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사고 겪은 노동자에 1700만원 쥐어주며, 잇단 권리 포기하라니

사고 피해 노동자 측에 손해배상금 지급하며 ‘갑질 조건’ 제시해 왔던 건설업계

서희건설, 추락사고 겪은 노동자에 1700만원 제시하며 향후 손해배상청구권 포기 조건 제시

법원 “합의금액, 향후 발생한 손해보다 부족하면 손해배상청구권 포기했다고 볼 수 없어”

건설현장 노동자들이 사측 과실에서 비롯된 안전사고를 당하더라도, 납득할 만한 손해배상금을 지급받으며, 더 많은 권리를 사측에 양보하는 경우가 관행처럼 존재해 왔다. *위 사진은 기사에 나온 사례와 관련 없음* (사진=연합)
한민철 기자

공사현장에서 끔찍한 사고를 겪은 노동자에게 소정의 손해배상금을 제시한 뒤, 향후 손해배상청구권 및 소송제기 포기 등 노동자 측에 불리한 조건을 내거는 건설사들이 업계 안팎에서 문제가 됐었다. 과거 서희건설도 이런 일로 노동자 측 유족들과 법정다툼을 벌였고, 납득할 수 없는 액수의 배상금으로 더 큰 권리를 포기시키려 했던 사실이 최근 뒤늦게 밝혀졌다.

건설현장에서 사측의 안전의무 불이행 문제로 현장 노동자들이 안전사고를 당하게 된다면, 해당 노동자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업무상 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에 피해 노동자는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요양·보험급여를 받을 수 있다. 물론 사측의 불법행위로 인해 비롯된 재해로 민법 제756조 ‘타인을 사용해 어느 사무에 종사하게 한 자는 피용자가 그 사무집행에 관해 제3자에 가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조항에 따라, 당연히 사측에게 그 노동자가 입은 피해만큼의 배상 책임도 생긴다.

때문에 과거부터 건설사들은 사측 과실로 사고를 당한 노동자들에게 일정한 금액을 손해배상금 또는 위로금 형식으로 지급했는데, 오히려 이로 인해 사측과 피해 노동자 간의 심각한 갈등으로 이어지는 사례도 일부 있었다.

건설사 측이 피해 노동자 측에 손해배상을 하면서 ‘조건’을 내걸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사측의 과실로 입은 피해에 대해 금전적으로 보상을 하겠지만, 향후 해당 사고에 대한 추가적인 손해배상을 요구한다거나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등의 조건이 그것이다.

정작 사측은 피해 노동자를 위한 손해배상금이라고 말하지만, 내면에는 ‘조건이 달린 합의금’에 불과하다는 설명이다.

사고로 급전이 필요한 노동자들은 사측으로부터 받은 손해배상금의 액수가 합리적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당장의 시점에서 판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건설현장에서 사고를 입은 이들의 대부분은 ‘후유증’이라는 것이 남아 병이 재발하거나 향후 합병증이 몰려 올 가능성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때문에 사측에 더 이상의 손해배상을 요구한다거나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등의 조건에 합의해 이미 손해배상금을 받은 상태에서, 사고 후유증으로 다시 고통을 겪을지라도 추가적인 금전적 책임을 요구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는 대법원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례를 남긴 바 있다. 지난 1991년 4월 9일 그리고 2001년 9월 4일 내려진 대법원 판결(90다16078, 2001다9496)에 따르면,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에 관해 가해자인 사측과 피해자인 노동자 사이에서 피해자가 일정한 금액을 지급받고 그 나머지 청구를 포기하기로 합의가 이뤄졌을 때는 그 후 그 이상의 손해가 발생했다고 해서 다시 그 배상을 청구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자가 사측 과실로 인한 안전사고를 당했다면, 노동자들이 사고를 당했을 당시와 향후에도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 *위 사진은 기사에 나온 사례와 관련 없음* (사진=연합)
그런데 대법원은 앞서 언급한 사측의 경우처럼 해당 판례에 대해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만약 사측과 노동자 사이 손해의 범위를 정확히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손해배상금 전달 및 향후 손해배상청구권 포기 등의 합의가 이뤄진 것이라면, 앞으로의 다른 손해가 합의 당시의 사정으로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부분 배상청구권까지 포기했다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대법원은 “당사자가 합의 당시 금액으로는 화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할 만큼 후발손해가 중대하다면 (화해 당시) 배상청구권을 포기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정리해보자면 노동자가 사측 과실로 인한 안전사고를 당했고 사측이 해당 노동자에 더 이상의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합의해 손해배상금을 전달했다고 할지라도, 향후 해당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비롯된 다른 손해가 합의 당시 손해배상금으로 감당할 수 없다면 노동자가 향후에도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때문이 이를 두고 사측과 노동자 간의 갈등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있었다. 사측은 손해배상금을 제시할 때 조건으로 내걸었던 손해배상청구권 등의 포기를 이행하며, 합의 당시의 손해배상금이 향후 추가 손해에 대해 충분히 배상할 수 있을만한 정도의 액수라고 주장한다.

반면, 안전사고 피해 노동자들은 사측이 향후 발생할 손해에 대한 배상액수까지 고려하지 않은 채 ‘소액’의 손해배상금을 제시해 놓고, 노동자들의 향후 손해배상청구권 및 민형사상 소송권까지 사실상 박탈해 가는 꼼수를 부린다고 지적하고 있다.

공사현장 안전배려의무 위반했던 서희건설

국내 건설업계 중 지역주택조합 사업 부문 1위로 알려진 서희건설도 위와 같은 문제로 노동자 측과 큰 갈등을 겪은 사례가 있었다.

서희건설은 지난 2000년대 초중반 경기도 남부에 위치한 한 주상복합을 자체 발주해 공사를 진행 및 완공한 바 있다.

