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읽기] 드라마 <대물>배려와 치유의 여성적 리더십에 대한 갈망 보여

장장 69일에 걸친 칠레 광부 33인의 기적적인 생환 과정을 지켜보며 '저런 나라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칠레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이 앞장서서 지하 700미터 아래 갇힌 광부들을 살려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니 그 나라의 국민들이 더없이 부러워졌다.

세바스티나 피녜라 칠레 대통령은 영국의 한 토크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 마음 속에서, 광부들이 반드시 살아있을 것이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구조작업이 그야말로 '기적'이 아니었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기적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매우 중요한 도움을 받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 기적의 드라마를 자신의 업적으로 치부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웨스트 윙> 같은 이상적인 정치 드라마에서나 보던 훌륭한 정치가를 현실에서 드디어 만난 기분이었다. 대단한 문화유산을 지니거나 GNP가 엄청나게 높거나 세금 폭탄이 없는 나라라서가 아니라, 어떤 위급한 순간에도 사람을 살리는 것이 최우선임을 잊지 않고 있는 대통령 때문에, 그 나라 국민들은 진정 행복해 보였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칠레하면 구리를 떠올렸던 나는, "칠레의 가장 큰 보물은 구리가 아니라 광부들"이라고 선언하는 그를 보며, 문득 부끄러워졌다.

드라마 <대물>의 첫 장면을 보며 많은 사람들은 천안함의 악몽을 떠올렸다. 중국 영해에 침투한 한국 잠수함에 타고 있던 20명의 승조원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구해내는 서혜림(고현정) 대통령. 한미군사동맹을 비롯한 각종 외교적 불이익을 감수한 채 자신의 생명을 걸고 국민을 지켜내는 서혜림 대통령의 카리스마는 그 한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드라마 역사에 남을 기념비적 캐릭터였다.

"대한민국에서 더는 국가가 지켜주지 않은 국민들이 나와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제가 대통령이 된 이유니까요." 한 발짝이라도 중국 영토에 발을 들이면 즉각 발포하겠다고 위협하는 중국 국가 원수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건다.

"중국이 대국이라면 대국다운 면모를 보여주세요. 대신 제가 여기 중국에 있겠습니다. 볼모가 되든 인질이 되든 전범으로 죽든!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우리 승조원들이 모두 구조될 때까지."

'사람을 살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이상이라는 것을 아프게 환기시켜준 첫 장면의 감동이 채 식기도 전에, 이러한 대통령의 결단을 '한 여자의 하찮은 영웅심리'로 폄하하는 정치권의 대통령 탄핵 움직임이 가시화된다. 이상과 현실의 치명적인 간극을 절묘하게 대비시킨 첫 장면은 현실 정치의 본질을 예리하게 꿰뚫는다. 국민에게 사랑받는 정치인이 반드시 정치적으로 유능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 게다가 국민이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정치인은 현실에서 찾아보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

드라마 <대물>은 정치적 역학관계에는 해박하지 못하지만 국민의 사랑을 받는 여성 대통령이 아직 정치인이 아니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혜림의 남편은 아프간으로 취재를 떠났다가 반정부군에 피랍됐고, 한미군사동맹을 깰 수 없는 한국 정부의 이해관계 때문에 끝내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다. 정부가 바라는 대로 얌전히 남편의 생환을 기다리기만 하던 혜림은 남편이 시신으로 돌아오자 이성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홀로 싸우는 길을 택한다. 국회 앞에서 절규하는 서혜림의 육성은 더 이상 해묵은 은유가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대체 누구를 위한 나라입니까! 개가 집을 나가도 찾는데 이 나라 국민은 개만도 못합니까! 왜 구해주지 않았습니까! 똑같이 납치된 일본 기자들은 살아서 돌아오고 왜 우리 남편은 죽어 돌아와야 했습니까!"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속에서 그녀는 절규한다. "우린 대체 누굴 믿고 살아야 합니까! 내 아이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이 나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이 통한의 연설로 본의 아니게 일약 국민의 영웅이 된 서혜림은 국회의원 보궐선거 출마를 권유받고 험난하기 이를 데 없는 정치인의 여정을 밟게 된다.

