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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LP 여행] 백창우(上)
황량했던 삶의 무게 향기를 품은 노래운동가





문학과 음악의 결합을 통해 대중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 가고 있는 싱어-송 라이터 백창우. 그의 초기 노래들은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애창 민중 가요였다. 임희숙의 히트곡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그의 창작곡이다. 노래 동아리 '노래 마을'의 리더였던 그는 80년 말 '노래를 찾는 사람들'과 더불어 민중 가요를 폭 넓은 대중에게 전파시켰던 노래 운동가였다. 네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자 독집 2장을 발표한 포크 가수이고 김광석 트리뷰트 앨범 '가객', 동요 북&송 등 스무 장 가량의 음반을 기획·연출한 음반기획자인 그는 한마디로 표현하기 쉽지 않은 아티스트다.

백창우는 예명이다. 본명은 백남욱. 하지만 사고를 당할 액운이 있다고 해 백남훈이란 이름도 얻었다. 데뷔 때, 제작자 지명길이 그를 '고집 세고 앞뒤 꽉 막힌 소'같다며 벽창우로 부름에 힌트를 얻어 백창우라고 예명을 정했다. 그는 평안도 진남포에서 소학교 교장을 했던 부친 백낙영과 평양신학대를 다닌 신여성이었던 모친 임영신의 7남 1녀 중 막내로 1958월 12월 23일에 의정부에서 태어났다. 조만식 선생을 도와 선전부장일을 했던 부친의 전력 때문에 그의 가족은 공산당을 피해 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월남을 해 수없이 이사를 다녔다. 처음에는 인천 앞 바다 보름도에서 살다가 경기도 의정부로 갔다. 백창우는 빈번한 이사로 친구를 사귈 수 가 없었다. 그래서 형들이 보던 만화, 선데이서울 같은 주간지나 루팡류의 추리소설들을 읽으며 친구를 대신했다. '실수로 덤으로 세상에 나온 늦둥이'인 그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아버지와 전차를 타고 약장수, 서커스 구경을 다닌 풍경으로 가득 차 있다.

3-4살 때 한글을 뗀 그는 신동으로 통했다. 보따리 포목장사 어머니 등에 업혀 어머니가 알려 주는 가게 간판을 보며 한글 공부를 했던 것. IQ 152가 넘는 수재였지만 의정부 중앙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몸이 아파 1년을 쉬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자식들만 양평의 외곽 마을 산밑으로 보내져 외로운 시절을 보냈다. 그의 집안은 정착을 위해 양계장, 참기름 장사, 연탄가게, 쌀장사. 만화가게 등 온갖 일을 다 했다. 집안 사정이 좋아지자 수락산밑으로 이사해 상계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는 2년 반 동안 한 곳에 거주했던 이때를 '자신의 인생 중 가장 화려한 시절'로 기억한다. 이때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어울려 벌이는 놀이나 전래 동요를 처음으로 접했다. 5학년 때 황량한 먼지 들판인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로 또 이사를 갔다. 생계대책이 막막했던 이주민들은 유신 정권 최대의 시위를 터트렸다. 시위구경을 나간 어린 그는 빗속에서 최루탄과 투석전 와중에 한 참외 트럭이 전복하는 걸 보았다. 갑자기 돌을 던지던 사람들이 주린 허기를 채우기 위해 노란 참외를 주워 먹기 위해 몰려 들었다. 이 장면은 평생 그의 뇌리에 박힌 돌이 되었다. 철거민을 위해 생겨난 수진초등학교로 학교를 옮겨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성남 서 중에 들어가며 풍금이 있는 성남 교회의 유치원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문학에 빠져 들었다. 그의 중 3시절은 음악과 깊숙한 연관을 맺은, 일생의 중요 계기였다. 취직을 한 누나가 4,000원 짜리 세고비아 클래식 기타를 생일 선물로 주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난 듯 흥분했다. 학교에서 '8마디 곡 만들어 오기' 숙제를 냈다. 좋아했던 여자 음악 선생님이 그의 곡을 풍금 연주를 하며 “참 좋다. 잘했다”고 칭찬을 했다. 칭찬은 어린 마음에 창작의 물꼬를 터 주었다. 그는 기타와 풍금을 이용해 친구들에게 생일 선물로 곡을 만들었다. 어느 날 전학을 온 교회 동급생에게 풍금을 쳤다. 장난을 치기 위한 엉터리 연주였다. 헌데 진지하게 곡에 대한 느낌을 이야기 해 오자 당황했다. 이때부터 "음악은 장난스럽게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어느 날 교회친구가 만돌린을 연주했다. 처음 보는 악기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친구는 태평동에 살았던 선배 포크가수 한돌의 친동생이었다.

성남 서고에 입학해 음악에 관심을 가지면서 문제아들과 어울려 쉬는 시간이나 방과 후 들에 야전(야외 전축)을 들고 나가 진추하, CCR 등 외국 팝송들과 김민기, 양희은, 이연실, 한대수, 박인희 등 70년대 통기타 가수들의 노래를 접했다. 천일극장 예술제 때 이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 연습도 했다. 하지만 학교 공부가 시시해진 그는 밤을 세워 시와 소설의 습작에 몰두했다. 등굣길의 헌책방 가게에서 몰래 빼돌린 육성회비로 헌 문예지들을 많이 사 탐독했다. 77년, 고3때 아버지가 위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그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위해 아グ孤?해줄 수 없음에 절망했다.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절망감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40일 동안 강원도 탄광촌 등 전국을 돌아 다녔다. 담임 선생의 도움으로 졸업을 했지만 고통에 신음하던 그를 지탱시켜 준 것은 다름 아닌 음악이었다. 다음해 어머니의 희망대로 신학 대학에 들어 갔지만 몇 달만에 그만 두었다. 이때가 1979년. 친구들과 성남 신구대 앞에서 밤에는 포장마차, 낮에는 보따리 책장사를 했다. 제법 호황을 누리던 중 10ㆍ26사태가 터졌다. 군인이 학교를 점령하자 학생들 외상값도 못 받고 망했다. 이 시기에 소설을 쓰는 선배의 소개로 음반 기획자 지명길의 종로3가 사무실에 놀러가 그 동안 쓴 악보와 글을 보여주었다. 지명길은 '제2의 김민기'가 나타났는가 착각할 정도였다. 우선 그의 곡들을 기타를 쳐 마란츠 녹음기로 녹음을 했다. 12월 어느 날, 지명길은 정식 앨범 제작을 제안해 왔다.



최규성 가요 칼럼니스트 kschoi@hk.co.kr


입력시간 : 2004-03-31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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