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기를 포기한 야만의 극치생체실험 사진 및 영상물·시설 전시, 일제 잔학사아 되살아나중국 정부, 부대 터 발굴 및 자료 보강으로 관광 상품화

[르포] 하얼빈 일본 관동군 731부대 유적
인간이기를 포기한 야만의 극치
생체실험 사진 및 영상물·시설 전시, 일제 잔학사아 되살아나
중국 정부, 부대 터 발굴 및 자료 보강으로 관광 상품화


인간은 인간에게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 이런 물음에 대하여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소의 유적이 양(量)으로 대답해 준다면, 하얼빈(哈爾濱) 731부대 유적은 질(質)로서 그 야만의 극치를 말해준다.

두 유적은 이런 차이 밖에도 역사 청산 문제에 있어서 독일과 일본이 얼마나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 주는 교과서이기도 하다. 독일과 폴란드는 아우슈비츠 유적 보전과 발굴 관리에 모범을 보여 역사 교육의 산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중국은 이제야 유적 보전의 필요성을 깨닫고 있으며, 일본은 아직 만행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최근 731부대 유적이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하얼빈 빙등축제의 명성 때문이다. 해마다 신년 벽두에 개막되는 이 축제에 여러 나라에서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자, 중국 정부와 헤이룽장(黑龍江)성 당국은 더 많은 관광객 유치를 위해 유적지를 박물관 식으로 꾸미기 시작했다. 전시실 시설을 바꾸고 관련 부대 터의 발굴을 서둘러 내용물을 보강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적지로 지정 받아 애국주의와 반파시스트 교육의 전진 기지로 삼으려는 계획도 추진 중이다.

하얼빈 남쪽 교외 핑팡(平房)지구에 있는 ‘침화일군 731부대 죄증(罪證)진열관’은 이제 하얼빈 관광지도에도 실린 관광 상품이 되었다. 빙등축제를 보러 온 국내외 관광객들이 찾아 와 가이드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는 장면은 여느 관광지와 다를 바 없다. 관람객들은 당시 상황을 수록한 사진과 실제로 실험에 쓰였던 집기류, 모형을 이용한 생체 실험 장면, 비디오 영상물 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잔학성의 극치를 알 수 있다.

마루타 흔적 고스란히 남아
인간의 몸을 나무 토막(마루타ㆍ丸太)으로 여겨 온갖 실험을 거듭하고, 죽으면 한 구덩이에 파묻거나 태워 버린 만행은 같은 인간이 인간에게 한 짓으로 보기 어렵다.

동상 치료법 개발을 위해 영하 30도 혹한의 눈밭에 맨발 맨손의 인간을 기둥에 묶고 강제 동상을 입혔다. 그 상처에 끓는 물을 부어 보기도 했고, 찬 물과 미지근한 물을 번갈아 부은 뒤 비교 관찰 실험도 했다. 여름에는 냉동실에 가두어 손발을 꽁꽁 얼린 뒤 쇠붙이로 때려 반응을 관찰 했다. 비디오로 기록돼 있는 내용들이다.

큰 유리 상자 속에 사람을 가두고 밖에서 공기를 빼내 완전 진공 상태를 만든 뒤, 그 속에서 인간이 어떤 고통을 당하는가를 기록하고 사진을 찍었다. 페스트 같은 세균에 감염된 인간의 장기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관찰하기 위해 음식과 음료에 균을 주입해 강제로 감염시키고, 마취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배를 갈라 관찰하는 만행도 자행되었다.

민간인으로서 그 일에 종사했던 한 일본인은 그렇게 적출된 장기를 물에 씻어 표본으로 만드는 것이 자신의 임무였다고 증언했다. 마루타들이 세균 음식 먹기를 거부하자 강제로 주사하거나, 피부를 벗겨내고 근육에 주사하는 더 악독한 방법을 썼다.

전시물을 둘러보는 관람객들.

그렇게 희생된 마루타의 숫자는 아무도 모른다. 진열관에는 그 수를 3,000명이라고 써 붙였지만 근거는 확실치 않다. 그렇게 죽은 사람은 주로 중국인이고 러시아와 한국인도 있었으나, 역시 진상은 오리무중이다. 진열관 복도에 새겨 놓은 희생자 명단 끝 부분에는 조선족 심득룡(沈得龍)과 이청천(李淸泉)이라는 이름이 있다. 어디 살던 누군지 알 수는 없다.

이 부대의 책임자는 ‘인간 백정’ 이시이 시로(石井四郞)중장이었다. 그는 전후 도쿄 국제 군사 법정에 기소되어 재판을 받을 때, 마루타(생체 실험 대상)가 총 3,850명이었고, 그 가운데 러시아인이 562명, 한국인이 254명, 나머지는 모두 중국인이라고 진술한 바 있다.

일본군이 이렇게 잔혹한 실험을 거듭한 이유는 단 하나, 효과적으로 적을 죽이는 방법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세균을 이용한 무기를 만들어 단기간에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저항 세력을 제압하려는 목적에서 기획된 연구였다. 이시이는 도쿄 국제군사법정에서 “도조 히데키 육군상이 나에게 무기 개발 공로를 치하하면서, 세균 무기와 화학 무기를 쓰면 총과 대포를 사용하는 것에 비해 원가가 5분의 1 정도 밖에 안 든다고 말했다. 더 중요한 것은 일본에 크게 부족한 철강을 절약하는 것이라고 했다”고 진술해 방청인들을 놀라게 했었다.

부대 책임자 이시이 면죄극 전모 밝혀져야
그렇게 개발된 세균 무기는 실제로 사용되었다. 하얼빈 인근 여러 마을의 생체 피폭 실험장에서 현장 실험을 끝낸 세균 폭탄의 위력은 놀라웠다. 중국 작가 황허이(黃鶴逸)의 저작 ‘도쿄 대재판’에 따르면, 이시이 시로는 법정 진술을 통해 저장성 닝포(寧波) 지방에 투하해 2만 2,600여명, 산시(山西) 허베이(華北) 산뚱(山東) 허난(河南) 변경 지대에서 15만 6,000여명, 창더(常德)지방에서 8,500여명이 사망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돼 있다. 비행기로 페스트 세균 폭탄을 투하한 결과였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이시이가 도쿄 재판에서 기소되지 않고 석방된 일이다. 미국이 생체 실험 필름자료를 넘겨 받는 조건으로 그를 풀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시이 석방 파문을 잠재우기 위해 맥아더 사령부는 “그가 석방 후 너무 기뻐 과음한 나머지 고혈압으로 죽었다”고 죽음을 조작했다가, 소련 측이 그가 살아있는 사진을 공개해 망신을 당한 일도 있었다.

일본과 미국은 731 부대 만행의 진상과 함께 이시이 면죄극의 전모를 밝힐 때가 되었다. 올해는 태평양 전쟁 끝난 지 60주년이다.

하얼빈=글·사진/문창재 언론인


입력시간 : 2005-02-01 13:46


하얼빈=글·사진/문창재 언론인