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재곤 감독의 '이층의 악당'] 서스펜스 구조 위에 재기발랄하게 쌓아 올린 로맨틱 코미디.

2006년 소리 없이 등장한 작은 영화 한 편이 충무로를 깜짝 놀라게 했다. 소심한 숙맥 노총각과 비밀을 숨긴 4차원 아가씨의 '잔혹발랄 로맨스' <달콤, 살벌한 연인>은 청소년관람불가 등급으로 23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파란을 일으켰다.

로맨틱 코미디의 구조에 범죄 스릴러의 해프닝을 녹여 낸 신인 손재곤 감독의 <달콤, 살벌한 연인>은 한국영화로선 꽤 낯설었지만, 젊은 관객들은 신선한 웃음 코드를 반겼다.

웃음의 중심엔 공들여 만든 캐릭터가 있었다. 꼼꼼하다 못해 신경쇠약 직전에 놓인 대우(박용우)와 얼굴도 뇌도 청순한 '타의의 연쇄살인범' 미나(최강희)는 지독히 만화적인 캐릭터이자,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 두 사람이 부딪히며 일으키는 경쾌한 마찰은 한국 로맨틱 코미디에 결정적 장면으로 두고두고 회자된다.

그로부터 4년, 손재곤 감독이 <이층의 악당>으로 돌아왔다. 큰 줄기는 유사하다. 모든 걸 아는 남자와 아무 것도 모르는 여자. 그들의 만남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하루하루가 지긋지긋한 신경쇠약 직전의 주부 연주(김혜수) 앞에 한 남자가 찾아온다. 비어있는 2층을 빌리고 싶다는 멀끔한 신사 창인(한석규). 자신을 소설가라고 소개한 창인은 작품을 쓰기 위해 조용한 작업실을 구한다는데, 실은 거짓말이다.

그의 정체는 고미술 밀매꾼으로, 연주의 집에 시가 20억 원의 골동품이 숨겨져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잠입한 것이다. 심지어 그는 연주 남편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지만, 연주는 까맣게 모른다. 졸지에 남편을 잃고 성형수술 타령하는 사춘기 딸을 키우느라 등골이 휘는 연주는 덜컥 창인을 집으로 들인다.

프로 '악당' 창인은 평범한 주부 연주를 아주 만만한 상대로 보지만, 화투판에서도 기술자가 초짜를 못 당해내는 법. 신경쇠약 직전의 여인 연주는 창인의 예상치를 훌쩍 뛰어넘는 예민함으로 작업을 방해하는데다, 외모 콤플렉스로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는 딸 성아(지우)는 툭하면 수업을 빼먹고 집에 들이닥치는 통에 도무지 작업 진도가 안 나간다. 창인은 의심을 피하기 위해 거짓 사랑고백까지 불사하며 보물찾기에 매달리지만 일은 꼬여만 가고, 물건을 내놓으라는 재벌 2세(엄기준)의 독촉은 점점 거세진다.

<이층의 악당>은 히치콕이 말한 '서스펜스'의 정석 위에 이야기를 쌓아 올린다. 히치콕은 서스펜스를 이렇게 설명했다. 네 명의 남자가 포커를 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간다.

시간이 흐른 뒤 갑자기 테이블 밑에서 폭탄이 터진다.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관객들은 단지 놀라고 만다. 하지만 포커 게임을 하기 전, 한 남자가 테이블 밑에 시한폭탄을 설치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나머지 세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른다. 네 남자가 포커 게임을 벌이는 동안, 시한폭탄의 초침이 흘러가고,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관객들은 태평한 사람들을 보며 조바심을 칠 수밖에 없다. <이층의 악당>은 연주의 남편(박원상)과 창인이 골방에서 골동품 밀매 거래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관객은 창인의 정체뿐 아니라, 연주 남편의 죽음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다.

창인과 연주의 만남이 시한폭탄에 불을 붙이는 것임을 아는 관객들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온 신경을 쏟을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서스펜스는 영화의 구조에서 발화되고, 그 안의 인물들은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이층의 악당>에선 구조보다 캐릭터에 더 시선이 간다. 이건 김혜수와 한석규라는 두 묵직한 배우가 주연을 맡으면서부터 예견된 일이다.

<이층의 악당>의 매력은 김혜수와 한석규가 오랜만에 선보이는 가장 자연스럽고도 가장 사랑스러운 표정에 있다. 김혜수는 본연의 화려함 위에 일상의 스트레스로 신경줄이 툭 끊어진 여인의 피폐한 얼굴을 덮어씌우며 연주라는 인물의 결을 살려낸다.

한동안 '강렬함'이라는 틀에 갇힌 듯 보였던 한석규 역시 창인을 통해 부드러운 폭발력을 선보인다. 두 배우가 한 화면에서 호흡을 주고받는 장면들은 배우의 연륜을 증명한다. 창인이 온 힘을 다해 날린 스파이크를 연주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톡톡 걷어 올릴 때, 두 배우의 호흡은 우아하다.

일부러 웃기려고 작정한 장면은 없지만, 두 인물이 부딪힐 때 자연스럽게 웃음이 피어오른다. 훌륭한 배우는 좋은 와인 같아서, 오래 묵을수록 보물이 되는 듯하다.

두 배우의 연기를 칭찬하는 것은 곧 감독의 연출력을 칭찬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혜수와 한석규에게서 관객들이 가장 보고 싶어하는 얼굴을 끄집어 올린 감독은 그들이 놀 듯 날 듯 연기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자신의 마음에 갇힌 연주의 심리상태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기이한 구조의 집에서 연주와 창인이 '숨바꼭질'을 벌이는 장면은 배우와 감독의 시너지가 극에 달한 명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인물을 완벽한 동선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손재곤 감독의 재능은 후반부 카체이싱 장면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한석규는 한 인터뷰에서 손재곤 감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할리우드의 거장 빌리 와일더의 이름을 언급했다. 고전 스크루볼 코미디의 향취를 서스펜스 스릴러의 카메라 워크로 부각시킨 <이층의 악당>을 보면, 한석규의 분석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달콤, 살벌한 연인>의 재기발랄함에 흥분했던 관객이라면, 재기발랄을 잃지 않으면서도 우아함을 업그레이드한 <이층의 악당>이 입맛에 꼭 맞을 듯. 소포모어(2년차) 징크스를 확실히 날려버린 손재곤 감독의 차기작이 더욱 궁금해진다.



박혜은 영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