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허진호 감독의 3일간의 짧은 재회… 머뭇거림 속에 피어나는 어른들의 연애 동화

어른의 삶을 지배하는 건 '현실'의 관성이다. 어제의 무게를 짊어진 오늘을 살고, 오늘과 그리 다를 바 없는 내일을 위해 잠드는 날들의 반복 속에서 어른들의 삶은 빛바랜 회색으로 물들어 간다.

허진호 감독은 <호우시절>을 통해 조금씩 말라가던 어른들의 삶에 달콤한 빗줄기를 선물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마주친 아련한 옛 사랑. 남녀는 이 만남이 여름 낮의 소나기처럼 스치고 지나갈 짧은 인연임을 알만큼 '어른'이 됐지만, 움트는 설렘을 모른 체 할 수 없다.

중장비 회사에서 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박동하는 중국 쓰촨 지역으로 2박3일 일정의 짧은 출장을 떠난다. 1년 전,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쓰촨 지역의 복구 사업과 관련해 중국을 찾은 그는 청두의 관광지 '두보 서원'에서 반가운 얼굴과 재회한다. 미국 유학시절 마음에 품었던 여인 메이가 그 곳에서 가이드를 맡고 있었던 것.

변해버린 서로의 모습에 조금 낯설어하던 두 사람은 과거의 추억을 고리 삼아 금세 말문을 열고, 예전에는 전하지 못했던 속내를 털어놓는다.

미국 유학시절, 서로에게 호감이 있었지만 결실을 맺지 못했던 동하와 메이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 바쁘다. 메이가 동하에게 "너는 일본 학생과 사귀었다"고 운을 떼자, 동하도 "너도 다른 남자친구가 있었다"고 응수하면서, 사실은 서로가 그 사람과 사귀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심 기뻐한다.

엇갈린 기억의 퍼즐을 맞추는 것 역시 재회한 사람들만의 특권이다. 동하가 "우리는 키스도 한 사이"라고 고백하자, 메이는 절대 그런 적 없다고 새침을 떤다. 서로를 떠나있었던 시간에 대한 솔직한 고백도 이어진다. 메이가 "몇 번 엽서를 보냈지만 네게서 답장이 오지 않았다"고 면박을 주자, 동하는 어설픈 변명 대신 "네 생각을 할 때는 현실에 적응하느라 바빴고, 바쁘지 않았을 때는 여자친구가 있었다"고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종알종알 툭탁거리는 동하와 메이의 데이트는 <비포 선 셋>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비포 선 셋>의 대화는 9년 전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서로에 대한 귀여운 원망이 묻어나는 노골적인 대화인데 반해, <호우시절>의 대화는 담담하고 간결하다. 그 이유는 동하와 메이가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대화하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어를 못하는 동하와 한국어를 못하는 메이는 유학시절처럼 '영어'로 서로의 마음을 전한다. 만약 모국어를 사용했다면 숨길 수 없었을 감정의 앙금은 정중하고 관용적인 영어 문장 속에서 가벼운 농담으로 번역된다. 동시에 모든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수 없는 언어의 한계는 한국인 동하와 중국인 메이가 서로에게 느낄 수밖에 없는 미묘한 이질감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여름밤의 달콤한 꿈처럼 짧은 재회의 시간이 끝나갈 때 즈음, 동하와 메이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한다. 작은 기념품을 빌미로 동하의 출국장을 찾은 메이가 "이제 가야 할 시간"이라며 마지못해 동하의 등을 밀어보지만, 동하는 비행기 표를 취소해버린다.

거창한 '운명적 사랑'을 믿을 만큼 순진한 나이는 지났지만, 다시없을 기회를 기약 없이 흘려보낼 수 없다는 절박함에 두 사람은 오랜만에 일탈을 감행한다. 발 앞의 선 하나만 넘으면, 놓쳤던 과거를 이어나가게 될 지도 모른다는 떨리는 유혹. 하지만 두 사람은 머뭇거린다. <호우시절>을 어른들의 성숙한 멜로로 숙성시키는 건 이 시점이다.

두 사람은 비록 오늘 하루는 20대의 그 시절처럼 설렘에 달뜨겠지만,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하룻밤의 사랑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또한 서로의 어제를 모른 채, 오늘의 감정만 믿고 무턱대고 내일을 약속할 자신도 없다. 겨우 3일 간의 짧은 재회로는 절대 서로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삶의 무게도 말없이 눈치 챈다. 그렇게 또 한 번 사랑을 흘려보내려는 찰라, 동하는 메이가 차마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듣게 된다.

<호우시절>은 완벽한 '허진호' 스타일의 멜로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절박하지만 호들갑스럽지 않고, 그들의 연애는 별다른 사건 없이 조용히 흘러간다. 하지만 그 조용한 연애담은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해지는 '그 순간'으로 기억된다.

그의 초기작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의 아련한 멜로에 열광했던 관객이라면 <호우시절>에 큰 기대를 걸어도 좋다. 얼핏 듣기에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뻔한 듯한 대사 한 마디를 귓가에 꽂아 넣는 능력도 여전하다.

<봄날은 간다>에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가 있다면 <호우시절>에는 "사랑엔 국경이 있습디다"가 있다. 전작의 모든 장점과 더불어 <호우시절>은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따스한 희망의 기운이 더해졌다. 지금껏 허진호 감독의 '사랑'을 관통하고 있는 정서는 '상실'이었다.

<호우시절> 역시 '잃어버린 자'들의 이야기인 것은 변함없다. 하지만 동하와 메이는 잃어버린 과거에 매여 주저앉는 대신, 내일을 향한 페달에 발을 얹는다. 동하 역의 정우성은 농담처럼 "감독님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얻은 뒤에 희망적인 사람으로 거듭난 것 같다"고 설명했지만, 단순히 그 뿐만은 아니다.

<호우시절>은 지난해 쓰촨 성 대지진의 피해자들을 위로하자는 취지에서 기획된 한중합작 프로젝트에서 출발했다. 허진호 감독은 "가슴 설레고 따뜻한, 행복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 영화를 시작하면서 지진으로 큰 상처를 입은 청두에서 만난 연인의 희망적인 결말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다소 동화 같은 결말이지만, 그래도 동하와 메이의 해피엔딩을 빌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쓰촨의 지진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감독의 마음이 담겨있기 때문인 듯하다.

동하 역의 정우성과 메이 역의 중국배우 고원원의 상큼한 화학작용도 <호우시절>의 중요한 매력이다. 평범한 직장인이라기엔 비현실적일 정도로 완벽한 '미모'를 자랑하긴 하지만, 동하 역의 정우성은 어른들을 위한 연애 동화의 '왕자님'으로 적역이다.

소녀같은 여성스러움과 대륙 여인의 강인한 품성을 조화롭게 표현한 메이 역의 고원원은 남성관객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듯. 엔딩 크레디트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은 관객은 두보의 시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의 전문을 감상할 수 있다. 시와 영화의 운치가 따사로운 가을과 잘 어울린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