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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영’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지다

만 30세 '대우'창업, 30년 만에 재계 2위로······청년 기업가들에 글로벌 경영, 도전정신 새겨
  • 12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병원 별관 대강당에서 열린 고(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영결식에서 부인 정희자 전 힐튼호텔 회장과 장남 김선협 씨가 헌화를 마치고 단상을 내려오고 있다. [연합뉴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며 1980~90년대 ‘세계경영’을 펼쳤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지난 9일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김 전 회장은 만 30세에 창업해 재계 2위까지 대우를 키워낸 ‘샐러리맨의 우상’이었다. 공격적 해외시장 개척은 트레이드 마크였다. 이면에는 분식회계나 정경유착 같은 과거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도 남겼다.
  •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오후 11시 50분 숙환으로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세계경영'을 앞세운 공격적 경영으로 대우그룹을 재계 2위로 키워냈던 고인은 지난해 말 건강악화로 귀국했으며, 그룹 해체 20년 만에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진은 출장길에 오른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모습.
  • 김우준 전 대우그룹 회장이 걸어온 길
만 30세 대우실업 창업, 30년 만에 재계 2위 1936년생인 김 전 회장은 대구의 한 교육자 집안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기고, 연세대학교 상경대를 졸업한 청년 김우중은 학창시절 신문배달, 열무 장사를 하며 동생들을 보살핀 것으로 전해진다. 이병철, 정주영 등 1세대 창업가와 달리 김우중 전 회장은 대학 졸업 후 1960년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에 입사해 경력을 쌓았다.

1966년까지 6년간 한성실업에서 근무한 김 전 회장은 트리코트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씨와 손을 잡고 1967년 자본금 500만원, 직원 5명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하며 ‘샐러리맨 신화’를 쓰기 시작했다. 대우는 대도섬유의 ‘대’와 김우중의 ‘우’를 따서 만든 것으로 전해졌다. 대우실업은 충무로 10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시작했다.

대우실업은 첫해부터 동남아에 의류 원단을 내다 팔며 승승장구했다. 설립 첫해 트리코트(tricot, 경편직 메리야스 편물) 한 품목만으로 당시 우리나라 전체 트리코트 수출의 11.2%에 달하는 58만 달러 수출에 성공했다. 직접 샘플 원단을 들고 대우의 첫 브랜드인 ‘영타이거(young tiger)’를 알렸던 김 전 회장은 동남아에서 ‘타이거 킴’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미국 등지로 시장을 넓혀 큰 성공을 거뒀다.

이후 대우실업은 1968년 수출 성과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1969년에는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호주 시드니) 지사를 세웠다. 1975년 본격적인 종합상사 시대가 열리며 대우의 성장은 가속화됐다.

대우그룹의 성장의 토대를 마련한 그는 중공업과 자동차, 조선, 전자, 통신, 금융, 호텔, 서비스 등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1973년에는 무역부문인 대우실업과 영진토건을 합병해 대우건설을 설립했고, 1976년에는 한국기계(대우중공업),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대한조선공사(대우조선해양) 등 부실기업을 인수해 우량기업으로 만드는 눈부신 성과를 거뒀다. 1980년대에는 앞서 인수한 대우전자와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를 합쳐 대우전자를 그룹의 주력사로 성장시켰으며 무역과 건설부문을 통합해 대우를 설립하고 그룹화의 길에 들어섰다. 뿐만 아니라 에콰도르(1976년)에 이어 수단(1977년), 리비아(1978년) 등 아프리카 시장 진출을 통해 해외사업의 터를 닦았다.

특히 1990년대 동유럽의 몰락을 계기로 폴란드와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자동차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세계경영을 본격화했다.

사업군 중 특히 대우자동차의 성장사는 세계경영의 대표적인 사례다. 김 전 회장은 1979년 새한자동차를 인수 한 뒤 대우자동차의 생산 능력을 연 200만대로 늘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기술이나 디자인에서 독립해 자체 개발 모델을 매년 내놓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당시 국내 자동차 생산량은 100만대에 미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1986년 르망을 출시하는 것을 시작으로 에스페로, 로얄 등 독자 개발 차량을 내놓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는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우즈베키스탄 등 사회주의국가에서 자동차 공장 등을 인수하거나 설립했다.

당시 김 전 회장은 해외 체류 기간이 1년에 280일을 넘길 정도로 해외 사업에 매달렸다.

1998년말 대우그룹 수출액은 186억달러로 당시 한국 수출액(1323억달러)의 14%나 차지했다. 당시 396개 현지법인을 포함해 해외 네트워크가 모두 589곳에 달했고, 해외고용 인력은 15만2000명을 기록했다. 세계 무대로 눈을 돌리자고 강조한 김 전 회장은 “국민 20%가 해외로 나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 국민이 산다”고 강조했다.

