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읽기/드라마 '시크릿 가든'] 점점 체험의 직접성, 관계의 친밀성 사라져 가는 세계 향한 유쾌한 반격

페이스북, 트위터, 메신저 토킹, 태블릿 PC, 스마트폰…. 10여 년 전만 해도 모두가 '그것 없이도 잘 살던' 미디어들이 이제는 현대인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으로 일상화되어 가고 있다.

실제로는 아직도 '그것 없이도 멀쩡히 잘 사는' 사람들이 많지만, 텔레비전을 켜고 인터넷과 접속하는 순간 우리는 거대한 소셜 네트워크의 망망대해 속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소셜 네트워크와 유비쿼터스의 환상은 어느 때보다 강력해졌지만, 페이스북을 통해 전세계의 친구들과 '대면'할 수 있다지만, 그런 최첨단 미디어들로 인해 우리는 과연 서로 더욱 친밀해졌을까. '미디어'를 통해서 서로를 이해한다지만, 그렇게 몇 번이나 걸러지고 미화되고 왜곡된 정보를 통해 얼마나 서로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까.

드라마 <시크릿 가든>은 성별은 물론 계급을 뛰어넘은 진정한 타자와의 '대면'을 추구하는 이야기다. 하층계급 스턴트 우먼 길라임(하지원) vs 재벌 3세 유학파 CEO 김주원(현빈). 서로 호감을 느끼는 이 두 사람 사이의 '몸'이 바뀐다는 극단적인 판타지의 서사.

이런 스토리라인은 물론 황당하지만 현대인의 치명적인 '결핍'을 아프지만 코믹하게 건드림으로써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적어도 삼중의 고난이도 장애물이 가로막고 있다. 첫째, 현실 속에서는 거의 가망이 없는 하층계급과 상층계급 사이의 로맨틱 러브. 옷핀으로 떨어진 가방끈을 응급처치한 길라임의 경제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김주원은 말한다.

"난 인종 종교 피부색깔 성적 취향에 관대해도 빈티 나는 건 용서가 안 되거든!" 길라임도 만만치 않게 팔자 좋은 김주원의 '랜덤한' 운명을 반격한다. "삼신할머니 랜덤 덕에 세상 어려움 모르고 사는 저런 남자, 저랑 놀 주제 못됩니다!" 김주원은 길라임을 향한 자신의 호의가 '사회 지도층의 윤리'라고 선언하며 그녀의 '사회적 위치'를 이렇게 잔인하게 요약한다. "넌 내가 온정과 관심을 베푸는 소외된 이웃이야." 길라임은 이렇게 반격한다.

"내가 가난한 건 맞는데, 내가 왜 네 이웃이야!" 길라임의 역공은 말장난 같지만 듣는 이의 폐부를 찌른다. '드라마 같은 우연'이 없었다면 평생 만날 일 없었던 이 두 사람은 결코 '현실'에서는 진정한 '이웃'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둘째, 아무리 사랑해도 결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남'과 '여'라는 육체적 한계가 있다. 이들의 계급적 갈등 때문에 남녀로서의 갈등 또한 더욱 격화된다. 스턴트 우먼, 여자 액션 배우라는 길라임의 직업 자체가 그녀의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매번 실험하는 직업이다.

그녀는 여성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자동차 액션' 스턴트 장면을 연기하기 위해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도록 구르고 넘어지고 떨어진다. 반면 신부감의 마지노선이 '재계 순위 20위권 내 영애로, 키 170 이상에 27세 미만, 해외명문대 학사학위 소유자'로 정해져 있는 세계관의 소유자 김주원에게는 '여성'을 낭만적 대상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굴욕적이다.

그에게 여자란 자신의 우월한 유전자를 세상에 퍼뜨려줄 전략적 파트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힘겹게 살아온 여자 길라임에게는 사랑이 '사치'처럼 느껴지고, 자신이 완벽한 피조물이라 믿으며 살아온 남자 김주원에게는 사랑이 '호르몬 장난'처럼 느껴진다.

