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트로트의 황제 세기의 라이벌시대를 열다

[추억의 LP 여행] 나훈아(上)
영원한 트로트의 황제 세기의 라이벌시대를 열다

토속적인 음색과 다이나믹한 창법으로 대중을 사로 았던 나훈아. 남진과 벌였던 세기의 라이벌 전은 한국대중음악사의 한 을 장식했다. 도시적이고 세련된 외모의 남진과는 달리, 투박한 시골 총각 같지만 야성적인 나훈아는 데뷔 때부터 여고생부터 중년 부인에 이르는 폭 넓은 여성 팬을 거느렸다. 때문에 항상 스캔들이 끊이질 않았다. 또한 트로트 가수로는 드물게 작사ㆍ작곡이 가능했던 아티스트였다. 그가 작곡한 ' 갈무리’, ‘ 무시로’, ‘잡초’, ‘영영’ 등은 트로트의 발전적 장르인 '성인 발라드'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분명 한국 대중 음악사에서 빠트릴 수 없는 트로트의 황제로 지금껏 군림하고 있다.

나훈아(본명 최홍기)는 1951년 2월 11일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서 선원이었던 부친(최영석)이 이끄는 평범한 집안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했던 그는 중학교 때는 학교 야구 선수로 활약했다. 고향 뒷산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고등학교를 입학하면서는 말썽을 피우더니, 학교 생활에 흥미를 잃었다. 내친 김에 '가수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 집안의 반대가 거세자 "영도다리 밑에 풍덩 빠져 버리겠다"고 어머니에게 협박을 하고 무작정 상경, 집에서는 버린 자식 취급을 했다. 서라벌예고에 들어간 후에는 사무실 의자에서 새우잠을 자는 고단한 세월을 시작했다. 당시 그는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의 떠꺼머리 총각이었다. 오아시스 전속작곡가 심형섭, 맘모스 레코드 작곡가 오영원 등 여러 작곡가 사무실를 찾아 다니며 가수 데뷔를 꿈꿨다. 결국 오아시스의 사환으로 들어가 회사 마루를 닦고 세숫물까지 떠 바치는 생활을 하며 영양실조에 걸렸을 만큼 배고픈 나날을 보냈다. 절치부심의 시절이었다.

어느 날, 장충동 녹음실에 심부름하러 갔다. 그 날 취입 예정인 가수가 나타나질 않자 주위 사람들의 농담에 이끌려 마이크 앞에 섰다. 노래를 부르자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깜짝 놀란 오아시스 손진석사장은 즉석에서 그의 노래를 타이틀로 음반 제작을 결정했다. 데뷔는 이처럼 우연하게 이루어졌다. 본명 최홍기란 이름은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 '최훈'이라 예명을 지었다가 너무 흔한 이름 같아 ‘ 훈아(羅勳)’로 개명했다. 헌데 사람들이 '나훈아 나훈아'하고 부르면서 ‘ 나훈아(羅勳兒)’로 최종 결정을 했다. 1968년 7월 데뷔 곡 ‘ 천리길'을 발표했다. 히트는 못했지만 “배호와 음색과 창법이 많이 닮았다”며 주목을 받았다. 최대 라이벌이 될 남진은 이때 군 입대를 했다. 몇 개월 후 ‘ 님 그리워'와 ‘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발표, 음반이 10만장이 넘게 팔려 나가 단숨에 인기 가수로 떠올랐다.

당시 나훈아는 하루에 100여 통의 팬 레터를 받았다. 별난 우편물도 많았다. 대구의 한 여성 팬은 '장차 나훈아와의 사이에 날 아기의 기저귀에 옷'이라며 소포를 보내 왔다. 또 부산의 여성팬은 '만나주지 않으면 청산가리를 먹고 죽어 버리겠다'며 협박 편지도 보냈다. 지방의 극장 공연에서는 늘 극성 여성 팬들에게 와이셔츠를 찢기고 손등을 할퀴더니, 심지어는 옷 속으로 손이 들어오는 봉변까지 겪었다. 인기가 높아지면서 대구극장과 시민회관 '워커힐 하니비쇼' 등 8개 극장 쇼에 줄 펑크를 내자 관계자들 사이에서 '안하무인'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그러다 피너스 시스터즈의 멤버 강선희와 스캔들이 터지더니, '바보 같은 사나이'가 표절이란 이유로 방송 금지가 되면서 인기 행진은 잠시 주춤거렸다. 하지만 인기가수 조미미와 히트송 바꿔 부르기로 인기를 회복, 70년 11월 '두 줄기 눈물'로 다시 차트 정상에 올랐다. 또한 70년 12월 김화근 감독의 코미디 영화 '웃겨주시네'에 이어 71년 2월 영화 '폭풍을 몰고 온 사나이'에 출연해 연기 재능도 뽐냈다.

필생의 라이벌 남진이 군 제대로 복귀하자 정상의 가수였던 나훈아는 세기의 라이벌 시대를 맞았다. 최초의 '남진.나훈아 대결'은 71년 7월, 청계천의 국내 최대 살롱무대에서 시작되었다. 살롱측은 의도적으로 두 사람의 대결 무대를 기획했다. 두 가수의 대결을 보기 위해 홀은 인산인해를 이뤘지만 남진의 불참으로 불발탄이 되었다. 세간에 화제가 되자 MBC TV 가요프로 '오색의 화원'에서 두 가수를 초대해 노래 바꿔부르기로 자웅을 겨루게 했다. 이 프로그램을 기화로 두 청춘 가수의 세기의 라이벌 전은 본격화되었다. '나훈아가 판정승했다'는 분위기가 팽배하자 남진은 시민회관 리사이틀무대로 승부를 걸었다. 9월 16일부터 나흘간 펼쳐졌던 '남진 귀국 리사이틀' 공연은 완전 매진이 되더니, 71년 최대 관객 옜澎綏歐沮?세웠다. 이에 발끈한 나훈아는 곧 바로 응수했다. 10월 2일부터 3일간 '나훈아 리사이틀'을 열었다. 나훈아는 의상만 10여벌을 준비하고 '칼춤'에서 고고 춤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선보였지만 관객동원에서는 남진이 완승을 거뒀다.

72년으로 들어서며 서로의 연예활동 하나 하나에도 상대방을 의식하며 견제하기 시작했다. 나훈아는 나이까지 남진과 비슷하게 올렸다. 이번에는 나훈아가 선전포고를 했다. 72년 2월 '나훈아의 꿈' 시민회관 공연. 트로트에 팝송, 통기타를 들고 나와 당시 유행하던 포크송에 전통 북치기와 가극 '갑돌이와 갑순이'를 순서에 넣는 화려한 버라이어티 쇼로 승부를 걸었다. 이에 11개의 영화 촬영으로 눈코 뜰 새 없던 남진은 모든 영화 스케줄을 중단하고 김빼기 작전에 나섰다.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4-03-18 21:06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