1999년 대우그룹의 부도 직전까지 그는 ‘불굴의 기업가’로 통했다. 그는 기업인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국제기업인상’을 아시아 기업인 최초로 받았으며 1989년 펴낸 에세이집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6개월 만에 100만부를 돌파하며 최단기 밀리언셀러 기네스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세계경제포럼(WEF)의 자문위원 중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던 김 전 회장은 외환위기 와중에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김 전 회장은 개척자이자, 일중독자, 승부사 등으로 유명하다. 1977년 대우그룹에 사원으로 입사해 2000년까지 구조조정본부장을 지낸 김우일(전 대우그룹 구조조정본부장) 대우 M&A 대표는 입사 당시 사훈이 ‘도전, 창조, 그리고 희생’이었다며 대우는 별 보고 출근해서 별 보고 퇴근하는 곳으로 유명했다고 회상했다.
김 전 회장은 1990년대 동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심지어 쿠바 등 사회주의 국가까지 뛰어들어 사업을 했다. 1년에 200일 이상 해외에 머무른 것으로 전해졌다. 국내 기업이 해외 현지 사업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보여줬다. 그는 “김 전 회장은 열정적이었고, 가슴도 뜨거웠다”며 “새벽 3시에 기상했던 김 전 회장은 1분 1초가 아깝다며 식사도 빨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선호했고, 대우조선 노조가 파업할 당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의 죽음을 애도하며 모든 걸 내려놓겠다며 눈물을 보였다”고 회상했다.

외환위기에 그룹 워크아웃 그러나 1997년 11월 닥친 외환위기로 김 전 회장의 ‘세계 경영’의 신화도 막을 내리게 됐다. 1998년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의 합작 추진이 흔들렸고, 금융당국의 기업어음 발행 한도 제한 조치에 따라 회사채 발행에 제동이 걸리며 대우그룹은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몰렸다. 1999년 말까지 그룹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인다는 내용의 대규모 구조조정 방안을 내놨지만 1999년 8월 모든 계열사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거대 그룹 대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21조원대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와 9조9800억원 사기대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6월과 벌금 1000만 원, 추징금 17조9253억 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8년 1월 특별 사면됐다.

사면을 받은 김 전 회장은 2010년 이후 베트남으로 건너가 제2의 인생을 설계했다. 수차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려고 애쓴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베트남 현지에서 글로벌 청년 사업가 양성사업((Global Young Business Manager·GYBM)에 주력하며 명예 회복을 꾀했다. 이 사업은 한국 대학 졸업생을 선발해 동남아 현지에서 무료로 취업 교육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베트남·미얀마·인도네시아·태국 등 동남아시아 4개국에서 1000여명의 청년사업가를 배출했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의 해체는 관료들에 의한 ‘기획’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은 2014년 전직 대우그룹 임직원들 500여명이 참석한 ‘대우특별포럼’에서 “방만한 경영을 하고도 구조조정을 제대로 하지 않아 쓰러진 것으로 알려진 대우그룹 해체가 사실과 달리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는 시간이 충분히 지났기 때문에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고 역사가 자신들을 정당하게 평가해 주길 바란다”고 주장하며 울먹이기도 했다.

곳곳에 남아 있는 대우그룹 ‘유산’

김 회장의 별세로 한때 재계서열 2위였던 대우그룹의 흥망성쇠에 다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1967년 대우실업을 창업한 김 전 회장은 창업 10년 만에 1970년대 후반에 현대와 삼성, LG의 뒤를 이어 재계 4위에 올랐다. 1998년 41개 계열사, 600개 해외법인을 거느린 재계 서열 2위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외형을 불려나갔던 김우중 전 회장의 공격적인 경영은 위기상황에서 독이 됐다. 1998년 400%가 넘는 부채비율과 회사채 발행 제한 조치 등으로 급격한 유동성 위기를 맞았다. 1999년 대우그룹 전체가 워크아웃에 들어가며 그룹 전체가 해체됐다.

모기업 대우는 대우건설과 대우인터내셔널로 쪼개지고, 주력 계열사였던 대우자동차는 미국 GM에 매각돼 한국지엠이 됐다. 대우인터내셔널은 포스코그룹에 인수돼 포스코인터내셔널이 됐다.

대우중공업은 기계부문(대우종합기계), 철도차량부문(로템), 조선부문인 대우조선해양으로 분할됐다. 대우종합기계는 두산그룹에 편입돼 두산인프라코어로 사명이 바뀌었고, 대우조선해양은 현대중공업이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 철도차량부문은 1999년 7월 정부 주도로 현대정공, 대우중공업 철도부문과 통합돼 현대의 품에 안겨 국내 유일의 철도차량 제작업체이자 국내 대표 방산업체인 ‘현대로템’이 됐다.

대우 해체 20년을 맞은 올해 ‘대우’라는 이름을 가진 회사는 산업은행이 대주주로 있는 대우건설과 대우조선해양(옛 대우중공업 조선해양부문), 대유위니아그룹에 인수된 위니아대우(옛 대우전자), 미래에셋에 인수된 미래에셋대우(옛 대우증권), 인도타타그룹에 인수된 타타대우상용차가 있다.

하지만 대우그룹 공채였던 대우맨들은 사단법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설립, 매년 창립기념일인 3월22일 기념행사를 열어왔다. 김 전 회장은 2017년 50주년과 지난해 51주년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사단법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는 김 전 회장이 “청년들의 해외진출을 돕는 GY교육사업의 발전적 계승과 함께 연수생들이 현지 취업을 넘어 창업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체계화해달라”는 유지를 남겼다고 전했다.

이종혜 기자 hey33@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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