그런데 당시 완공을 앞둔 시기, 공사현장에서 작업 중이던 서희건설 소속 근로자였던 A씨는 건물 3층 외벽에 외부조형물을 부착하기 위한 사전작업을 진행하면서 끔찍한 사고를 겪었다.

A씨는 건물 외벽 콘크리트타설 부위의 청소 및 시멘트도포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 콘크리트타설을 위해 설치된 타설기계호스가 압력으로 분리되면서 그를 충격했고, 결국 10미터 아래로 추락했다.

A씨는 기적적으로 살았지만, 경막하혈종과 양측구관절심부열 등의 중상을 입었고 업무상 재해로 판정받아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보험급여를 받았다.

그는 경막하혈종으로 인한 두 차례의 뇌수술을 받았고 치료를 지속했지만 사고 발생 10개월 후, 우울증과 기억력장애, 시력 저하 등의 후유증이 찾아왔다.

이에 A씨는 건설현장에 복귀하지 못했고, 대학병원에 입원해 사고로 인한 기존 치료와 병행해 우울증과 정신장애, 외상성 치매 등에 대한 요양치료를 받았다.

그렇게 A씨의 치료가 한창이던 사고 발생 1년 9개월이 지난 시기, 서희건설 측은 A씨의 사고가 당시 사측의 안전의무 불이행에 따라 비롯된 것인 만큼 1700만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겠다고 나섰다.

향후 법원을 통해 밝혀진 사실이지만, 당시 서희건설은 A씨의 안전사고에 대한 관리·감독과 동시에, 충분한 작업공간을 마련하거나 근로자들의 추락 및 추락으로 인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안전시설 설치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할 안전배려의무가 있었다.

2017년 서희건설 시무식에서의 이봉관 서희건설 회장. (사진=서희건설 홈페이지)
그러나 서희건설은 이를 다하지 않아 보호의무 또는 안전배려의무를 위반했고, A씨의 추락사고에 대한 배상책임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서희건설 측은 A씨에 1700만원을 건네며, 합의 조건을 내걸었다. 당시 추락사고로 서희건설 측에 대한 일체의 손해배상청구권을 포기하고, 더 이상 서희건설에 민·형사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A씨는 이에 대해 합의했고 서희건설로부터 1700만원을 지급받았다.

이후 A씨는 증상이 더욱 악화됐고 병원으로부터 후유증 관리대상자로 지정, 지속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정신장애 및 기타 장애 6등급을 판정받았다.

당연히 서희건설 공사현장에서 겪은 추락사고에서 비롯된 고통이었고, 건설현장에서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었던 A씨는 결국 사고 발생 9년 8개월 만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A씨는 안타까운 죽음을 수습한 유족들은 서희건설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의 후유증과 자살 모두 추락사고로 인해 비롯된 것이므로 서희건설 측이 이를 비롯해 가족들의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에 서희건설 측은 이미 A씨에 1700만원을 지급한 뒤 향후 일체의 손해배상청구권을 포기하기로 합의를 봤기 때문에 받아들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서희건설, 1700만원이 향후 발생할 후유증까지 배상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

법원은 앞서 언급한 대법원의 90다16078 및 2001다9496 판례를 인용해 서희건설 측이 A씨 유족들에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우선 법원은 A씨가 서희건설과의 금전적 합의 후, 후유증 및 자살까지 이르는 사건들이 서희건설 공사현장에서의 추락사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A씨는 사고 후 친구들과의 교류 단절,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고민이 많았고, 이런 심리상태까지 겹쳐 자살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라며 “추락사고 이후 발병한 우울증 등으로 정상적인 인식능력이나 행위선택능력이 현저히 저하됐고, A씨의 추락사고와 자살 사이에는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밝혔다.

이 사건을 맡았던 수원지방법원은 서희건설 측이 A씨에 건넨 1700만원은 사회통념상 A씨가 추락사고 이후 겪게 될 후유증과 우울증 그리고 자살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까지 전부 포함해 책정한 합의금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서희건설 측 주장처럼 A씨가 사고발생 1년 9개월 후 1700만원을 받고, 손해배상청구권을 포기하는 데 합의했다고 할지라도, A씨가 만약 이후 자신이 겪게 될 일들이 후유증과 우울증 및 자살이라는 것을 알았었다면 ‘겨우’ 1700만원의 합의금으로 서희건설과 화해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번 사건은 단순히 노동자와 건설사 사이의 손해배상 분쟁에서 그치지 않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노동자들이 사고 이후 금전적 문제로 인해 사측의 납득할 수 없을 정도의 손해배상금을 지급받고, 사측에 지극히 유리한 조건에 무턱대고 동의해 줘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서희건설은 올해 중대재해가 가장 많이 공표된 사업장 중 하나로 뽑혔다. (사진=연합)
물론 이런 사측으로부터 사고에 따른 손해배상금 또는 위로금을 가장한 합의금을 제시받고 향후 손해배상청구권을 포기한다는 조건에 동의했다고 할지라도, 해당 합의금이 향후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겪게 된 손해보다 턱 없이 부족했을 경우 법적으로 추가 손해배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점 역시 알아둬야 한다는 목소리다.

한편, 서희건설은 지난 20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중대재해 사업장 등 공개’에서 최근 5년 간 중대재해가 가장 많이 공표된 사업장 중 하나로 선정됐다.

A씨의 끔찍한 사고 이후에도 각 사업장에서 안전사고가 꾸준히 발생해왔다는 의미였다. 서희건설은 안전점검의 날을 선정해 매달 안전사고 예방 노력을 하고 있다고 홍보하고 있지만, 최근 고용노동부의 발표를 통해 여전히 공사현장에서의 안전사고 예방 문제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민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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