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영혼을 그려내는 빛과 그림자영화서 세속적 사랑과 영원해야 할 사랑사이에서 번민하는 운명 암시

미술은 언어이다. 하지만 너무나 개인적이고 독창적인 까닭에 우리는 그들의 언어의 독해에 어려움을 느낀다.

그러나 미술작품이 지닌 뜻을 헤아리고 그 작품을 통해 영화를 이끌어 가는 계기로 삼거나 영화의 반전을 암시하는 장치로 사용해 왔다. 이렇게 영화 속에 미술은 영화의 또 다른 은유나 비유로 활용되면서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왔다. 영화 속의 미술이야기를 통해 영화의 미술의 통섭의 세계를 만나보았으면 한다.

아름다운 도시 파리의 중심으로 세느강이 흐른다. 이 세느강은 파리를 이야기와 추억이 있는 곳으로 만들뿐 아니라 낭만의 도시로 만들어 준다. 게다가 파리를 흐르는 세느에는 많은 다리가 있어 볼거리와 이야기 거리를 제공한다.

세느강을 가로지르는 30여개의 다리 중 오래된 다리인 퐁네프(Pont Neuf) 다리는 다른 다리에 비해 그렇게 아름답거나 예쁘다고는 할 수 없는 평범한 다리이다.

하지만 퐁네프 다리는 우리의 뇌리에 깊숙이 자리한 애틋한 장소이자 파리의 낭만과 사랑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비교적 평범한 모습의 이 다리가 이렇게 우명하게 된 것은 아마도 1991년 제작 개봉된 <퐁네프의 연인들> (Les Amants Du Pont Neuf) 영화 때문 일 것이다.

프랑스의 영상파 감독 레오 깔락스(Leos Carax, 1960~ )가 5년간의 제작 끝에 완성한 이 영화는 퐁네프 다리에서 만난 불우하고 신분차가 나는 남과 여의 애절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조금은 야릇한 사랑이야기기 줄기를 이룬다.

줄리엣 비노쉬(Juliette Binoche)가 시력을 잃어가는 것을 비관해서 집을 뛰쳐나온 화가지망생 미셸역을 드니 라방(Denis Lavant) 이 홈리스인 알렉스로 분한 이 영화는 레오 깔락스 특유의 심오한 연출로 흥행을 고려하지 않은 전위적인 영상이 예술영화 특유의 영상미를 제공한다.

신분의 차이를 넘어 방황하는 젊은 영혼이 만나 사랑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 사랑은 기약 없는 동시에 언제 깨질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사랑이었다. 하지만 알렉스는 실명의 위기에 있는 미셸에게 웃음과 희망이 되어 주었기 때문에 또 알렉스에게는 미셸은 단 한 번의 또는 마지막 사랑이라는 것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찾는 포스터가 파리 시내에 붙여지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 없다는 일념으로 지하도에 포스터를 떼고 불을 지르는 알렉스의 광적인 사랑은 결국 교도소로 그를 이끈다.

이런 처절하면서도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극적으로 클라이맥스에 이를 즈음 등장하는 그림이 있다.

실명의 위기에서 그림을 보고 싶어 하는 미셸을 한 때 미술관에서 경비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한스를 앞세워 미술관에 몰래 들어간다. 하지만 이미 미셸은 코앞에 있는 그림이 보이질 않아 손으로 만져 그림을 느끼는 수 밖 에는 별 도리가 없는 상황이다.

이렇게 안타까운 장면에서 촛불을 들고 그림을 희미하게 마나 보여주려 애쓰는 알렉스의 사랑은 관객들의 애를 태운다. 여기서 등장하는 작품이 바로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의 <자화상>(1960년작, 루브르미술관 소장)이다. 렘브란트는 백 여 점에 가까운 자화상을 남긴 화가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그의 회화사적 업적은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그리고 루벤스 등과 견주어서도 손색이 없는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화풍은 빛과 그림자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 묻혀있는 신비로움이 존재하는 대상 그 자체는 물론, 인간의 내면과 심적 상태를 담아내고자 했다.

즉 외형적 유사성보다는 내면적 가치를 드러내고자 하였으며 마치 우리나라 전통적인 초상화기법이자 가치척도인 전신사조(傳神寫照)기법처럼 인간의 모습뿐 만 아니라 그 정신까지 내면까지 담아야 한다는 법칙과 괘를 같이한다.