국민이 정치인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정치에 대한 냉소가 커진 만큼 좋은 정치인에 대한 기대 또한 더욱 커졌다. 국민은 파워풀한 리더를 원하면서 동시에 서민적이고 민중적인 이미지까지 원한다. 현대사회의 정치인은 관리자로서의 합리적 역할뿐 아니라 <삼국지>의 유비 같은 덕치군주의 낭만적 환상까지 충족시켜야 한다. 어린 아들을 둔 싱글맘 서혜림은 자신의 사생활과 신변까지 위협하는 음해세력에 당당히 맞서면서도 결코 복수를 계획하지 않는다.

그녀의 정면돌파는,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람을 감동시키는 정치'라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다. 그녀는 간척사업을 한답시고 30년 동안 바다를 막아 놓고 아무런 대책이 없는 당국과 또 다른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 '내 아이에게 고등어만한 은어를 먹이기 위해', 은어떼가 마음 놓고 돌아올 수 있는 아름다운 강을 만들기 위해, 그녀는 또 다른 현실정치의 장애물을 넘어야 할 것이다. 과연 서혜림은 무사히 핍박받는 민중의 마음을 대변하는 메신저 역할을 해냄으로써 얼어붙은 민심을 녹이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대통령님, 국가가 힘이 없어 국민을 구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제발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주세요."라는 서혜림의 뼈아픈 대사는 힘없는 국민이 차마 국가에게 직접 말할 수 없는 한 맺힌 넋두리처럼 들렸다.

정치인의 이상형을 구현하는 서혜림과는 대조적으로 강태산(차인표)은 정치의 현실을 대변하는 캐릭터다. "정치는 절대선과 절대악의 논리가 아닙니다. 49%의 악 속에 피어나는 51%의 선의 꽃, 그게 바로 정치입니다." "개발과 환경이 보수정당과 진보정당의 모토라는 것도 몰라요? 친환경적 개발? 누구는 몰라서 못하는 줄 압니까? 보수정당은 돈이 들어서 진보정당은 돈이 없어서, 그래서 못합니다."

그의 막힘 없는 언변은 너무도 유려하고 지적인 나머지 그 세련됨에 홀딱 반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실질적 정치의 이상이 당리당략을 넘어설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수십 개의 도주로를 파놓은 토끼굴 같아서 당최 알아먹을 수가 없는' 정치 베테랑의 술수보다는 정치의 '정'자도 모르는 서혜림의 직설화법이 폐부를 찌르는 것은 왜일까.

"사람이고 짐승이고 다 죽어나가는 판에 무조건 법 지키라고? 지키다가, 죽으라고? 세상에 그딴 법이 어디 있어!" "우린 대체 누구를 믿고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가 대한민국에 태어난 게 죄입니까?"

서혜림의 절규 속으로, 우리 사회가 미처 구하지 못한, 돌보지 못한, 배려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안타깝게 오버랩된다. 살려 주세요, 구해주세요, 도와주세요, 눈만 돌리면 곳곳에서 들리는 피맺힌 국민의 외침에 대답하지 못한 한국의 정치는 <대물>을 통해 대중의 심판대에 오르고 있다.

여성 대통령에 대한 대중의 열망에는 '알파걸'이나 '수퍼맘'을 예찬하는 사회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요소가 있다. 여성적 리더십을 향한 대중의 열망 속에는 약자를 짓밟아 절 권력을 성취하는 남성적 카리스마가 아니라, 지배하지 않음으로써 진정 지배하는, 배려와 치유의 여성성에 대한 갈망이 서려 있는 것이 아닐까.

이제 너무도 실망해 더 실망할 기운도 남아 있지 않은 대중에게 정치인에 대한 기대는 더할 나위 없이 소박하다. 사람을 살리는 정치. 그거 하나면 족하다. 약자를 짓밟아 쟁취하는 권력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는 정치, '살림'의 정치야말로 대중이 원하는 여성적 리더십일 것이다.

아무리 '유전무죄 무전유죄'인 세상이라지만, 최소한 아이들에게만은 차별 없이 밥을 먹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저토록 복잡다단한 정치적 역학관계로 인해 서울시와 서울시교육청 간의 무상급식 담판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우리 삶의 마지노선이 위협받고 있다.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