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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25시] 발레리나 유지연
"춤과 사랑에 중독 항상 새롭고 설레요"
러시아 키로프 발레단의 유일한 외국인 정식 단원






러시아에서 한 통의 메일이 날아왔다. 마린스키 류라는 이름으로 온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종일 연습 한 탓에 고단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왔어요. 한국에서 온 메일을 보면 괜시리 반가워요. 모르는 사람이더라도, 정겹게 느껴지구요. 이번 공연 ‘백조의 호수’에서 저는 스페인 무희 역을 맡았어요. 외국에 나가면 코리안 스페니쉬 왔다며 제가 오길 기다려 주는 팬들도 생겼구요. 스페인 춤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어요. 어제 꿈엔 제가 한국에서 공연하는 꿈을 꾸었지 뭐예요. 그 기억이 선명해서 귓가에선 아직도 박수소리가 쟁쟁거리네요. 무대에 오르는 것은 중독인거 같아요. 그때마다 새롭고 설레거든요. 춤추는 순간 무아지경에 빠지게 될 때가 가장 행복해요. 발레리나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요? 우리, 한국에서 만나요.”

마린스키 류. 172센티미터의 훤칠한 키에 46킬로그램의 몸무게. 이상적인 체격과 아름다운 외모, 화려한 테크닉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그녀는 러시아 키로프 발레단의 유일한 외국인, 발레리나 유지연이다.

- <백조의 호수>에서 스페인 공주되다

유지연이 한국에 왔다. 이름 하나만으로도 명성을 확인할 수 있는 러시아 키로프 발레단의 내한 공연, ‘백조의 호수’에서 스페인 공주가 되어.

유지연과 함께 있으면 그녀가 이끄는 찬란함에 중독되는 기분이다. 도회적이고 세련된 이미지에 시원시원한 이목구비를 지녀 분위기만으로 상대가 주눅들 것만 같은데, 그녀의 매력은 찬란함 속에 함께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다. 멋진 공연을 보고 춤에 푹 빠져, 스스로 발레리나가 된 듯한 착각을 하는 것처럼.

그녀는 빛난다. 그 때문일까. 90년 1월 아직 예원학교에 재학중인 그녀에게 인생을 바꾸어 줄 후원자가 나타난다. 바가노바 발레학교와 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에서 온 발레 선생은 유지연의 춤을 보자 마자 바가노바 발레학교에 들어올 것을 권했다. 러시아에서 권위 있는 발레 학교로 이름난 바가노바는 만17세가 되어야 입학 자격이 주어진다.

그 당시 유지연은 만 13세. 입학 자격이 안 된 그녀를 두고, 그들은 러시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녀의 전신 사진 한 장을 든 채. 그 후 6개월 뒤 공식 입학 초청장을 들고 그들은 손수 한국에 찾아왔다. 이것은 바가노바 발레 학교가 최초로 만 17세가 되지 않은 외국인을 입학시킨 첫 번째 사례가 된다.

“91년 9월, 예원 중학교 3학년 때 혼자 러시아로 갔어요. 러시아 선생님에게 처음 러시아어를 배웠죠. 기차 안에서 공부한 간단한 인사말 정도가 다였거든요. 그렇게 14년을 살았네요.”

또박 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말을 하는데, 14년 동안 러시아에서 살았던 흔적이 무대 밖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의 인생에는 언제나 ‘유일한’ 이란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95년도 졸업시험에서 5.0 만점을 받고 바가노나 발레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해 키로프 발레단 ‘말리’ 컴퍼니에 입단한다. 97년부터는 키로프 역사상 유일한 외국인 정식단원으로 활약하게 된다. 러시아에서 유일한 외국인, 그것도 동양인, 게다가 어디 붙어 있는지 조차 모르는 코리아에서 온 소녀. 하지만 이 ‘유일한 소녀’는 러시아에 쉽게 적응했다.

“말을 배우기 위해 러시아 친구들하고만 지냈어요. 뭐든지 부딪치고 보자고 생각한 거죠. 시간이 날 때마다 혼자서라도 극장이나 박물관에 가서 러시아 문화를 접하러 다니기도 했구요.”

