를 지배하는 사태를 막기 위한 의도도 담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순환출자법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순환출자금지법만 갖고 총수 일가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순환출자는 총수일가가 기업을 지배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삼성, 순환출자 금지법 적용 '첫 시험대'

현대자동차그룹 역시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하라는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소를 받았다. 사진=한국미디어네트워크 자료
순환출자란 대기업집단이 'A사→B사→C사→A사'처럼 순환형 구조로 지분을 보유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구조를 통해 총수 일가가 소수의 지분만 갖고도 그룹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손가락 경영'이 가능하다는 문제가 제기돼 왔다.

이에 따라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해 7월, 자산이 5조원 이상인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대기업 집단)의 경우 새로운 순환 출자 고리를 만들거나 기존 고리를 강화할 수 없도록 규정했다.

공정위는 지난해 12월 28일, 합병 관련 신규 순환출자 금지 제도에 대한 법 집행 지침을 마련했다. 공정위 측은 "이번 지침은 삼성 소속회사인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과 같이 향후 합병을 통해 다양한 순환 출자 변동이 나타날 수 있어 법 집행의 통일성 및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자 마련했다"고 밝혔다.

현재 공정위법에 따르면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소속회사의 순환출자를 형성하는 계열 출자를 금지하고 있으며 기존 순환출자 기업집단은 인정하되, 추가적 계열출자만 금지하고 있다.

다만 합병에 의한 경우는 곧바로 순환출자 금지 위반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유예ㆍ적용 제외 사유에 해당한다. 사업 구조 개편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순환출자에 대해선 예외를 인정하며 정상적인 기업구조 조정에 대한 부담을 최소화한다는 취지다.

합병에 의해 순환출자를 형성, 강화하는 계열 출자에 대해선 6개월의 처분 유예기간이 부여된다. 이 때 처분 주체는 순환출자를 형성, 강화하는 계열 출자를 한 회사이나 순환출자고리 내 다른 계열출자를 처분해 그 순환출자 자체가 해소된 경우에는 처분 의무가 없다.

공정위는 순환출자 금지와 관련해 세부적 사항을 정함으로써 기업 합병 과정에서의 신규 순환출자 발생 여부를 면밀히 검토하고, 법 위반 행위가 발생할 경우 관련 법에 따라 조치할 계획이다.

삼성은 이번 공정위 순환출자법이 적용되는 첫 번째 사례가 됐다. 공정위는 삼성그룹이 제일모직과 옛 삼성물산을 합병시키는 과정에서 순환출자 고리가 강화됐다는 판단을 내렸다.

공정위는 지난 해 12월 27일 "제일모직과 옛 삼성물산의 합병으로 삼성그룹의 순환출자 고리가 총 10개에서 7개로 감소했지만 이 가운데 3개 고리는 오히려 순환출자가 강화된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SDI→제일모직→삼성생명'으로 이어졌던 삼성그룹의 순환출자 고리가 '합병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SDI→합병삼성물산'으로 강화된 것으로 봤다. 또 '삼성화재→삼성전자→삼성SDI→제일모직→삼성생명→삼성화재'로 이어졌던 순환출자는 '합병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화재→삼성전자→삼성SDI→합병삼성물산'으로 강화됐다고 판단했다. 기존 순환출자 고리의 바깥에 있어 별개였던 옛 삼성물산(소멸법인)이 제일모직(존손법인)과 합병한 이후 고리 안으로 들어오면서 순환출자가 강화됐다는 것이다.

반면에 '삼성물산→삼성전자→삼성SDI→삼성물산'으로 이어진 기존 순환출자는 고리 바깥에 있던 제일모직이 합쳐지면서 '합병삼성물산→삼성전자→삼성SDI→삼성물산'으로 순환출자가 강화됐다.

