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너야" 예고 살인에 떤다

연쇄 살인 장르의 규칙은 일견 뻔하게 보일 때가 많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살인이 연이어 발생하고 의문투성이 사건의 배후를 추적하던 형사들은 일련의 죽음들 사이에 공통점을 찾기 위해 골몰한다.

당연히 형사들은 예상치 못한 장벽에 부딪히고 또 당연히 그 난관을 척척 헤쳐가며 마침내 살인자의 정체를 밝혀내고 만다. 살인의 대상이나 정황, 수법 상의 유사성이 문제 해결의 단서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특성 때문에 연쇄 살인 스릴러는 복잡한 게임의 실타래를 한 올씩 풀어가는 재미에 비견되기도 한다.

멀게는 <세븐>, 가깝게는 <오로라 공주>가 이 같은 장르의 규칙을 제식대로 요리한 영화들이다. <6월의 일기> 역시 이 같은 연쇄 살인 스릴러의 공식을 순서대로 따라간다.

내 죽음을 기억하라

추적추적 비가 오는 어느 날 밤 한 고등학생이 육교에서 흉기에 찔린 채 살해당한다. 연이어 같은 학교 학생이 투신 자살을 가장해 살해당한다.

강력계 형사 추자영(신은경)과 그의 파트너 동욱(문정혁)은 피살자들의 위장에서 나온 날짜와 살인 대상이 적힌 ‘예고 살인 일기’를 바탕으로 사건을 추적한다.

사건의 배후를 쫓던 두 사람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학생의 예언 일기장에 적힌 내용이 현실로 옮겨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예고된 날짜에 살인은 어김없이 이들을 압박해 오고 추자영의 여고 동창인 간호사 서윤희(김윤진)와 사건이 발생한 학교에 다니는 조카가 끼어들면서 자영은 혼란에 빠진다.

불과 수년 전까지 할리우드의 전유물이었던 스릴러 장르가 한국에서도 심심찮게 실험되고 있는 까닭에 이런 유의 이야기에 놀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미궁 속의 사건을 던지고 그것을 진행시키고 히든 카드로 반전을 통해 마무리 하는 방식까지 과거의 전형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울궈먹을 대로 울궈먹은 장르의 공식에 기댄 탓에 신선한 장면 연출에 대한 기대는 애초부터 접는 것이 좋다. 에릭이라는 아이돌 가수의 정체성을 버리고 문정혁이라는 배우로 새로 태어나겠다고 선언한 문정혁의 연기는 이따금씩 뻣뻣하고 자연스럽지 못하다.

속 깊고 털털한 강력계 여형사 역의 신은경도 <조폭마누라> 때만큼의 인상을 남기지 못한다. 드라마 전개와 무관한 형사 콤비의 헛헛한 농담으로 진행되는 초반부는 어색하고 ‘무관심과 배척’이라는 테마를 강조하기 위해 삽입한 자영과 윤희의 과거 에피소드 역시 극적 긴장을 느슨하게 풀어버리는 악수처럼 보인다.

영화 중반까지는 그렇게 심드렁하게 이야기가 흘러가는 듯하다. 심심한 연쇄살인극의 궤도를 돌던 영화에 눈길이 가기 시작하는 건 중반 이후부터다.

그건 기발한 살해 수법이나 살인자의 잔인성 때문이 아니라 살인의 동기가 서서히 밝혀지면서부터다. 이 순간 영화에 무게감을 실어주는 것은 조연급에 가까운 서윤희를 연기한 배우 김윤진이다.

미국 TV 시리즈 <로스트>로 주목을 받고 있는 그는 자신의 스타덤을 증명이라도 하듯 육중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극의 후반부에 보여준 강렬한 몇 장면을 위해 출연에 응했을 만큼 그녀는 뇌리에 남는 연기를 보여준다. 주연을 압도하는 조연 연기가 있다면 이런 것이다.

소재주의 극복한 사회파 스릴러

<6월의 일기>는 여느 스릴러 영화와 달리 범인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것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다. 베일에 쌓인 살인자는 싱겁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극의 중반부쯤 되면 범인은 물론 누가 범인인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게임을 즐길 기분이 싹 가셔버리는 이 순간부터 범인이 누구인가 보다 그 배후에 얽힌 사연에 초점이 맞춰진다.

영화는 연쇄 살인 장르의 재미와 사회적인 메시지를 동시에 잡으려는 야심을 보여준다. 줄거리를 통해 예상할 수 있듯이 영화가 화제 삼고 있는 것은 왕따와 학교 폭력이다.

‘괴롭히고 비난할 수 있는 한 사람을 만듦으로써 나머지 모두가 안심할 수 있는’ 집단 따돌림이 만연한 왕따 문화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려는 것이다.

어느 시대건 왕따나 따돌림의 대상이 되는 아이들은 하나씩 있었지만 영화를 통해 확인되는 양상은 과거와 사뭇 달라 보인다. 특히 인터넷과 통신이라는 수단을 통해 소비, 유통되는 문화는 철저하게 ‘그들만의 세상’에서 유린당하는 IT 강국의 인권 실태를 웅변하고 있다.

인간의 가학적 취향과 군중심리, 훔쳐보기의 욕망이 결합된 일그러진 심리는 충격적인 왕따 동영상을 통해 적나라하게 보여진다.

<6월의 일기>는 스릴러 장르의 매력은 떨어진다. 영화적 완성도에 좀 더 공을 들였다면 훨씬 볼만한 영화가 될 뻔했다. 메시지에 모든 걸 건 나머지 스릴러 장르의 뼈대만 빌어온 셈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엔 음미할만한 대목이 많다. 영화를 보면 집단 따돌림으로 고통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그 고통을 짐작할 수 없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

비단 학교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는 집단 따돌림 문제를 이슈화한 시나리오는 나름의 진정성을 느끼게 한다.

무엇보다 최근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물었던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고민한 흔적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새롭다. 물론 장르와 사회성을 이런 식으로 결합시키는 방법은 촌스럽다.

그러나 <6월의 일기>는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로 한탕을 노리는 소재주의 영화는 아니다. 대중의 취향과 쾌락을 위해 영혼마저 팔아버린 영화들 틈새에서 이 영화가 기특해 보이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장병원 영화평론가 jangping@film2.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