어린 나이에 갔기에 현지 친구도 금세 사귀고, 언어도 빨리 터득해 별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 있던 그녀가 외국인이라는 느낌을 받을 때는 매년 러시아 비자를 만들어야 할 때 뿐이라고.

“물론 힘든 적이 더 많았죠. 전화국에 예약해 놓고 한시간 넘게 기다려 10분 통화하고 돌아오는 길에 엉엉 울기도 했어요. 한국에서 최고로 잘한다는 소리만 들었는데, 여기 오니 기본기가 부족하다는 소릴 듣고 충격을 먹기도 했구요. 어려운 테크닉은 제가 더 잘했지만, 기본적인 동작에선 그곳 애들보다 힘들어지고 정확성이 없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것이 우리나라 발레계의 큰 문제점이구나 싶었죠.”

- 한국의 최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기본기 다지기 연습에 돌입하면서 발목부상도 많이 입었다. 깁스를 했을 때는 친구들 연습하는 것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서럽기만 했다. 그뿐 만이 아니다. 12월생인 그녀가 러시아에서 첫 생일을 맞을 때 였다. 생일파티를 위해 케이크를 사러 빵 가게에 갔지만 길다란 줄이 몇 줄이나 서 있는 것이다.

돈이 있어도 가게에 물건이 없어 식권으로 모든 음식을 배급 받고 있을 때니까. 한 시간 반 넘게 기다린 끝에 그녀 차례가 되자 바로 앞에서 케이크가 매진되었다는 말을 듣고 가게를 나오면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혼자서 자신의 생일을 챙기려고 빵 가게 앞에 줄서 있는 이국의 14살 소녀를 상상해 보라.

그녀는 무척 어른스럽고 조숙했다. 한국에 전화할 때도 가족에게 보고 싶다는 속엣말을 한번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괜히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다. 그리고 강했다. 지는 것을 싫어하고 욕심이 많은 성격 탓에 스스로를 괴롭히면서까지 연습을 했다. 노력의 결과는 언제나 달았다.

“원래 클래식 데미 솔리스트인데요, 캐릭터 춤을 잘 소화해 낸다고 백조의 호수를 할 때는 스페인 솔로를 맡아요. 저만큼 스페인 춤을 잘 추는 사람은 없다고 칭찬도 듣구요.”

현재 그녀는 키로프 발레단의 솔리스트와 군무를 함께 하는 드미 솔리스트다. 하지만 단장으로부터 그 실력을 인정받아 조만간 프리마 발레리나로 설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홀로 유일한 외국인이면서 자신만의 고유한 빛을 잃지 않는 그녀. 그 빛남의 비결은 당당함이다. 그 속에는 그 동안의 피나는 노력과 열정이 숨어 있다. 또한 자신이 소속된 발레단에 대한 강한 애착과 자부심이 녹아있다.

“바가노바 학교에서 최고인 사람들이 키로프에 오죠. 군무도 바가노바가 단연 최고구요. 이곳에 있으면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어요.”최고의 발레단에서 유일한 외국인으로 빛을 발하는 그녀이기에 함께 하는 자마저 그녀의 후광을 받는다. 함께 당당해지고 함께 자부심이 느껴지니 말이다.

- 드라마틱하고 섹시한 역 하고 싶어

“여러 유혹이 있지만 발레리나로서 원숙함을 보일 수 있는 나이까지 키로프 발레단에서 활동할거구요. 지도자 코스를 밟은 후에 고국의 후배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어요.”러시아 남자들에게 흠모의 대상인 그녀. 밝고 긍정적인 성격으로 여자친구보다 남자친구가 더 많다고 말하는 그녀는 보드카를 좋아하냐는 질문에 술은 싫어하지 않는 편이라고 시원스럽게 말한다.

“지젤이나 세헤라자데,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드라마틱하고 섹시한 역을 해보고 싶어요.”

세계 최고의 발레단에서 단단하게 단련된 유지연. 화려한 테크닉과 세련된 이미지를 지닌 그녀기에 말하는 순간 이미 그녀는 무대의 주인공이다. 고국의 무대에서 더욱더 빛나는 그녀기에.


유혜성 객원기자 cometyou@hanmail.net

입력시간 : 2004-11-03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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