공정위는 삼성그룹이 강화된 순환출자 고리 3개를 아예 없애거나 삼성SDI가 보유한 합병삼성물산 주식 500만주(2.6%)를 처분하는 방식으로 합병에 따른 추가 출자분을 해소해야 한다고 밝혔다. 강화된 순환출자 해소 시한은 합병삼성물산 출범일인 지난해 9월 1일 기준으로 6개월째인 3월 1일이다. 삼성그룹이 기한 내 순환출자 문제를 해소하지 못하면 공정위는 주식 처분 명령 등 시정조치와 함께 법 위반과 관련한 주식 취득액의 10% 이내에서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삼성이 강화된 순환출자 고리를 풀려면 오는 3월 1일까지 삼성SDI 보유 합병삼성물산 주식 500만주(지분율 2.6%· 지난해 12월 24일 종가기준 7275억원어치)를 처분해야 하기 때문에 주가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일단 공정위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입장을 보였으나 다만 이를 시행하는 데 시간이 두 달밖에 남지 않아 유예기간 연장을 요청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 순환출자 고리 끊기에는 '촉박한 시간'

재계 2위인 현대자동차 또한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공정위는 지난해 12월 24일, 현대자동차그룹에 현대제철과 현대하이스코의 합병으로 강화된 순환출자 고리를 해소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공정위는 삼성 측에 통합 삼성물산 합병에 따른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라고 지시한 같은 날 현대차에게도 통보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유예 기간에는 차이가 났다. 통합 삼성물산의 경우 지난해 9월 1일 출범해 2개월여의 시간이 남은 반면, 현대차그룹은 통합현대제철의 출범일이 7월 1일이라 당장 순환출자 구조를 해결해야 한다는 과제를 떠안게 됐다. 이에 따라 공정위가 시한을 너무 급박하게 잡은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현대제철(존속법인)과 현대하이스코(소멸법인)의 합병으로 현대차그룹의 순환출자 고리는 6개에서 4개로 줄었다. 그러나 2개 고리의 순환출자가 강화됐기 때문에 현대차(574만6000주·4.3%)와 기아차(306만3000주·2.3%)가 각각 추가 취득하게 된 통합현대제철 주식 881만주를 팔아 순환출자 고리를 과거와 같은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는 게 공정위의 판단이다.

이에 대해 현대차 그룹은 공정위에 순환출자 해소 기간을 유예해달라고 요청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공정위는 새해부터 현대자동차 제재 절차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공정위는 현대차가 10월 말경 법 위반 가능성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해소 절차를 밟지 않았다고 보고 노력이 부족했다고 판단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형제간 경영권 분쟁으로 재계를 시끄럽게 했던 롯데는 국내 대기업 중 가장 많은 순환출자 고리를 갖고 있다. 롯데는 4월말 무려 459개의 순환출자 고리를 갖고 있었으나 6개월 만에 349개 순환출자 고리를 모두 해소해 현재는 67개를 갖고 있다. 롯데는 지난해 8월, 신동빈 회장의 사재 출연을 통한 계열사 주식 매입으로 140개 고리를 해소했으며 10월에는 호텔롯데가 롯데쇼핑 등 3개 계열사 보유 주식을 매입함으로써 209개의 고리를 추가로 끊었다. 호텔롯데는 롯데쇼핑이 보유하고 있던 롯데알미늄 주식 12.0%, 한국후지필름이 보유하고 있던 대홍기획 주식 3.5%, 롯데제과가 보유하고 있던 한국후지필름 주식 0.9%를 매입했다. 호텔롯데가 3개사가 매입하는 총 주식수는 12만 7666주, 총 매입금액은 1008억원이다.

신동빈 롯데 회장은 지난해 8월, 경영권 분쟁에 대한 대국민 약속에서 투명 경영을 위해 '그룹 순환출자고리 80% 해소'를 해결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삼성(7개), 영풍(7개), 현대차(4개)에 비하면 여전히 많다.

