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정서의 멜로디로 음지를 덥혀준 '작은 돌'

[추억의 LP 여행] 한돌 上
한국적 정서의 멜로디로 음지를 덥혀준 '작은 돌'

고집스럽게 한글 사랑을 실천해 온 포크 아티스트 한돌. 전국을 돌며 숨은 노래를 캐 온 그는 조동진과 함께 1980~90년대 언더 가수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다. ‘여울목’, ‘조율’, ‘유리벽’, ‘불씨’, ‘못 생긴 얼굴’, ‘터’, ‘개똥 벌레’, ‘홀로 아리랑’ 등은 당시 한국적 향내를 진동하며 유행했던 그의 주옥 같은 노래들이다. 국토 사랑을 노래하고, 공장 노동자, 시장 상인, 판자촌 철거민 등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언어의 마술사처럼 담아 낸 그의 아름다운 노래들은 혼란스럽던 대중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본명은 이흥건. 하지만 고교 졸업 후 여러 음악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포크 음악에만 전념하려는 의지로 본명을 버렸다. 한돌은 ‘작은 돌의 역할이라도 하자’는 뜻을 지닌 순수 우리말 이름이다.

한돌은 약품 도매업을 했던 부친 이원수 씨와 모친 박정숙 씨의 6남 2녀 중 다섯째로 경남 거제도에서 1953년 1월 30일에 태어났다. 1ㆍ4 후퇴 때 두 명의 형과 누나를 함경남도 영흥에 두고 월남해 남쪽에서 얻은 다섯 형제 중 둘째였다. 늘 북에 두고 온 자식에 미안함이 컸던 부친은 “통일이 되면 북에 두고 온 형을 만나, 잠시 헤어진다는 생각이었지 버린 것이 아니라고 전해달라”는 한 맺힌 유언을 남겼다. 휴전 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그의 가족은 강원도 춘천에 주저 앉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춘천 중앙초등학교 3학년 때 강원도 스케이트 대표 선수로 활약했다는 것. 전국체전에 출전해 8명이 진출한 결선에서 경기내내 1등으로 내달리다 골인 지점을 앞두고 넘어졌다. 분한 마음에 눈물을 쏟는 그에게 선생님은 “끝까지 달려라”고 소리쳤다. 꼴찌로 경기를 마친 그에게 선생님은 오히려 “잘했다. 너는 8등을 했다. 기권을 했다면 꼴지도 될 수 없는 것”이라며 칭찬을 해 주었다. 그는 이 때의 교훈을 인생의 지표로 삼았고 명곡 ‘꼴지를 위하여’를 탄생시켰다. 어린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이 곡 때문에 수 많은 학부모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지만.

그의 부모는 자식 교육이 남달랐다. 좋은 교육 환경을 위해 한돌과 그의 형을 서울로 전학 시켰다. 서울로 전학을 가는 그를 위해 반 친구들이 음악시간에 동요 ‘나뭇잎 배’를 합창으로 불러 주었다. 음악과 인연이 없는 환경에서 성장했던 그가 처음으로 노래에 감동을 받은 순간이었다. 서울 남대문초등학교 4학년으로 전학한 후 라디오를 들으며 공부를 하던 어느날, 마취 주사를 맞고 멍한 상태가 된 것 처럼 펜을 놓고 말았다. 팝송 ‘The End Of The World'의 감미로운 멜로디 때문이었다. 당시 세상이 네모인줄 알았던 순진 무구한 학생이었던 그는 “세상의 끝이라는 제목의 이 노래를 듣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불쌍하게 느껴졌다”고 회상한다.

입시에 몰두했던 그는 덕수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명문 경복중에 합격한 후 바비 빈튼의‘ Mr. Lonely' 등 팝송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고향 누나가 DJ로 일하는 이대 앞 박토리아 다방을 찾아가 판을 닦으며 노래에 빠져 들었다. 영화 감독을 꿈꿀 만큼 영화광이었던 그는 중2 때 또 한 번 음악적 충격을 경험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동네 전파상에서 흘러나왔던 노래가 그를 미치게 했던 것. 전파상 아저씨도 제목을 몰랐던 그 노래가 다시 듣고 싶어 그날 이 후 매일같이 모든 라디오 음악프로와 씨름을 했다. 다시 듣게 되어 뛸 듯이 기뻤던 그 노래는 피터, 폴 & 메리의 ‘500 Miles'. 이 때부터 음반을 모으기 시작하고 점심을 굶어 가며 용돈을 모아 2,000원짜리 합판 기타를 장만했다.

학교예술제 출전을 위해 살롱의 기타리스트였던 친구 아버님에게 속성으로 한달간 기타를 배웠다. 하지만 예술제에서 미역국을 먹자 실망이 컸던 한돌은 그 때부터 공부는 뒷전에 두고 기타에 몰입했다. 기대가 컸던 아버지는 아들이 낙제를 하자 실망이 대단해 기타를 부쉈다. 어렵게 경복고에 진학했지만 대학 진학보다는 음악을 택했다.

정식은 아니었지만 화성학 공부을 하며 창작의 물꼬를 튼 것은 고 2때. 12절의 긴 노래 ‘눈’은 첫 창작 곡이었다. 후에 이 노래는 6절로 줄여 취입을 했다. 이 시절 ‘빛을 잃은 별’ 등 곡 하나를 만들면 자아 도취에 빠졌던 순수했던 시절이었다. 학교에서 제법 노래 잘하는 친구로 소문이 난 그는 71년 김진성 PD에 이끌려 박인희가 진행하던 CBS라디오의 ‘세븐틴’에 출연을 했다.

당시 부친이 부도를 당해 가세가 기울면서 무허가 건물에서 냉면집을 열었고 성남에서 조그만 약방을 운영했다. 고교 졸업 후 경제적으로 궁핍했지만 그에겐 황금 시절이었다. 노래 작업?위해 사방으로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었기 때문. “그 때 내 친구는 햇살, 바람, 비 그리고 술 등 넷이었다. 신기하게도 자연과 소통이 되던 시절이었다.”

어느날 환경이 척박했던 광주 대단지의 구석 구석을 돌아 보면서 노래를 지었다. 바로 1980년대에 운동 가요로 사랑 받았던 ‘못생긴 얼굴’. 이 시절 집을 나와 경기도 부천에서 월세 5,000원짜리 초가집에 기거했던 그는 웃지 못 할 사건에 휘말렸다.

반공 정신이 투철했던 당시 마을 주민의 신고로 간첩으로 몰렸던 것.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기타가 살림의 전부이고 더욱이 집을 수리할 돈이 없어 방안에 텐트를 치고 살았기에 오해를 받기에 충분했다. 그는 “완전 무장한 예비군들이 몰려와 집을 에워싸 포승 줄에 묶더니 잡아 갔다”고 웃는다. 이후 중풍에 걸린 아버지를 대신해 성남 약방을 지키게 되면서 그의 자유롭던 시대는 끝났다.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5-03-02 15:33


최규성 가요칼럼니스트 kschoi@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