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기의 골프이야기] 낭중지추(囊中之錐)


제68회 매스터스 대회의 마지막 날이었다. 필자는 골프연습장에 갔으나, 골프 연습은 하지 않고 TV앞에 앉아 볼륨을 완전히 줄인 채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필 미켈슨이 18번 홀에서 티샷을 할 당시, 어니엘스와 8언더파로 공동선두였다. 두 조 앞서 홀아웃한 엘스는 연습 그린에서 퍼팅연습을 하고 있었다. 미켈슨이 티샷한 볼은 불과 10여 분 전 페어웨이 왼쪽에 있는 벙커에 들어갔던 엘스의 볼에는 못미쳤지만 페어웨이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TV를 지켜보고 있었다.

필자는 그 때 사람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골프장에는 핸디가 숨어 있다고 합니다. 파3인 12번 홀과 16번 홀에 있는 연못에 물결이 전혀 일지 않는 오늘 같은 날씨에 오거스타내셔널에서 플레이 하는, 적어도 매스터스 대회에서 우승을 노리는 선수라면, 3언더파를 치는데 전혀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어니엘스는 5언더파를 쳤는데, 미켈슨은 지금 2언더파를 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미켈슨이 마지막 홀에서 버디를 할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미켈슨이 우승할 확률이 매우 높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미켈슨이 우승하였으면 좋겠다고 한마디씩 했다. 그러다가 벙커에서 서드샷을 마친 크리스 디마르코가 주저 없이 미켈슨보다 먼저 퍼팅을 하는 것을 보면서, 그린 주변에 운집해 있던 갤러리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어니엘스보다는 미켈슨이 우승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비슷한 위치에 온그린시켜 놓고 있던 미켈슨의 입장에서 보면 디마르코의 볼은 미켈슨의 볼과 홀 사이의 브레이크를 사전 탐색해 가르쳐주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미켈슨의 볼은 홀컵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미켈슨과 갤러리들은 땅을 박차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필자는 평상시에 사람이 출세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의 태도가 있다고 생각해 왔다. 자기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천거하는 모수자천(毛遂自薦)의 방식과,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이 자신의 재주가 자연스럽게 드러날 때까지 묵묵히 기다리는 소위 낭중지추(囊中之錐)의 태도가 그것이다. 조금 더 부연하면 사마천이 쓴 사기열전 가운데 평원군열전(平原君列傳)에 이런 대목이 있다.

진나라에 포위되어 바람 앞의 등불이 된 조나라 임금으로부터, 초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요청하라는 명령을 받은 평원군(平原君)이, 함께 갈 인재 20명을 선발하던 중 19명은 선발하였으나 나머지 한 명을 구하지 못해 외국에서 인재를 영입하려 하고 있었다. 그 때 모수(毛遂)라는 자가 평원군 앞에 나아와 자신을 데리고 가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평원군이 말하였다.

“지혜로운 선비가 세상에 있는 것은, 비유하면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당장에 그 끝이 드러나 보이는 것이지요. 그런데 당신은 나의 문하에 3년이나 되었는데도 좌우의 사람들이 아직 당신을 칭송하는 일이 없었으며, 또한 나 역시 당신에 관하여 들어 본 바가 전혀 없었소. 그것은 당신께서 재능이 없다는 것이요. 미안하지만 당신을 데리고 가는 것을 삼가하겠으니 양해하시오.”

이때 모수는 대답했다. “신이 비로소 오늘 주머니 속에 있기를 청할 뿐입니다. 만약 저를 일찍부터 주머니 속에 있게 하였다면 곧 자루까지 주머니 속에서 벗어나왔을 것입니다. 아마도 틀림없이 겨우 끝만 드러나 보이는데 그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미켈슨이 우승하는 순간 환호하는 갤러리들을 보면서 미켈슨이 ‘골프계의 낭중지추’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미국인들이 미켈슨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골프를 잘 하고 잘 생기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매우 가정적이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그러니 알고 보면 큰 것과 작은 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셈이다. 다만 보는 사람들의 안목과 수준에 따라 다르게 보일 뿐인 것이다.

입력시간 : 2004-04-22 16:55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