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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처럼 돈이 좋은 여자의 1억 만들기
"배금(拜金)이 아니라 저축(貯蓄)이죠"

“ 여자가 너무 돈을 밝힌다”는 비아냥에서 “ 젊은 나이에 갖은 고생을 해서 돈을 모으는 노력이 아름답다”는 찬사까지.

불과 1,024일(2년 10개월) 만에 1억 800만원을 모은 성공기를 담아 ‘ 나는 남자보다 적금 통장이 좋다’(위즈덤하우스 刊)를 펴낸 강서재(31)씨에게 쏟아지는 조소와 감탄이다. KBS TV ‘VJ 특공대’의 집필을 맡고 있는 방송 작가인 그녀는 지난 1999년 11월 ‘ 작가 쇼크(슬럼프)’에 빠지기 전까지는 제 손으로 적금 통장을 한 번 만들어 본 적 없는, 대책 없는 20대의 ‘쇼핑 퀸’이었다. 그때 방송작가로 돈을 번 지 5년. 통장의 잔고는 고작 700만원이 전부였다.


- 1년 근무에 700만원… 충격





재테크의 ‘ㅈ’도 모르던 철부지 여성이 돌변하여 이를 악물고 ‘1억 만들기’에 나선 동기는 단순했다. “ 슬럼프에 빠져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는데, 통장을 보니 그만 아득해지더군요. 말이 좋아 통장 잔고가 700만원이지 카드값 등 빚잔치 하고 나면 남는 게 없었어요. 이 험한 세상에서 달랑 700만원은 위안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돈을 모으기로 했죠.”

‘부자란 아르마니 정장을 10벌 가지고 있는 사람.’ 이런 식으로 돈에 대한 개념이 없던 그녀가 1억이란 목표를 정한 것 역시 무계획적이다. 결혼 자금 3,000만원에 여행 자금 2,000만원…, 대략 ‘싱글 여성이 1억원 있으면 기 죽지 않겠지’ 하는 심산이었다. 일단 ‘ 저지르고 보자’는 심정으로, 한 달에 160만원 짜리 적금 통장을 만들었다. 한 달 집세만으로 20만원을 내야 하는 220만원짜리 월급쟁이에게는 굉장한 모험이었다.

쇼핑은 안 한다고 치더라도 허구한 날 순대 따위나 먹을 수는 없는 일. 무조건 돈을 아끼는 알뜰 작전에, 일을 늘리는 양다리작전을 병행했다. 못 먹고 못 자고 못 입는, 고난의 생활이 시작됐다. “ 80만원 짜리 일을 하나 더 맡았어요. 새벽같이 집을 나서서 북극성을 보며 퇴근하는 날들의 연속이었으니 정말 죽을 맛이었죠. 하지만 하루 하루 잔고가 늘어나는 통장 보는 재미에 중도하차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됐어요.”


- 20대 즐거움이여 안녕… 정신적 성숙

아무리 예술적 영감은 자극하는 영화라도 극장에 두 시간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것은 사치가 됐고, 세일 기간의 백화점 등 20대의 즐거움과는 모두 결별했다. 휴대 전화는 오는 것만 받고 꼭 연락할 일 있으면 메시지를 보내는 식으로 하루 하루를 버텨나갔다. 몸무게는 8kg이나 빠졌고, 신경성 위염이 도졌으며, 영양 실조 때문에 눈 다래끼를 달고 살았다. 급기야 작가의 분신과 같은 담배도 끊어 버렸다. 대신 1회 100만원씩 아무때나 넣을 수 있는 적금 통장을 하나 더 만들었고, 주당 70만원 짜리 프로그램을 하나 더 맡아 초인적인 노동에 도전했다.

“ 한때 갈등도 겪었어요. 새벽 2시 일산 가는 마지막 버스를 타고 집에 가다 창밖에 비친 제 모습을 보는데 처연해서 눈물이 났어요. 그깟 1억 만들자고 내 인생 이렇게 망가지는구나 싶었죠.”

다행히도 자괴감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그간의 고생은 통장의 잔고만 불린 것이 아니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가 힘들여 돈을 모으면서 비로소 정신적으로도 성숙해지기 시작한 것. “새벽에 집 앞에서 마주치는 우유나 신문 배달 아저씨ㆍ아주머니들을 보면서 전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나 느꼈어요. 그 분들보다 더 잠자고 더 알아주는 일을 하면서 돈도 제법 많이 벌 수 있으니까요. 분명 제가 사회에서 ‘덤’으로 누리고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았어요.”

사소한 일에도 불평을 달고 살던 강씨의 태도는 이후 변화했다. 특별히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부족한 것 없이 길러준 부모님께 감사했고, 남들의 두 세배 일을 해도 버텨낼 수 있는 체력이 있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 고생 한 번 끝내주게 해보자고!’. 누군가 말했던가. 젊은 날의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피학적인 메저키스트처럼, 툭 하면 도지는 눈다래끼 같은 몸의 이상 신호도 달갑게 받아들였다. 그만큼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일테니까.

결국 강씨는 3년이 채 못 돼 1억을 모았다. 아주 열심히 일하고 있는 어느 날, 설마 하는 마음으로 확인해 본 통장엔 앙큼하게도 1억이 들어 앉아 있었다. “밥을 먹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글을 쓰다가도 갑자기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왔어요. 사실 따지고 보면 1억이 별 거 아닐 수도 있는데… 누군 몇 억씩 그냥 물려받는데, 돈 많은 남자 만나면 한방에 끝날 수도 있잖아요.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제가 인생의 한 시기를 미친 듯이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라는 사실이죠.”


- "돈 밝힌다구요? 남자 밝히기 보단 낫죠"

작가라는 생업에 걸맞게 이 시기의 기록을 책으로 엮어보자고 마음 먹은 강씨. 당초 책 제목을 이렇게 달았단다. “나는 마약처럼 돈이 좋다”. 솔직해서 좋다. “돈 밝히는 여자라고요? 돈 많은 남자 밝히는 여자보단 낫잖아요.”

출판사의 권유로 이후 “나는 남자보다 적금통장이 좋다”는 제목으로 책이 출간되자, 엉뚱한 피드백이 쏟아지기도 했다. 한 남성 독자가 인터넷에 올린 자조적인 글의 한 토막. “남자보다 적금통장이 좋다? 남자따위에 적금통장을 비교해주다니…”. 배금주의(拜金主義)를 부추길 수 있다는 비판도 있지만, 소비보다 저축을 미덕으로 삼을 줄 아는 많은 ‘또순이’들의 지지를 받아 발간 5일만에 초판 5,000부가 동이 나는 기염을 토했다. “처음 책을 쓸 때만 해도 더 이상 ‘무식하게 아끼고, 모으는’ 이런 내용은 독자들에게 어필하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독자들이(특히 여성들이) 공감하고 격려해줘서 정말 기뻐요. 솔직히 전 남자도 좋은데, 이런 과정을 기특하게 인정해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나서 결혼도 하고 싶어요. 될 수 있으면 빨리요. 호호.”

강씨는 ‘적금통장 예찬론’으로 끝을 맺었다. “사실 주식을 하거나 부동산에 투자하면 더 큰 돈을 빨리 벌 수도 있지만, 적금으로 돈을 모은 뿌듯함은 결코 맛보지 못할 거예요. 싱글 여성분들, 빨리 적금통장을 만들어서 핸드백에 넣어 가지고 다녀 보세요. 젊은 날의 1억 모으기, 사랑만큼이나 짜릿하던 걸요.”



배현정 기자 hjbae@hk.co.kr


입력시간 : 2004-06-23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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