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어린 임금 단종이 유배되었다가 초겨울인 12월초의 찬바람 속에 승하한 영월. 그곳에서 4개월 남짓한 삶을 보낸 단종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의 마지막 숨결을 더듬어보노라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진다.

1441년(세종 23) 7월 23일(이하 모두 음력) 문종의 외아들로 태어난 단종은 1452년 5월 14일 문종이 39세의 젊은 나이로 붕어하자 조선 제6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1453년 10월 10일에 일어난 계유정난으로 단종의 운명은 사실상 결정되었다. 수양대군과 한명회 등은 황보인․김종서 등 주요 대신들이 안평대군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명분으로 계유정난을 일으켜 그들 대부분을 숙청했다.

계유정난의 성공으로 수양대군이 실권을 장악했고 안평대군은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8일 후 사사되었다. 1455년 6월에는 금성대군도 유배됨으로써 수양대군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인물은 거의 모두 제거되었다. 한명회 등의 협박에 못 이긴 단종은 1455년 윤6월 11일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명목뿐인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것으로 비극이 끝나지는 않았다. 1456년 6월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니 이를 사육신 사건이라고 일컫는다. 역모의 근본적 원인은 상왕이라고 지목한 신하들의 주청에 따라 1457년 6월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으니 그곳이 바로 청령포(淸泠浦)다.

육지 속의 외딴섬 같은 유배지 청령포

2008년 명승 제50호로 지정된 청령포는 단종이 표현했듯이 '육지 속의 외딴섬(陸地孤島)' 같은 곳이다. 남한강의 지류인 서강이 활처럼 굽이쳐 흘러 삼면은 깊은 물로 둘러싸여 있고, 뒤쪽으로는 육륙봉(六六峰)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 유배지로 안성맞춤이었던 것.

통통배를 타고 청령포로 들어간다. 갈대숲을 지나 빽빽한 금강소나무 숲 사이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따라 유배 당시 거처인 단종어소로 간다. 단종이 머물던 본채인 기와집과 호위하던 시종들이 사용하던 초가집은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라 2000년 4월 복원되었다.

울창한 송림을 헤치면 중앙에 예사롭지 않은 노송이 눈길을 끈다. 1988년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된 수령 600여 년의 관음송이다. 높이 30미터, 가슴높이 둘레 5.19미터의 크기로 1.6미터쯤 되는 높이에서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하나는 위로, 하나는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자라고 있다. 단종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둘로 갈라진 이 소나무의 줄기에 걸터앉아 시름을 달랬다고 한다.

관음송(觀音松)이라는 이름은 단종의 슬픈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해서 '볼 관(觀)'자를, 단종의 오열하는 울음소리를 들었다 하여 '소리 음(音)'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이외에도 청령포에는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는 노산대, 한양에 남겨진 부인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쌓은 돌탑인 망향탑, 단종의 유배지임을 알리기 위해 세운 단종유지비각, 일반 백성의 출입을 금하기 위해 1726년(영조 2)에 세운 금표비 등이 있다.

단종에게 절하듯 틀어져 있는 장릉의 노송 숲

두어 달 후 서강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자 단종은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긴다. 관풍헌은 1392년(태조 1)에 세워진 영월 객사의 동헌 건물로 동쪽 옆에는 작은 누각이 서있다. 본디 이름은 매죽루였으나 단종이 이 누각에 올라, 밤이면 피를 토하듯 애처롭게 운다는 소쩍새(자규)의 한을 담은 시를 읊었다고 하여 자규루(子規樓)로 바뀌었다. 그래서 누각 정면에는 자규루, 후면에는 매죽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1457년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단종의 숙부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었다. 이에 다시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된 단종은 그해 10월 24일(양력 12월 7일) 관풍헌에서 만 16세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하는데 승하 경위에 대해서는 사사, 타살, 자살 등 여러 설이 제기되어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에도 불구하고 영월호장 엄흥도는 서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동을지산 자락에 묻었다. 그 후 오랫동안 묘의 위치조차 알 수 없다가 1541년(중종 36) 영월군수 박충원이 묘를 찾아내어 묘역을 정비했으며 1580년(선조 13)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 등을 세웠다. 1681년(숙종 7) 단종은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숙종 24) 11월 단종(端宗)으로 복위되었으며, 능호는 장릉(莊陵)으로 정해졌다.

능이 조성된 언덕 아래쪽에는 단종을 위해 순절한 충신을 비롯한 264인의 위패를 모신 배식단사,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의 혼을 기리는 정여각, 묘를 찾아낸 박충원의 행적을 새긴 낙촌기적비, 정자각·홍살문·재실·배견정 등이 있다. 장릉 주위를 에워싼 울창한 노송들은 흡사 봉분 속에 잠들어 있는 단종에게 절을 하듯 틀어져 있어 마음이 숙연해진다.

■ 여행 메모

▲찾아가는 길=제천 나들목에서 중앙고속도로를 벗어난 뒤에 영월 방면 38번 국도-서영월 교차로를 거친다.

대중교통은 전국 각지에서 태백선 열차나 버스를 타고 영월로 온다.

▲맛있는 집=장릉 옆에 있는 장릉보리밥(033-374-3986)은 전국적으로 이름난 보리밥 전문점이다. 큼직한 감자를 박아 넣은 보리밥에 각종 나물과 열무김치, 고추장, 된장 등을 넣고 비벼 먹는 맛이 일품이다. 여기에 두부와 감자, 애호박, 풋고추 등을 넣어 구수하고 칼칼하면서 개운하게 입에 붙는 된장찌개가 곁들여 금상첨화. 그 밖에 다양한 토속음식을 낸다.



글ㆍ사진=신성순(여행작가) sinsatgat@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