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세월 서린 ‘왕비의 도시’

베스프렘(Veszprem)은 헝가리 왕비의 발자취가 서린 도시다. 헝가리 초대 왕비가 살았고, 왕비들의 전설과 함께 즉위식이 열리던 곳이다. 언덕 위로 이어지는 성곽 돌길을 걸으면, 1000년을 거스른 사연들이 ‘달그락’ 거리며 귓전에서 맴돈다.

베스프렘은 9세기경 일곱개의 언덕 위에 세워진 헝가리의 중세도시다. 헝가리 초대 국왕인 이스트반과 기젤라 왕비가 헝가리 통치를 시작할 무렵 터를 닦았던 곳이다.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에서 차로 두 시간이면 닿는 베스프렘주의 주도지만 도시가 만들어내는 정경은 아늑하다. 건국을 위한 시린 과거와는 달리 도시는 고요하고 정감이 간다.

성곽 끝자락, 왕과 왕비의 동상

베스프렘 여행의 백미는 돌계단을 올라 성채 거리를 홀로 서성거리는 것이다. 시청앞 오바로쥬 광장을 지나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화재 감시탑을 지나면 좌우로 도열한 성채 골목이 모습을 드러낸다. 중세의 온기가 서려 있는 성곽의 담벽은 과거의 환영에만 머물지 않는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절벽 감옥 옆에는 현대미술관이 들어서 있으며, 주교의 궁으로 사용되는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 내부 인테리어는 이탈리아 아티스트의 손길이 닿아 있다. 왕비의 즉위식이 열렸던 세인트 미카엘 성당은 고딕과 네오로만 형식이 덧씌워진 모습이다.

성채 골목길 끝자락에는 이곳 도시의 상징인 이스트반 왕과 기젤라 왕비의 동상이 서 있다. 사후 900주년을 기념해 세워진 동상에서 내려다보는 베스프렘의 풍경은 탐스럽다. 붉은 지붕의 마을과 교회첨탑, 베네딕트 언덕이 어우러진 모습은 유럽 여느 도시들처럼 위압적이지 않으면서도 우아한 멋을 전한다. 베스프렘의 가장 인상 깊은 추억도 도시의 사연 위에 청아한 현기증을 선사하는 이곳에서 무르익는다.

시냇물과 숲이 어우러진 골목길

베스프렘의 성채는 인근에 조성된 숲길로 단아함을 더한다. 성곽 주변으로 시냇물과 숲이 어우러진 ‘새드 밸리’는 이어져 있다. 해질 무렵이면 이곳에 예쁜 카페들이 문을 열고, 성채를 바라보며 하룻밤 청할 수 있는 숙소들이 불을 밝힌다. 아침에 눈을 떠 냇물과 새소리를 들으며 숲길과 마을을 지나 성곽을 오르는 일. 베스프렘의 진한 감동은 이런 소소한 일상이 어우러지면서 완성된다.

베스프렘을 시작으로 헝가리는 이방인들에게 낯선 빗장을 연다. 베스프렘주는 발라톤 호수에 기댄 축복받은 땅이다. 발라톤 호수를 따라 서쪽으로 향하면 티폴처, 헤렌드 등 개성 넘치는 도시들이 이어진다. 티폴처는 2000년 세월을 간직한 고도로 유럽을 오가는 상인들의 교역도시로 터를 잡았다. 19세기 건축물들이 이어진 고풍스러운 도심 사이를 흐르는 수로가 잔잔한 분위기를 더하는 곳이다.

세계 3대 도자기 산지인 헤렌드 역시 여심을 사로잡는 명소다. 헤렌드에서는 손으로 직접 만들어내는 도자기 공정을 엿볼 수 있으며, 그윽한 자기에 담긴 식사와 커피로 오후 한때를 보낼 수 있다.

글ㆍ사진=서 진(여행칼럼니스트)

여행메모

▲가는길=한국에서 헝가리까지 직항편은 없다. 카타르 항공이 도하를 경유, 부다페스트까지 운항한다. 부다페스트에서 베스프렘까지는 열차와 버스가 다닌다. 베스프렘과 발라톤 호수 일대는 각각 자전거를 빌려 구경할 수 있다.

▲숙소=베스프렘은 호텔과 민박집들이 다수 있다. 성곽 인근에 숙소를 정한 뒤 아침, 저녁 산책을 즐기면 좋다. 베스프렘 관광 홈페이지(www.veszpreminfo.hu)를 통해 현지 숙박 및 여행루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기타정보=헝가리에서는 유로화 대신 자국 화폐인 포린트를 이용한다. 물가는 서유럽에 비해 저렴하다. 전열기구를 사용하려면 별도의 멀티탭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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