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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속 인간의 마음까지 쓰다듬는 애니메이션
[시네마] 피트 닥터·밥 피터슨 감독의 '업'
디즈니-픽사 작품 중 가장 슬프고 가장 씩씩한 영화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



어느 해보다 쟁쟁한 감독 라인업으로 한껏 기대를 부풀렸던 올해 칸국제영화제는 “위대한 감독들의 평작 퍼레이드”라는 다소 서운한 평가에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파격적인 개막작만큼은 깐깐한 평단의 두 엄지손가락을 ‘업’시키기 충분했다.

칸 영화제 최초의 애니메이션 개막작으로 선정된 디즈니-픽사의 <업>은 칸의 사그라들지 않는 모험정신을 대변했다. 칸도 이제 환갑을 넘긴 나이.

하지만 이 혈기방장한 노인은 볕 좋은 창가 옆 푹신한 소파에 앉아 화려하고 뜨거웠던 젊은 시절을 되새김질하며 여생을 흘려보낼 생각이 조금도 없다. 칠순 이 넘어 생애 처음으로 진짜 모험을 시작하는 <업>의 주인공 칼 프레드릭슨이 그랬듯.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상 모든 할아버지들은 한때 발갛게 상기된 볼과 똘망한 눈을 가진 소년이었다. <업>은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황망히 흘러간 칼 프레드릭슨의 일생을 훑어 내린다.

모험가를 꿈꾸던 소심한 소년 칼이 우연히 씩씩하고 쾌활한 모험 소녀 엘리를 만나 풋사랑에 빠지고, 그들이 자라 결혼하고, 소박한 일상을 누리며 나이가 들고, 결국 모험의 꿈을 추억의 앨범 속에 봉인한 채 노인이 되고, 칼은 끝내 생의 동반자 엘리를 먼저 떠나보낸다.

이제 칼에게 남은 건 엘리와의 추억뿐이다. 지역 개발자들은 칼의 일생이 담긴 집을 팔고 편안한(?) 양로원으로 들어가라고 졸라대지만, 칼은 버틴다. 아침에 눈을 떠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도 버거운 노인은 그 집에서 과거를 곱씹다 엘리의 뒤를 따르는 것 말곤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은 집을 지키려다 실수로 폭행을 저지르고, 결국 법원으로부터 양로원 행을 명령받는다. 모든 것을 잃게 될 순간, 칼은 모든 것을 지킬 묘책을 떠올린다.

집에 풍선을 매달아 남아메리카로 모험을 떠나는 70세 노인의 이야기라니! 이 황당한 아이디어로 장편 애니메이션이 가능할 수 있을까? 제 아무리 장난감에 생명을 불어넣고(<토이 스토리>), 물고기에게 포복절도한 코미디 슬랩스틱을 시키고(<니모를 찾아서>), 쥐를 파리 최고의 요리사로 만들고(<라따뚜이>), 깡통 로봇을 궁극의 로맨티스트로 등극시킨(<월·E>) 디즈니-픽사지만 불가능한 모험처럼 보였다.

<업>의 스토리 슈퍼바이저 로니 델 카르멘도 내부적인 우려가 높았다“고 말한다. “이 영화가 전작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아주 평범한 노인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슈퍼 히어로도, 말하는 물고기도, 요리하는 쥐도 아닌, 평범한 노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건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하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업>은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의 목표가 더 이상 현실세계를 완벽히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실사 영화가 울고 갈만한 하늘과 구름, 공기의 움직임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더불어 <업>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품고, 그 속에서 외로워하는 인간의 마음마저 쓰다듬는다.

<업>의 위대함은 칼의 모험담이 시작하기도 전에 확인된다. 귀에 익숙한 흘러간 노래를 배경으로 칼과 엘리의 일생을 사진첩 넘기듯 보여주는 시퀀스는 대사 한마디 없이 심장을 와락 쥐었다 놓는다. 엘리와 함께 눈을 뜨던 침대에서 칼이 홀로 몸을 일으킬 때 즈음엔 터진 눈물샘을 주체하기 힘들 정도다.

“피트 감독의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 할아버지의 상을 당했다. 나도 모르게 그때의 슬픔이 영화에 배어든 것 같다”는 로니 델 카르멘의 말처럼, <업>은 이제껏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중 가장 슬픈 영화다. 영화 곳곳엔 상실과 애도의 정서가 배어있다.

제 몸을 가누기도 힘들면서 어깨에 짊어진 ‘짐’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 칼의 안간힘은 순간순간 처연하고, 충견들에게 말하는 장치를 달아 주고 말벗하며 외로움을 달래 왔을 천재 모험가도 애처롭다. 칼의 모험에 실수로 동행하게 된 러셀이 배지를 받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건, 이혼 후 자주 볼 수 없는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다.

동시에 <업>은 디즈니-픽사 영화 중 가장 씩씩한 영화이기도 하다. 모험을 통해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노인은 남은 생이 지난 생의 그림자가 아님을 확인한다. 그는 앞으로 찾아올 매 순간의 모험을 즐겁게 기다릴 것이다. 또래 친구들에게 소외당했던 소년 역시 제 힘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깨우친다.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워 줄 할아버지를 얻은 건 보너스인 셈. 영화의 전반부에서 칼과 앨리의 흘러간 일생이 애잔하게 펼쳐졌다면, 영화 마지막 칼과 러셀의 새로운 추억들은 따뜻하고 씩씩하다.

<업>으로 생애 첫 목소리 연기에 도전한 배우 이순재는 칼과 꼭 닮은 외모만큼이나 잘 어울리는 목소리 연기를 선보인다. 대부분의 디즈니-픽사 영화가 그렇듯, 한 번 관람으로 성에 차지 않으면 원어버전과 더빙버전을 모두 경험하는 것도 좋겠다.

입체 3D로 제작된 영화인만큼, 꼭 한 번은 3D 안경을 쓰고 관람할 필요가 있다. 보고 또 봐도 감동이 줄지 않는다. 또 하나의 ‘인생의 영화’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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