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짓기 본능과 남자의 질투

[영화되돌리기] 질투는 나의 힘
짝짓기 본능과 남자의 질투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의 시 ‘질투는 나의 힘’의 한 구절이다. 이 때 시인이 말하는 ‘질투’는 부질없는 짝사랑이요, ‘나의 힘’이란 헛된 열망을 품은 어리석은 용기이다.

결국 사랑을 잃은 시인은 사랑을 ‘빈집’에 가두고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을 떠나보낸다.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의 주인공 역시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를 되뇌며 부질없는 열망을 떠나 보낸다. 간혹 제목만 보고 ‘질투는 내 삶의 원동력이겠거니’ 생각하면 영화 내내 열없이 구는 주인공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영화는 간단하게 말해 한 남자에게 두 명의 여자를 빼앗긴 다른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갑자기 애인으로부터 이별을 통보받은 원상. 그는 애인의 변심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새로이 사랑에 빠졌다는 사람이 궁금하져 그가 편집장으로 있는 잡지사에 취직을 한다. 그러는 사이에 그에게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온다. 수의사이자 잡지사 사진기자인 성연은 어딘지 불안하면서도 자유분방한 여자다. 그녀의 매력에 사로잡힌 또 다른 남자인 편집장 한윤식. 원상은 또 한번 사랑하는 여자를 뺏길 위험에 처한다. 하지만 질투의 화신이 될법한 원상이 공교롭게도 편집장의 운전기사 겸 개인 비서일을 맡게 되면서 그가 펼쳐나갈 질투의 행로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빗나간다.

미국의 어느 한 심리학자는 남녀가 질투를 표출하는 대상이 다르다고 말한다. 남자들이 여자의 성적 배신에 분노하는 반면 여성들은 남자의 감정적 배신에 더 분노한다는 것이다. 이는 남녀의 짝짓기 전략에서 나오는 특징인데, 남자는 여자가 다른 정자를 받아들일 가능성을 최소화 해 자신의 종족 번식력을 높이려고 하고 여자는 남자를 오래 붙들어 놓아 아이의 양육에 대한 책임을 지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영화 ‘질투는 나의 힘’에 나오는 원상의 명대사, ‘누나, 그 사람이랑 자지 마요. 나도 잘해요’를 보면 문득 남자의 짝짓기 본능이 느껴진다. 원상은 ‘누나, 그 사람 사랑하지 마요’ 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자가 낯선 남자의 정자를 품는 게 두려웠던 걸까. 원상은 성연과 윤식의 동침이 내내 불편하다.

그에 반해 원상이 실수로 관계를 맺는 하숙집 딸 혜옥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원상에게 차라리 돈으로 보상하라며 악다구니를 쓴다. 자신과 자신이 품었을 그의 아이를 원상이 거두어들이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원상은 한윤식과의 정자 경쟁에서 백기를 들고 나온다. “아내한테도 잘 하고 애인한테도 잘 하면 되지. 마누라한테도 못 하고 바람도 못 피는 인간들보다 백배 낫다”는 한윤식의 말에 원상은 ‘명쾌하다’고 화답한다.

상당한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이 할렘의 소유주가 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전통사회에서처럼 원상은 윤식이 일부다처제 마냥 여성을 독식하는 데 대해 반기를 들지 않는다. 어차피 게임이 되지 않는다고 뇌까릴 뿐이다. 지배욕의 다른 표현인 질투는 어느 사이 순종의 의미를 담고 있는 선망으로 변한다. 결국은 삼각관계의 세 변에서 한 축이었던 여자(성연)가 사라지고 두 남자 사이의 수직관계만이 남게 된다.

영화는 ‘질투’라고 하는 위험하고 열정적인 감정을 밋밋하고 심심하게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우리의 일상에 불쑥불쑥 침투하는 ‘질투’라는 감정이 거칠고 광포한 것만은 아니다. 때론 강자에게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주인공의 질투처럼 지루하고 치사하고 싱겁기까지 하다. 영화 첫 장면에 난데없이 흘러나오는 ‘마카레나’노래처럼 유행(열정)이 사그라졌을 때 생각해보면 왠지 객쩍은 느낌이 드는 것이 이성을 되찾은 질투의 또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정선영 자유기고가


입력시간 : 2003-10-10 17:07


정선영 자유기고가 startvideo@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