오너가 영향력, '여전히 그대로'

순환출자금지법은 2013년 12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공정위는 순환출자금지법에 대해 순환출자와 관련한 규제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고 시장 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대기업 집단 규율 체계의 큰 틀을 구축할 것이라 밝혔다. 또 신규순환출자를 통한 부실계열사 지원 및 기업 집단 동반 부실화, 과도한 지배력 유지ㆍ확장, 경영권의 편법적 상속ㆍ승계 등의 폐해를 차단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공정위가 기존 순환출자 뿐만이 아니라 신규 순환출자까지 엄격한 규제의 잣대를 들이댐으로써 대기업의 순환출자 해소는 이제 '시간문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순환출자금지법의 첫 번째 적용 사례는 삼성그룹이 됐으나 현대차가 기한 내에 계열사 간 순환출자를 해소하지 못함으로써 첫 위반 사례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높아졌다.

순환출자 고리를 끊는 것의 핵심은 오너가가 소수 자본만을 갖고도 대기업 전체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가 무색하게 재계는 순환출자 고리를 끊더라도 오너가의 '파워'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2월 경제개혁연구소는 '재벌의 순환출자 현황과 정책적 시사점' 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를 통해 2015년 4월 기준으로 공정위가 발표한 11개 재벌그룹의 순환출자 현황을 각 그룹별로 분석하고 순환출자를 해소할 경우 총수일가의 지배권이 얼마나 약화되는지를 검토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롯데, 대림, 영풍그룹은 순환출자를 해소해도 지배권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손쉽게 순환출자를 해소할 수 있다. 삼성그룹과 현대백화점그룹의 경우 순환출자 해소 후 지배주주 및 특수관계인, 자사주가 약 30~40%대 수준으로 순환출자 해소 전보다 지분이 낮아지지만 지배권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다만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 현대산업개발은 순환출자가 그룹 지배권 유지의 핵심으로 지적됐다. 이들의 순환출자를 해소하기 위해선 단순한 지분 매각이 아닌 그룹 전체 소유구조 개편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김상조 한성대학교 교수는 "순환출자 해소는 다단계 교체 출자의 한 단계일 뿐이다. 순환출자 해소는 소수 자본이 다수 자본을 지배할 수 있는 여러 방법 중 하나일 뿐이지 무조건적인 해결책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순환출자금지법이라는 현행 제도가 완전무결한 해결책은 아니라는 것 또한 문제다. 한국개발원은 현행 순환출자금지법으로는 금지할 순 없으나 실제로는 정책 목적에 위배되는 경우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한국개발원은 대기업들이 우회출자를 통한 가공의 의결권 확보, 계열사 지분과 자사주 교환을 이용한 가공의 의결권 확보, 비계열 우호기업을 통한 순환출자고리의 형성 등을 이와 같은 사례로 꼽았다. 또 현행 제도로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있어 한계가 생길 수 있다고 밝혔다. 마치 순환출자금지법을 통해 오너일가의 편법적 승계, 더 나아가선 경제민주화까지 이룰 수 있는 것처럼 보도됐지만 실상은 보완해야 할 점 이 많다는 것이었다.

재계 관계자는 "롯데그룹이 형제의 난을 겪으며 350여개의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했지만 그 과정에서 신동빈 회장의 그룹 영향력은 전혀 약화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경제개혁연구소는 2015년말 기준으로 순환출자가 재벌그룹 소유 지배구조의 핵심적 문제라는 일반적 통념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 확인됐으므로 재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또 다른 대안을 세워야 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총수 일가의 높은 지배력으로 발생할 수 있는 각종 대기업 관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어떤 제도가 생겨야 할까. 전문가들은 순환출자 해소보다는 총수 일가를 제외한 소액 주주의 권한 강화, 사외이사 제도를 통한 감시를 철저히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상조 교수는 "공정거래법으로 대기업 총수 일가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법안을 내기 보다는 상법과 자본시장법을 통해 시장의 압력을 높이는 사후 규율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지금과 같은 불황에서는 오히려 순환출자금지법이 대기업에게 지나친 규제가 될 수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효과적 사업 재편을 위해 실시한 계열사 합병으로 발생한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느라 자칫하면 기업의 경쟁력이 약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명지 기자 mjlee@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