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원작 , 정치적 리더십보다 판타지 자극 초점

SBS 드라마 <대물>
'박칼린 리더십'이 화제였다. KBS <해피선데이-남자의 자격>에서 보여준 그녀의 부드러운 카리스마는 이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상을 제시했다며 언론은 들끓었다. 그러자 정재계도 너나 할 것 없이 '박칼린 리더십'을 입에 오르내리며 진정한 리더가 나오지 않는 우리 사회를 비판했다.

왜 우린 진정한 리더를 원하는 것일까? 미국의 클린턴 전 대통령이 떠오른다. 그는 '회유책과 강경책의 달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정치를 잘 했던 인물이다. 당시 섹스 스캔들이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겐 제대로 된 리더가 있었던가.

만화적 판타지를 쫓는 리더상

"우린 대체 누굴 믿고 살아야 합니까! 내 아이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이 나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앞으로 대통령이 될 아나운서 출신 서혜림(고현정 분)의 빗속 절규는 번쩍 정신이 들게 하는 부분이다. 여자의 몸으로, 그것도 아나운서라는 껍데기를 두른 채 이 사회에 대고 통곡했기 때문이다. 아프카니스탄의 종군로 파견됐던 남편이 피랍돼 결국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자 억울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SBS <대물>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는 드라마이다. 국내에서 대통령을, 그것도 여성 대통령을 정면에 내세워 TV 전파를 탄 드라마는 없었다. <제5공화국> 등 우리나라의 정치 역사를 사실적으로 다룬 드라마를 제외하고는.

<대물>에 이어 12월에는 KBS <프레지던트>(가제)도 전파를 탈 예정이다. <프레지던트> 역시 <대물>과 마찬가지로 인권 변호사 출신 장일준(최수종 분)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과정부터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풀어갈 계획이다. 두 드라마는 대통령이 된 주인공들의 정치적 리더십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드라마틱한 장면들을 보여주려고 한다.

두 드라마가 가진 더 재미있는 사실은 원작이 만화라는 것. <대물>은 <쩐의 전쟁>, <열혈 장사꾼>의 박인권 화백의 동명만화를 원작으로 했으며, <프레지던트>는 일본의 가와구치 가이지의 만화 <이글>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이다. 결국 대통령이 된 주인공들의 정치수행 능력보다는 그 과정에 초점을 맞춰 시청자들을 감동시키는,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인물을 그리겠다는 논리다.

우리는 이미 2002년 영화 <피아노 치는 대통령>과 지난해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 인간적이면서 서민적인 대통령의 모습을 엿봤다. <피아노 치는 대통령>의 대통령(안성기 분)은 사랑 앞에 지극히 평범하고 로맨틱한 남자로서의 인간상을 보여주었다.

또 <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선 복권에 당첨돼 고뇌하는 대통령(이순재 분), 남편이 영부인이 되어 버린 최초의 여성 대통령(고두심 분), 싱글 파파로 한 청년을 위해 신장도 떼어 준 대통령(장동건 분) 등 정치적 암투극이 오가는 모습보다 따뜻하고 훈훈한 장면들이 더 많았다. 일본 정부에 대고 "한국정부를 우습게보지 마시오. 굴욕적인 역사는 있지만 굴욕적인 정치는 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감성적인 대통령이 있을 뿐이다.

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
반면 우리보다 10년은 일찍 시작한 미국드라마 <웨스트 윙(The West Wing)>이나 <커맨더 인 치프(Commander In Chief)> 등은 각각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진과 여성 대통령의 활약상을 다룬 정치 드라마였다. 두 미국 드라마는 대통령이 되는 드라마틱한 과정보다는 현실에 중심을 두고 국정과 국민 등에 집중한 백악관과 대통령을 그렸다.

그렇다면 국내 드라마는 왜 대통령의 현실적인 정치 세계와 고민들을 다루지 않는 걸까.

지상파 방송의 한 드라마 PD는 "시청자는 정치보다는 드라마틱한 판타지를 자극하는 인간상을 원한다"고 잘라 말했다. 현실적인 정치드라마는 국내 시청자들에겐 외면을 당한다는 것. 만약 <대물>에서 여성 대통령이 정치적인 권모술수를 보이며 자리를 지키는 모습을 보인다거나, 정치적 사안들을 심도 있게 협의하는 장면들이 주를 이룬다면 현재의 시청률 20%를 넘겼을까 하는 것이다.

<대물>은 남편을 잃고 절규하는 아내의 모습, 아이를 지키려는 모성애, 모기떼 속으로 들어가 서민들을 취재하는 인간미 등을 통해 삼박자의 판타지가 가미된 리더십을 보이고 있다.

최근 MBC <동이>나 SBS <자이언트> 등이 2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한 것도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동이>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여인의 카리스마를, <자이언트>는 권력에 대항하는 굳은 의지의 이강모라는 인물을 그리고 있다. 상반된 두 주인공이지만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판타지적 인물이기에 그 감동은 더 크다.

드라마 <커맨더 인 치프>
얼마 전 <대물>의 작가가 교체되는 일이 벌어졌다. 황은경 작가 대신 유동윤 작가가 투입된 것. 4회까지 방영된 시점에서 큰 소리 탕탕 치던 서혜림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못난 정치인들과 나라를 향해 언성을 높일 줄 알았던 그녀다. 모성애와 인간애도 좋지만 더 솔직하고 당당한 리더의 모습을 기대해 보는 건 무리일까.



강은영 기자 kis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