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기의 골프이야기] 토마스 모어의 재판


파3인 홀인데 티잉 그라운드에서는 퍼팅 그린의 일부와 그에 인접한 코스부분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그린 뒤쪽에는 벙커와 물이 말라 있는 해저드가 있었고 페어웨이도 있었다. 한 플레이어가 티샷을 하였는데 볼이 그린 뒤쪽으로 넘어가 어디에 멈추었는지 알 수 없었다. 플레이어들이 그린에 가서 보니 때마침 한 꼬마녀석이 손에 볼을 쥐고 달아나고 있었다. 그러다가 꼬마녀석은 볼을 뒤로 던져 주었는데 확인하여 보니, 그 플레이어의 볼이 틀림없었다. 이런 경우 플레이어는 다음 스트로크를 하기 위해서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까.

우선 골프판례집을 들어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경우 정지하고 있는 볼이 국외자에 의하여 움직여 진 것으로 보아 다음 스트로크를 하기 위해 볼을 리플레이스하여야 할 것이지만, 리플레이스할 장소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형평의 원칙에 따라 플레이어는 볼이 원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지점에서 가장 나쁘지도 않고 가장 유리하지도 않은 적당한 곳에 리플레이스하고 다음 샷을 하면 된다고 한다. 만약 꼬마녀석이 볼을 가지고 도망간 채 영영 볼을 돌려주지 않아 꼬마녀석이 가지고 간 볼이 플레이어의 것임이 확인되지 않았다면, 플레이어는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할까. 그러한 경우에는 플레이어의 볼은 분실구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이 골프판례집의 태도인 것 같다.

한편, 인구에 회자되는 최고의 명판결은 솔로몬의 재판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필자는 대학을 다닐 때 읽은 책에서, 중국의 어느 법철학자가 솔로몬의 재판에 견줄만하다고 이야기한 판정을 본 기억이 난다. 토마스 모어경이 자기부인과 거지 사이에서 진정한 개 주인을 가려주었다는 내용이다. 그 줄거리는 대충 다음과 같다.

토마스 모어경의 부인은 무척이나 개를 좋아했었다. 한번은 개 한 마리를 선사받았다. 실은 그 개는 어떤 불쌍한 거지여인에게서 빼앗아 온 것이었다. 이 불쌍한 걸인이 어느 날 모어 부인을 시중드는 한 남종이 이 개를 데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 반환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반환요구는 거절당하고 그래서 서로 뺏니 안 뺏기니 하는 싸움이 벌어졌다. 토마스경이 이를 알고 마침내 자기 부인과 거지여인을 방에 불러 놓고 일렀다.

“부인 당신은 주인이니 이 방 윗목에 가서 앉고, 당신은 손님이니 아랫목에 가서 앉으시오. ”

그리고는 자기는 개를 안고 그 중간에 서서 다시 말했다.

“두 사람은 이 개의 이름을 불러 서로 자기에게 오라고 해 보시오. 누구에게든지 개가 가는 쪽이 개의 임자가 될 것이오. ”

그리하여 개가 거지여인에게 가자 그는 거지여인에게 그 개를 갖도록 하였다. 다만 그 여인에게 돈을 주고 개를 다시 사서 자기 부인에게 선물하였다.

이 재판을 소개한 법철학자는, 토마스경의 재판에 깔려 있는 재판의 기준은 형평법이라는 것이며, 형평법이란 다름 아닌 조화의 관념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 조화의 관념이란,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규율이 천하를 지배하고 있던 시절 형수가 하천에서 익사하려고 할 때에도 형수를 구하기 위하여 형수의 손을 잡아서는 안 되느냐고 묻는 제자에게 “네가 만약 손을 대지 않는다면 너는 사람이 아니고 짐승과 같다”고 대답하는 맹자의 태도에 살아 있는 정신이라고 덧붙이고 있었다.

그 형평법이 골프규칙 제1조제4항에 들어와 있다. 앞서 본 사례의 판정기준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축구, 농구, 야구 등 심판이 있는 여타의 스포츠경기에서 판정시비를 종종 보게 된다. 그렇지만 심판이 없는 골프경기에서는 여지껏 판정시비로 인한 불상사가 없었다. 왜 그럴까. 필자는 그 이유를 최고의 기준인 형평법을 골프규칙이 원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소동기 변호사·골프 칼럼니스트


입력시간 : 2005-05-12 15:57


소동기 변호사·골프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