셋째, 평생 '몸'으로만 먹고 살아온 길라임과 달리 평생 '머리'로만 세상을 이해해 온 김주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다.

콜럼비아 대학 최우수 졸업생으로 졸업한 수재에다가, 가난한 사람을 한 번도 가까이서 본 적이 없는 김주원.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만나온 모든 여자들과 달라도 너무 다른 길라임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하자 그녀의 가난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보며 고뇌에 빠지는 김주원. 그 시도는 가상하지만 그녀의 가난은 책 한 권으로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한편 길라임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일단 '몸'으로 부딪혀야 직성이 풀리는 다혈질의 정의파다. 손톱 하나 살짝 '기스'가 났다고 난리법석을 치고 엄살을 떠는 여배우를 대신해 자신이 몸을 던져 심한 부상을 입고도 '아프다'는 말 한 번 못하고 '죄송합니다'를 연신 외치며 제발 해고되지 않기만을 비는 길라임.

그녀는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죄송할 수 있는 기회'에 감사하며 온몸을 던져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그녀는 단지 액션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녀의 삶 자체가 매순간 가슴 졸이는 고난이도 액션이다.

마법사처럼 보이는 식당 여주인에게 받은 '수상한 음료'를 먹고 몸이 바뀌어 버린 두 사람 사이에는 이제 '역지사지'라는 추상적 상상이 아닌 '실제상황'이 발생했다.

다른 성별의 몸을, 그것도 전혀 다른 계급과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진 상대방의 몸을 '입고' 살아가야 하는 두 사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드라마를 보고 영화를 보고 소설도 읽고 시도 읊지만 어쩌면 정말 '완전히'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서로의 육체가 바뀌는 길밖에 없는 것일까.

<시크릿 가든>의 판타지는 단지 로맨틱 코미디의 달콤한 사탕발림이 아니라, 최첨단의 미디어를 향유하고 있으면서도 어느 때보다도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어진 이 사회의 서로를 향한 무관심과 몰이해에 대한 비극적 알레고리처럼 느껴진다.

김주원은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세계에서 살아왔지만, 그래서 가끔 그런 축복받은 인생이 지루하고 권태롭기까지 했지만, 무언가를 원한다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럽고 무언가를 꿈꾼다는 사실 자체가 두려운 사람들이 이 세상 도처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룰 수 없는 꿈과 절망적인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며 꿈을 꾸면 꿀수록 불행해지는 사람들. 김주원은 '남성의 시선'으로 길라임의 매력적인 육체를 훔쳐보려 했지만, 그가 '몸이 바뀌어' 만난 길라임의 몸은 정작 찢기고 베이고 얻어 터진 상처로 뒤덮여 있다. 길라임 또한 '부자라서 무엇 하나 부족할 게 없어 보이는' 김주원의 남모를 고통과 번민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세상에 '무엇 하나 부족할 게 없는' 완벽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 보는 '타인의 삶'만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생의 울퉁불퉁한 진실이 있음을.

우리는 어느 때보다 자주 소통의 미디어를 사용하지만, 정작 '얼굴'을 맞대고 '몸'으로 움직이는 생생한 경험은 점점 줄어간다. <시크릿 가든>은 점점 체험의 직접성, 관계의 친밀성이 사라져가는 세계를 향한 유쾌한 반격처럼 보인다.

서로 '몸'이 바뀌어서야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두 남녀처럼, 우리도 정 그렇게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면 트위터와 메신저로만 우아하게 소통할 게 아니라 '직접' 만나서 막걸리라도 한 잔 걸쳐가며 '몸'으로 만나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의 '몸'위에 나 있다.

서로의 S라인이나 성감대만 챙길 것이 아니라 진정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감대'를, 몸에서 몸으로의 소통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생판 모르는 남에게 내 몸을 맡기는 '프리 허그'에 열광할 정도로 깊은 외로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서로의 살과 살을 맞대며, 우리는 상상이 아닌 일상 속에서 소중한 '빙의'를 체험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