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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배우가 여배우에 대해 입을 열다

[Cinema] 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
화려한 치장과 소박한 민낯 사이의 여배우를 훔쳐보는 재미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 여배우들이 있다" 이재용 감독의 신작 <여배우들>을 여는 문장이다.

여배우는 평범한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특별한 종족'이라고 선언하는 듯한, 이 문장은 영화 <여배우들>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여배우. 사전적으로는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여성이라는 뜻의 명사.

하지만 '여배우'라는 단어를 읊조리는 순간, 어디선가 은밀한 비밀을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환상에 빠진다. 대중이 여배우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무대뿐이다.

허구의 세계에서 허구의 인물로 반짝이는 아름다움을 보여주던 그녀들은 무대의 불이 꺼지는 순간 어디론가 사라지는, 일종의 환영이다.

제 아무리 스타의 초등학교 졸업앨범이 인터넷의 바다에 둥둥 떠다니고, 핸드폰에 장착된 고성능 디지털 카메라로 누구나 '파파라치'가 될 수 있는 세상이라지만, 여배우는 여전히 비밀의 성 속에서 산다.

비밀은 환상의 양분이 되기도 하지만, 편견과 루머를 부풀리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덕분에 여배우를 이야기하는 데 빠지지 않는 건 언제나 '카더라 통신'이다. 몇 년 전 연예계에 휘몰아친 'X-file' 해프닝이 대표적이다.

이니셜이 난무하는 '아니 땐 굴뚝'에선 항상 연기가 솔솔 피어 오른다. 대부분은 '낚시질'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A양' 'B양' 운운하는 가십 기사를 슬그머니 클릭하고 있는 우리를 발견한다.

이재용 감독은 구차한 엿보기에 지친 대중을 위해 <여배우들>이라는 화끈한 파티를 계획한 것 같다. 파티의 주인공은 바로 여배우다.

윤여정, 이미숙, 고현정, 최지우, 김민희, 김옥빈까지 이제 막 '여배우'의 대열에 한 발을 담근 '새내기'부터 40년 넘게 '여배우'로 살아온 60대의 '고수'가 한 자리에 모여, 대중들이 보고 싶어했던 '여배우의 거의 모든 것'을 풀어놓는다.

영화 속 시간은 2008년의 크리스마스 이브. 패션지 <보그>의 화보 촬영을 위해 여섯 여배우가 한 스튜디오로 모이는 '전대미문의 이벤트'가 벌어진다.

<보그>의 섭외에 조금 들뜬 윤여정은 모임 시간보다 1시간이나 일찍 도착해 민망해하고, 함께 촬영하기로 한 절친한 후배 고현정에게 SOS를 친다. 지금 막 <무릎팍도사> 녹화를 마치고 집에 도착한 고현정은 윤여정의 전화에 "지금 당장 가겠다"고 호언장담을 해놓고도 미적대고 눕는다.

아마도 <에덴의 동쪽>으로 예상되는 드라마 촬영장에서 분장도 못 지우고 스튜디오로 달려오는 이미숙은 매니저도 없이 혼자 차를 몰고, 김민희 역시 귀여운 스쿠터를 타고 당당하게 홀로 촬영장에 들어온다.

윤여정이 도착하기도 전에 도착한 김옥빈은 두려움 반, 수줍음 반의 심정으로 주차장에 숨어 있다가 선배들이 줄줄이 스튜디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뒤에야 허겁지겁 합류한다.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여배우는 최지우. 부은 얼굴 탓에 밤샘 촬영을 핑계 삼아 단체 촬영에서 빠질 궁리를 세우지만, 혼자 찍어서 합성했다가 혼자만 사진이 이상할까봐 울며 겨자 먹기 심정으로 촬영장으로 향한다.

윤여정을 윤여정이라 부르고, 고현정을 고현정이라 부르는 <여배우들>의 특별한 구성에 혹하면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다시 말해, <여배우들>은 1%도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일례로 <여배우들>의 촬영 시기는 2009년 6월. 춥다며 윤여정이 값비싼 세이블 코트 깃을 여밀 때, 그녀의 등은 땀으로 젖어있었을 것이다.

그녀들은 순도 100%의 극영화 <여배우들>에 출연해 자신이 맡은 역할에 맡은 '연기'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들의 '연기'가 그저 '연기' 같지 않은 건, 그녀들이 연기하는 대상이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 미묘한 트릭이 <여배우들>의 양면적인 매력이다. 일차적으로 영화는 대중이 '여배우'라는 대상에게 품었던 판타지를 한껏 보여준다.

"무조건 예쁘다고 띄워줘야" 좋아하고, 내가 섭외 1순위가 아닐까봐 마음 졸이고, 비슷한 연배의 라이벌(?)끼리 서슬 퍼런 기싸움을 벌인다고 알려져 있는 '여배우'들의 습성을 설정하는 식이다.

이런 설정을 통해 "역시 여배우들이란 듣던 바대로 유별나다"고 생각할 때 즈음, <여배우들>의 2부가 시작된다. 촬영에 협찬받기로 했던 고가의 보석이 폭설로 늦게 도착하면서 화보 촬영이 지연되자, 그녀들은 '일'하지 않는 상태가 된다. 즉 '여배우'의 치장을 벗고 소박한 여인의 '민낯'을 공개할 시간을 제공받은 것이다.

<여배우들>의 진짜 재미는 여기에 있다. 개인적으로 영화의 주인공들과 친분이 있었던 이재용 감독은 "그녀들의 입심을 혼자 보기 아까워서" <여배우들>을 기획했다고 털어놓았다.

영화 속에서 일상의 시간을 선물받은 그녀들은 정말 혼자 보긴 아까웠을 재담을 선보인다. 만약 한국에도 '코미디 연기상'이 있다면 트로피를 죄다 쓸어안았을 이미숙의 입심은 가히 압권이고, 누구의 심심한 대화도 즉각 만담으로 살려내는 윤여정의 노련미가 돋보인다.

샴페인 잔을 들고 소파에 늘어지듯 둘러앉아 가십 기사 속 자신의 이야기를 안주 삼아 수다를 떠는 그 시간 동안, 잠시 연기와 실제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그리고 그녀들은 한 순간 자신들도 모르게 툭 터진 눈물과 함께 소박하고 말간 민낯을 드러낸다.

어차피 연기란 배우의 내면에서 허구의 인물을 끌어올리는 작업이기에, 지금까지 그녀들은 자신이 연기해 온 수많은 캐릭터 속에 진심의 조각들을 묻어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배우들>처럼 아예 자신을 연기할 기회를 얻은 건 처음일 것이다.

이재용 감독의 새로운 시도 속에서 여배우들은 '진심어린 연기'와 함께 '아름다운 민낯'을 보여준다. 이건 관객들뿐 아니라 출연한 배우들도 처음엔 예상하지 못했을 울림이다.

'여배우'라는 종족을 구경하러 갔다가, '여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온 셈이다. 한 배우가 한 영화를 짊어져도 무방할 여섯 여배우의 모임치고는 너무 소박한 극적 구성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

<여배우들>이 소박하지만 정성이 듬뿍 담긴 애피타이저였다면, 다음 번엔 근사하고 풍성하게 차린 정찬 같은 <여배우들 2>를 볼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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