3, 4- 크리스토의 포장된 퐁네프
5-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영화속 주인공 미셸과 알렉스와의 불안한 사랑, 풍랑을 만날 것 같은 위험한 사랑을 의미한다.
6- 17세기 네델란드 화풍에 영향을 준 카라바지오의 '유디트' 렘브란트는 그 그늘에서 독립해 갔다.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네덜란드 황금 시기라 일컬어지는 17세기를 살아간 인물이다.

그의 그림의 압권은 누가 뭐래도 절묘한 그의 빛과 그림자이다. 인간의 내면까지도 드러내는 듯 한 그의 그림에서의 빛은 어둡고 그늘진 배경과 어우러져 시공간을 잇는 신비함으로 이어지면서 따뜻한 인간애와 구원을 느끼게 한다.

그의 이러한 독특한 명암법을 우리는 키아스쿠로 기법이라 한다. 이 명암법은 찰나적인 연극적인 요소와 결합해서 인물에게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역할을 한다. 바로크 시대를 연 이탈리아화가 카라비지오(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3~1610)로부터 비롯된 이 명암법은 북유럽의 렘브란트에 의해 완성된 셈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명암법을 활용해서 많은 종교화와 초상화를 제작했다. 그의 이런 기법은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유행해서 인물사진을 찍을 때 어두운 부분을 더욱 강조해서 존재의 신비감을 더하는 증명사진이 유행했을 정도이다.

여기에 그는 그림 그리는 방법을 달리했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베르메르 등의 화가들은 일반적으로 물감을 조금씩 써서 붓 자국이 남지 않도록 화면을 매우 매끄럽게 마무리했다.

하지만 렘브란트는 물감을 쌓아올려 붓 터치가 강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이런 때문에 당시 어떤 평론가는 렘브란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의 코를 잡아당길 수 있을 정도라고 조크를 던질 정도였다.

물감의 질료적 특징이 붓 터치와 함께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그의 그림은 가까이서 보기보다는 조금 떨어져서 보는 것이 더욱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하지만 영화에서 희미해진 시력으로 미셸은 그림을 볼 수 없자 손으로 만져서 그림을 느낀다. 바로 렘브란트의 질박한 붓 터치와 물감을 두껍게 바른 화풍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드러나는 빛과 그림자가 알렉스가 들고 있는 촛불에 의해 일렁이는 빛이 렘브란트가 비교적 노년에 이르렀던 54세의 자화상을 사이에 두고 두 주인공의 얼굴에 넘실거리는 장면은 렘브란트의 키아스쿠로 기법의 정수를 이해 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리고 이 장면은 동시에 불안하고 깨지기 쉬운 그들의 세속적 사랑과 영원해야 할 사랑사이에서 번민하는 운명 같은 것을 암시한다.

렘브란트는 화가로서 매우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구가했지만 결국 노년에 이르러서는 파산하여 매우 곤궁한 삶을 살아야 했다. 이런 그의 화가로서의 성공적인 삶과 실패한 생활인으로서의 삶이 교차하는 그의 인생처럼 퐁네프의 연인들의 운명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아무도 알 수 없다. 참고로 이 영화에서 루브르미술관에 두 사람이 들어갔을 때 후면에 걸려있는 작품은 테오도르 제리코(Jean Louis Andre Theodore Gericault)의 <메두사의 뗏목>(1818~1819년, 491X716cm)으로 낭만주의 화파의 대표적이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당시 있었던 해난사고를 소재로 그린 장르화의 하나로 렘브란트보다는 약 200년 후에 살았던 화가의 작품이다. 그러나 이 그림이 영화에서 상징하는 것은 바로 미셸과 알렉스와의 불안한 사랑, 풍랑을 만날 것 같은 위험한 사랑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불과 포도주도 같은 의미이다.

하지만 퐁네프 다리는 이 영화가 나오기 전인 1985년 이미 대지예술가 크리스토(Javacheff Christo, 1935~ )에 의해 노란 천으로 포장됨으로써 미술동네와 연(緣)을 단단히 맺기 시작했다.



정준모 미술비평, 문화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