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더 파이브''로맨틱 코미디 여왕' 이미지 벗고 복수 갈구하는 거친 액션 도전눈물 연기 몰입… 촬영 중단되기도"건강하다는게 얼마나 감사한지…"

박복함으로 견줘보자. 영화 속 수많은 여인들이 비극 앞에 쓰러졌다. 그 가운데 영화 '더 파이브'(감독 정연식ㆍ제작 시네마서비스ㆍ개봉 14일)의 은아는 단연 상위권이다. 눈 앞에서 남편과 딸을 잃고 구사일생으로 홀로 살아남는다. 사고로 다리를 잃은 여인은 제 몸을 마음대로 가눌 수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사랑하는 이들을 앗아간 살인마에게 복수를 할 수도 없다. 오로지 절망만 남았다.

그런 은아의 옷을 입은 이가 배우 김선아다.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으로 불리던 그다. SBS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2005)부터 MBC 드라마 '아이두 아이두'(2012)까지, 그의 지난 필모그라피를 돌아보면 의아한 선택이다. 각기 다른 색깔을 지닌 캐릭터였지만, 사랑스러웠고 친근했다. 그래서 혜진의 얼굴을 한 김선아는 낯설다. 얼굴에선 화장기를 지우고 표정에선 생기를 지웠다. 복수를 갈구하는 눈빛엔 살기가 넘친다.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김선아는 시나리오를 읽고 본능적으로 작품을 택했다고 했다. 그리고 3개월 동안 스스로를 연소시켰다. 누구보다 사랑했던 가족을 끔찍하게 잃는 극단의 감정을 체험했고, 휠체어에 탄 채 맨 몸으로 바닥에 구르는 거친 액션을 소화했다. 후유증은 길었다. 그는 지금까지도 극 중 남편과 딸이 살해되는 장면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촬영 중 부상으로 다친 오른팔은 7개월이 지났지만 완전히 회복되지 못했다.

그는 신체적으로 감정적으로 많이 지친 기색이었다. 대뜸 "앞으로는 몸 사리는 연기 할거예요"라고 외친다. 자못 진지하다. 지난 고생들이 만만치 않았던 듯 했다. "외로운 작업이었겠다"고 위로부터 건넸다. 진통제를 삼키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외롭죠. 직업 자체가 좋은 직업은 아닌 것 같아요. (웃음) SBS 드라마 '여인의 향기'의 시한부 인생, '아이두 아이두'의 미혼모, 그리고 '더 파이브'까지 오면서 많이 쉬고 싶었어요. 근데 또 '해볼까' 하면 하게 돼요. 요 며칠 인터뷰를 하면서 촬영할 당시가 생각나요. 너무 힘들어서 잊어버리려 노력했는데 말이죠. 그래서 잠을 못 자요."

그가 지닌 놀라운 집중력의 '폐해'다. 현장에서도 캐릭터에 몰입해 펑펑 울던 그다. 주연배우의 눈물에 촬영이 잠시 중지되기도 했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작품을 한다고 했을까"라며 후회 아닌 후회도 많이 했다. 호된 시간이었다. 다치는 일이 빈번한 것도 그만큼 캐릭터에 자신을 내던진 이유다. 그는 "힘들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겠냐"고 덧붙였다.

은아는 시종일관 푸석푸석한 헤어스타일에 허름한 옷차림이다. 세상을 떠난 남편의 신발을 신고 다닌다. 여배우들을 더욱 아름답게 보여주는 반사판도 없이 촬영했다. 정작 배우 본인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는 영화 '예스터데이'(2002) 때도 여전사의 느낌이었고, '내 이름은 김삼순' 에서도 마냥 예쁘게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관객에게 재미를 주거나 감동을 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했다.

"어느 장면에 나와도 전 항상 그늘에 앉아 있더라고요. 제가 봤을 때 영상적으로 제가 잘 나왔어요. 분장 팀장님은 저에게 상처를 분장해 주면서, 상처가 잘 어울리는 배우라고 했어요. 저를 달래는 말인지 모르지만 전 곧이곧대로 듣고 기분이 좋아졌죠. (웃음)"

김선아의 캐릭터 몰입도를 엿볼 수 있는 것이 등장인물들과의 관계다. 극 중에서의 관계에 따라 현실에서의 심리적 친밀함이 정해진다고 했다. 작품 속에서 가족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마음의 문을 여는 인물은 박효주가 연기한 혜진이다. 두 사람은 아픔을 공유하며 친구가 된다.

"지금도 사석에서 박효주를 만나면 애틋한 게 있어요. '여인의 향기'에서 병실 친구로 나온 신지수와는 지금도 만나면 괜히 눈물이 나요. 이상하죠?"

'더 파이브'가 그에게 고통만 주진 않았다. 세상의 끝에 선 은아와 함께 호흡하며 자연인 김선아를 위안할 수 있었다. 그는 오른팔이 성치 않은 현재의 자신을 예로 들었다. SNS에 글을 남기는 것조차 쉽지 않다며 두 팔을 자유롭게 쓰는 데에 감사하다 했다.

"은아를 연기하며 걸을 수 있는 멀쩡한 두 다리가 있다는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무대인사 하면서 뛰어다니는 저를 돌아보면서 또 한 번 그 생각을 했고요. 영화를 보시고 객석에서 두 다리로 일어났을 때 은아를 한 번 생각해주세요. 그렇다면 굉장히 감사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예요."



김윤지기자 jay@sportshankoo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